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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선사와 교수, '서장'을 논하다
봉화 각화사 선덕 고우스님 VS 안동대 국문과 전재강교수


서암이란 현판 아래로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다. 태백산 줄기가 서암 유리문에 그 자태를 잔잔히 비추는 것이 인상적이다. 고우 스님과 전재강 교수가 파안대소하고 있다.


【전문】각화사 서암 고우 스님 방에는 대혜종고 선사의 진영이 걸려있었다. 재가자에게 선수행의 모든 것을 편지로 알려줬던 당대 선지식 대혜종고 선사. 고우 스님은 대혜 선사와 재가자들의 선수행 서신 묶음집 <서장(書狀)>이 정견(正見)을 세우는 선지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랬을까? 고우 스님을 만난 전재강 안동대 국문과 교수는 시종일관 스님의 말 한마디에도 귀를 연신 쫑긋 세웠다. 그리고 글로 받아 적었다. 지난 2001년 3월, 몇몇 스님과 재가불자들의 틈에 끼어 고우 스님의 <서장> 강의를 들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6월 17일, 그렇게 제자는 스승을 찾아왔다. 과연 <서장>이 현대를 사는 출ㆍ재가자들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지, <서장>의 핵심사상은 무엇인지, 제자 전 교수는 스승 고우 스님에게 물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다. 사진은 자상하게 설명하는 고우 스님과 그 말을 받아 적는 전재강 교수. 사진=김철우 기자


'서장’의 핵심은 정견과 화두 타파 통해 깨달음 체험하기

전재강 : <서장>은 간화선에 대한 서신문답을 묶은 선어록으로, 선수행의 교과서로 알고 있습니다. 과연 <서장>은 어떤 성격의 책인지, 나아가서 왜 출ㆍ재가들이 공부해야 하고 또 마음 자세는 어떻게 가져야 할까요?

고우 스님 : 부처님은 존재원리를 발견했어요. 그 존재원리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 바로 선(禪)이죠. 중국 대혜 종고 선사는 <서장>을 통해 당시 시대상의 극복법으로 선을 제시했어요. 때문에 <서장>의 성격은 시공을 초월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는 길이 되죠. 그래서 <서장>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에요. 선의 성격과 선공부의 필요성,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줘요. 특히 <서장>은 존재원리가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됨을 강조해요. 이를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 말하죠.

전재강 안동대 국문과 교수가 6월 17일 경북 봉화 각화사 서암에서 고우 스님에 <서장>이 현대를 사는 출재가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묻고 있다. 사진=김철우 기자


전재강 : <서장>은 대혜 스님과 재가자들의 상황별 선문답을 통해 전형적인 생활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엘리트 지식인들이 생활 속에서 불교수행을 하며 궁금했던 것을 질문하고, 대혜 스님이 답을 주셨다는 점에서 <서장>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당시 재가자들의 선수행의 열기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방증일터인데요. 그럼 <서장>은 재가선의 활성화, 생활선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현대인들에게도 <서장>의 가르침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유효할까요?

고우 스님 : <서장>은 시대의 필요에 의해 관심을 갖게 된 선어록이에요. 그 필요는 무엇일까요? 자기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부재에서 오는 불안한 마음 때문이죠. 선을 해야 한다는 까닭도 여기에 있어요. 사실 존재근원에 대한 무지가 중생들에게 이기심을 일으켜,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 등의 대립ㆍ갈등ㆍ투쟁을 만들어내죠. 그런 이유로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겁니다. 때문에 지금도 선에 관심을 갖게 하는 거죠.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서장>은 정견을 세우는 또다른 선지식이라고 강조하는 고우 스님. 사진=김철우 기자


선은 특히 부처님이 발견한 존재원리를 생활 속에 스며들게 해 그 생활을 완성시켜는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선은 생활에 매우 밀접해 있어요. 선이 우리에게 필요성을 더 느끼게 되는 까닭도 이 때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출ㆍ재가자들은 너무 도식화된 간화선에 얽매여 일상생활을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점을 지양하고 생활을 통해 선을 구현해가는 전통을 살려야 해요. 대혜 스님은 ‘생활을 통한 선의 구현’을 매우 강조했어요. 화두를 통해 존재원리 체험을 생활과 병행할 것을 강조했죠.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화두를 통해 체험하는 데만 너무 노력하다보니, 일상생활을 등한시하고 있어요. 이런 점은 시정돼야 해요.

간화선법과 회광반조법의 차이점을 묻고 있는 전재강 안동대 국문과 교수. 사진=김철우 기자


전재강 : 그렇군요. 불교가 말하는 존재원리를 선이 온전히 담고 있네요. 그런 선이 개인과 국가 등의 구체적인 생활과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런 점에서 오늘날 현대인은 이 존재원리를 모르고, 또 모르는 속에서 그런 삶을 살다보니 개인ㆍ사회ㆍ국가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는군요. 때문에 선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지니고 있고, 그런 내용을 <서장>이 포함하고 있어 현대에서도 중요한 선서가 되는군요.

그런데 스님, 사실 <서장>이 나오기 이전에는 조사선의 쇠퇴기였다고 봅니다. 스승의 말씀 한 마디에 깨닫는 ‘언하대오(言下大悟)’의 전통이 약해진 때였어요. 그래서 하근기 수행자를 위해 나온 극약처방이 바로 간화선 아닙니까? 그럼 이런 관점에서 <서장>이 차지하는 의미는 어디일까요?

고우 스님 : 선어록은 그 양만 따져도 매우 방대해요. 그 중에 <서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의미는 재가자가 직접 현실생활에서 필요성을 느껴 대혜 스님에게 편지로 묻고, 그 해결법을 편지로 들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죠.

또 간화선이 조사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많은데, 사실 이 둘은 같습니다. 조사선 속에도 정형화만 안 됐을 뿐, 간화선에 대한 기록들이 많아요. 가령 조사스님들은 제자들이 존재원리를 물었을 때, 화두로써 답을 했어요. 그 화두로써 답한 그 자리에 바로 깨친 분도 있었고,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화두가 무엇인지를 몰라 그것을 자연스럽게 의심을 했죠. 당시에는 간화라는 말이 없었지만, 그런 형태로 공부를 해왔던 거죠. 이후 대혜 스님 이 간화선이란 이름도 붙이고, 그것을 정형화시켰어요.
대혜 스님 당시에는 선공부가 사대부에게 유행이었어요.

모든 존재원리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 선이라고 말하는 고우 스님.


그런데 일부 선수행하는 사람들이 선의 본질인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존재원리의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사량분별로만 이해하려는 풍조가 만연했죠. 그래서 체험 없이 그냥 말로써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는 풍조가 생기게 됐어요. 심지어 대혜 스님은 자신의 은사가 썼던 <벽암록> 판본을 모두 불태워버릴 정도였죠. 그래서 대혜 스님이 그때부터 과거 조사스님들이 들어온 화두들을 모두 모아 공부법으로서 정형화시켜 채택한 간화선 수행법을 만들어낸 것이에요. 결국 간화선은 옛날 조사스님들의 말에서 의심을 일으켜 깨달으라고 한 수행법이에요.

전재강 : 대혜 스님은 실참실오(實參實悟)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간화선을 정형화하고 체계화했다고 할 수 있군요. 그럼 대혜 스님은 <서장>에서 간화선이 입각한 근본적인 입장, 선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 선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 선 수행에서 경계해야 할 사항 등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궁금합니다.

고우 스님의 말을 글로 받아 적고 있는 전재강 교수. 사진=김철우 기자


고우 스님 : <서장>이라고 해서 별다른 법이 아니에요. <서장>이 불법이고 불법이 <서장>입니다. 조사선이나 간화선이나 모두 다 하나에요. 그럼 부처님이 발견한 존재원리란 도대체 무엇이냐? 우리는 견성 유무를 떠나 6근(根) 6식(識)을 통해 현상을 보고 느끼고 감지를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 현상을 만드는 본질은 안 보고 있어요. 부처님이 혜안(慧眼)으로 보신 시각은 현상은 물론 그 본질을 꿰뚫고 있지요. 그래서 육안으로 보는 현상과 혜안으로 보는 시각은 달라요. 부처님의 시각이 바로 보는 것이고, 육안으로 보는 것은 착각이지요.

사실 인류역사는 현상만 보고 자기 입장을 중심으로 취사선택하면서 반대되는 입장과 끝없이 대립 갈등 투쟁해왔죠. 심지어 대립과 갈등은 전쟁도 불사하게 했어요. 그런데 현상의 차별이 평등한 본질로 통일되면, 소모적인 논쟁도 불필요한 투쟁도 없어지게 돼요. 거기에서는 평등과 통일된 원리로, 우열과 귀천도 따지지 않아요. 각자가 하는 일에 가치를 알게 돼, 나와 남이 함께 잘 사는 길을 발견하게 되지요. 무한 경쟁이 아닌 무한상생으로 삶이 바뀌게 하지요.

또 선수행에서 경계할 점은 사량분별로써 존재원리를 이해하려는 것이에요, 이것은 심각한 병폐입니다. 그런데 이 병폐는 그냥 병폐로 끝나지 않고, 선수행을 구두선(口頭禪)으로 떨어뜨려 일생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못 줍니다. 말로는 깨친 듯하지만, 정작 실제생활에는 실행이 안 되는 구두선에 빠지게 되는 거지요. 이는 존재원리에 어긋나게 되는 행위지요.

전재강 : 선의 본지는 일체가 ‘본래성불(本來成佛)’해 있다는 것입니다. 대혜 스님은 <서장>에서 간화선을 매우 강조했지만, 다른 편지를 보면 간화선 이외 자기를 돌아보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는 선을 말씀하시기도 한 듯합니다. 선법 가운데 회광반조법의 근본 입장도 간화선의 근본 입장과 같습니까? 또 대혜 스님이 말씀하시는 회광반조법이란 어떤 수행 방법입니까?

고우 스님 : 본래성불은 모든 불교에서 강조하는 말이죠. 원시불교에서는 현상이 있든 없든 모든 존재는 연기로서 존재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여래를 본다고 했죠. 결국 ‘연기=법=여래=존재’인 셈입니다. 대승불교에서도 <열반경>에서 ‘유정무정개유불성(有情無情皆有佛性)’이라고 했어요. 본래성불을 강조하고 있는 거죠. 이는 현상만 보고 본질을 못 보는 중생도 역시 본래 성불해 있고, 현상과 본질을 함께 혜안으로 보는 부처님도 본래성불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체험해가는 데 간화선법과 회광반조법이 있지요.

메모하는 전재강 교수.


<서장>에는 간화선법이 2/3정도, 회광반조법으로 본래성불로 돌아가는 내용이 1/3 정도 돼요. 대혜 스님이 간화선법만 고집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간화선법이 필요한 사람에게 간화선법을, 회광반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회광반조를 유연하게 제시했지, 편협하게 주장한 것은 아니에요.

간화선법과 회광반조법은 무엇일까요? 간화선법은 화두를 통해 순간 깨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의심을 통해 본래성불에 계합해 들어가는 수행법이에요. 회광반조는 반대돼요. 초기불교에서는 회광반조법을 강조했어요. 예를 들면, 2조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에게 ‘마음이 불안하니까 마음을 안심시켜달다’고 말했을 때, 달마 스님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하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밖에서 찾던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내면으로 비춰보게 한 거죠. 이것이 회광반조법이에요.

선문에서는 간화선을 성성적적(惺惺寂寂), 회광반조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했어요. 이것을 원시불교에 비교한다면, 간화선은 위빠사나, 회광반조는 사마타라고 할 수 있어요. 혜능 스님의 제자인 영가 스님도 이렇게 보았어요.

여기에서 매우 조심할 것은 위빠사나는 혜(慧)고 사마타는 정(定)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정혜를 나눠놓고 보면 안 돼요. 혜능 스님은 이렇게 보는 것을 <단경>에서 외도라 했어요. 즉 간화선과 회광반조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수행법이라고 받아들이면 절대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건 오해입니다. 위빠사나를 하더라도 ‘쌍조(雙照)’하라는 말이죠. 관(觀)을 하더라도 지(止)가 동시에 이뤄져야 ‘성성적적’이라 해요. 성성은 관이고, 적적은 함께 동시에 한다는 의미지요. 또 회광반조를 할 때에는 안으로 돌이켜 봐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회광반조는 적적에서 성성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간화선은 쌍조(雙照)로써 수행하고 회광반조법은 쌍차로써 수행해야 해요. 그러면 정혜가 분리되지 않고 항상 함께 하게 돼요. 정혜를 나눠놓고 수행하면 안 돼요. 쌍차쌍조로 봐야 해요.

전재강 : 잘못된 수행법과 관련된 질문을 하겠습니다. <서장>에서 대혜 스님은 묵조선을 배척하면서 잘못된 선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묵조선은 어떤 것이며 무엇이 잘 못 되었기 때문에 비판했습니까? 대혜 스님께서 주장하신 간화선이나 회광반조와 대비해 소위 ‘묵조사사배(師邪輩)’의 문제점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시오.

고우 스님 : 대혜 스님은 회광반조법이 잘못됐다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대혜 스님 스스로도 회광반조와 간화선을 합쳐 공부방법을 제시했어요. 때로는 간화선법을 제시했다가 회광반조법을 말하기도 했지요. 대혜 스님이 배척한 묵조선은 회광반조하는 묵조선이 아니에요. 적적만 하는 묵조선을 비판했어요. 묵조선에서도 묵조를 잘못하고 있는 사람을 배척했지요.

대혜 스님은 <서장>에서 적적만 하는 묵조선을 비판하는 내용도 많지만, 반대로 ‘있다’에 집착해 성성만 수행하는 사람들도 동시에 배척하고 있어요. 수행은 성성적적이나 적적성성으로 하는 것이 올바른 선수행임을 강조했죠. 다만 적적으로만, 성성으로만 하는 수행법을 비판했어요. 적적만 하는 수행은 무(無)에 떨어진 사람, 성성은 유(有)에 떨어진 사람들이니 이것은 잘못됐다고 했어요. 적적성성하는 회광반조가 잘못됐다고 한 것이 아니에요.

<서장> 당시, 왜 적적만 하는 공부병폐가 많았을까요? 이런저런 복잡한 일상생활을 하던 사대부들이 적적한데 빠졌기 때문이죠. 이는 적적만 하는 공부가 일상생활에 시달린 마음을 다 쉬어버리게 해 이런 경향이 많았죠. 적적만 하는 묵조선을 비판하다보니, 묵조선이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여기서 말하는 묵조선은 적적성성하는 공부가 아니라, 적적만 하는 묵조사사배를 의미해요. 실제로 굉지 정각 선사가 강조한 묵조선을 꾸짖은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오해를 하면 안 돼요.

전재강 : 그럼 묵조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미인가요?

고우 스님 : 그렇죠, 묵조선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요.

전재강 : 묵조선이 바로 회광반조입니까?

고우 스님 : 그렇죠. 그것이 원시불교로 말하면 ‘사마타’입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쌍차쌍조로 수행을 해야 해요. 그럼 쌍차쌍조로 어떻게 수행을 할까요? 쌍조는 성성적적으로 공부해야 되고, 간화선과 위빠사나는 성성적적으로, 사마타와 회광반조는 적적성성으로 공부해야 해요. 사마타만 한다고 적적만 하고, 위빠사나만 한다고 성성만 하면, 이것은 둘 다 외도입니다. 적적만 하면 묵조사사배이에요. 적적만을 가르치는 스승들을 의미하지요. 삿된 선, 잘못된 선인 거죠.

전재강 : 지금까지 <서장>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지 거의 드러났습니다. 본래성불 입장에서 선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 서장의 핵심사상인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서장>의 어떤 대목에서 감명을 받으셨습니까?

고우 스님 : ‘본래성불’이란 말이 가장 중요해요. 본래 우리가 부처라는 말이지요. 부처님이 혜안으로 발견한 세계에는 우리도 같이 존재하고 있어요. ‘본래성불’이란 대목은 다른 종교에 없는 말이에요. 이 말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부처님, 공자부처님, 노자부처님, 예수부처님, 석가부처님, 마호메트부처님’ 등 모든 존재는 부처님이기에 가능한 말이지요. 이런 시각에서 보면, 종교도 갈등 없이 통일할 수 있어요. 모든 존재는 연기로서 존재해 있고, 그 연기로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법이고 진리지요.

또 시공을 초월해 이 세상을 본다면, 정말로 이 세상에의 갈등과 대립, 투쟁 등은 하루아침에 종식시킬 수 있어요. 그래서 본래성불이란 이 대목, 즉 ‘모든 존재는 부처로서 존재한다’는 이 말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지요. 본래성불이란 말에는 귀천도 갈등도 없어요. 개개인의 존재원리를 이렇게 보면, 이 세상의 갈등 대립, 투쟁, 남북문제, 인류 종교 등 모든 문제가 다 본래성불이란 말속에 다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전재강 : 그럼 본래성불을 선적인 입장에서 제대로 수행한 서신을 묶은 것이 <서장>이고, 그 <서장>의 방법에 따라 생활을 제대로 해 개인과 국가 등의 갈등을 바로 잡는 것이 생활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고우 스님 : 맞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성불이기에, 죄와 업도 여기서 성립이 안 돼요. 본래성불입장에서는 죄도 업도 없지요. 그래서 죄나 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에요. 그래서 본래성불만 체험하게 되면,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용서할 수 있고, 그 사람을 큰마음으로 안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전재강 : 요즘은 살아있는 선지식이 드물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서장>은 진정한 선지식이 된다고 봅니다. <서장>이 초심자나 구참자, 출가자나 재가자들에게 갖는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재가자들은 어려워서 힘들어하고, 출가자는 그것을 알음알이로 따져 책 같은 것을 보지 말라며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고우 스님 : 선지식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해요. 선지식은 본래성불 그 자리를 체험하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존재가 본래부처로 돼있다고 해도, ‘내가 있다’는 착각으로 그 본질인 본래성불을 보지도 계합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선지식은 그런 우리에게 본래성불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선지식은 첫째, 화두를 제시해 바로 깨닫게 하거나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화두참구를 하게 해 깨닫게 하는 방법을 일러주지요. 선지식은 바로 그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해요. 가령 여행을 가는데, 길도 잘 모르고 가야할 이유도 분명치 않은 사람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사람은 안 갑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목적을 향해 여행을 갈 수 있도록, 또 그 여행을 가야할 당위성과 필요성 등을 충분히 미리 숙지시키는 역할을 선지식이 하는 거죠.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지식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목표를 향해 가는 이유를 정견(正見)으로 설명해요. 또 정견을 갖춰주게 하지요. 중생들은 그 정견에 의해 열심히 수행해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견은 바로 자신이 본래성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효능이 있지요. 현대 사람들에게 정견이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필요한 길임을 깊이 인식시켜주는 것이 중요해요.

선이 현대인에게 갖는 의미는 하늘의 햇빛, 공기와 같다고 말할 수 있어요. 공기와 빛이 없이 못 살죠.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존재원리대로 살아가면 나도 남도 더불어 잘 살수 있는 길이 나오는데, 왜 머뭇거리고 가지 못하나요? 이런 점에서 선지식의 의미가 큽니다. 본래 존재원리를 깨우쳐 주는 것이 바로 선지식이에요.

전재강 : 선지식의 본질을 바로 말씀해주셨습니다. 결국 그런 스승의 역할을 <서장>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고우 스님 : <서장>이 그런 선지식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아요. 물론 다른 선어록도 중요하지만, <서장>을 중요 선수행의 교과목으로 배우는 까닭에서도 그 가치를 알 수 있지요.

전재강 : 살아 계신 선지식이 요즘 드물다 보니, 선의 핵심을 잘 담고 있는 <서장>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스님, 요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선 수행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도입된 다양한 수행법들이 소개되면서 일반인들은 어떤 수행 방법을 선택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고만 있습니다. 그래서 <서장>의 내용과 큰스님의 오랜 선수행의 경험에 근거해 선수행의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십시오.

고우 스님 : 요즘 우리 사회는 근원적인 불안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불안이 겹치면서 ‘수행붐’이 일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수요가 증대되면서 공급도 확대되고 있지요. 수행법이 다양하게 소개되면서 수행공간도 마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수행붐이 거의 영업에 가깝다는 것이 큰 문제에요. 그래서 저는 요즘을 ‘수행혼란시대’라고 말해요. 다양한 수행법 중에 정말로 살아가면서 근원적인 불안과 시대적 상황에 따른 불안을 마음으로 해소하면서, 이 시대를 지혜롭게 잘 살 수 있는 길인지 짚어봐야 해요.

요즘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따라 불교 수행법도 제대로 정리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방법으로 정리해야 해요. 그래서 이번에 이런 혼란을 정리하는 입장에서 <간화선 지침서>를 만들었어요. 부처님이 발견한 존재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통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기 위해서죠.

정말로 전통 수행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첫발을 잘 딛어야 합니다. 선지식은 수행자들에게 정견을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 정견에 의해 바로 수행체험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역시 결론은 정견이 필요해요. 정견을 세우는 데 필요한 책과 선지식을 만나야 합니다. 이는 어느 시대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부분이에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견에 의해 일상생활화 하는 노력하면서 그 속에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불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전재강 : 우리가 체험을 못해도 선지식이나 선지식의 가르침이 담긴 선서를 통해 정견을 세우고, 그 정견에 따라서 실천하는 삶을 살면서 공부해가는 것이 중요하군요. 공부와 실천이 생활에서 어긋나지 않게 공부해야 하겠군요. 오늘 긴 시간에 동안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북 봉화=김철우 기자 | in-gan@buddhapia.com
2005-06-21 오후 1:54:00
 
한마디
고우 큰스님의 가르침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스승이 계시다는 것이 이세상을 살맛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
(2005-06-22 오전 11:22:46)
47
선불교 , 흔히 발전된 불교라고 말은하지만 사제법문의 충분한 이해가 전제 되어야 함니다.
(2005-06-21 오후 11:06:34)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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