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사코 기자만나기를 거부하던 혜운 스님은 우리나라 당대 최고 선지식인 운봉과 향곡 선사의 법어집을 내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특히 ‘선병요설(禪病要說)’이란 대목을 펼쳐 보이며 수행에 큰 도움이 되는 대목이라고 강조했다. 참선을 공부하는 이들이 범하기 쉬운 선병들이 조목조목 소개된 부분이다. ‘선병밖에 어떤 것이 병 아닌 선이겠는가?’ 라는 선지식의 단호한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혜운 스님은 스스로를 ‘유명무실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오랜 기간 향곡 스님을 가까이서 모시며 명안(?眼)을 얻은 선사다. 굳이 법맥을 따지자면 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이어지는 향곡문도회장으로 1997년 운봉 스님과 향곡 스님 법어집을 재판 보급에 나섰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향곡 선사의 서릿발 같은 행적을 옆에서 지켜보며 알게 모르게 온몸으로 그 법력을 느끼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은근히 들었다.
| ||||
스님에게 향곡 스님을 옆에서 모셨던 뒷 이야기들을 물었다.
“요즘 스님들은 너무 쉽게 살아요”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스님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우리가 살았던 것처럼 하면 지금 스님들은 다 도망가고 말게야” 스님은 눈을 번쩍뜨며 웃어 보인다. 그 표정에 수많은 세월을 지나온 수행이력이 물씬 묻어난다. 눈을 감고 뜨는 걸로 법문이 되는 뜻을 어렴풋이 알듯 했다.
“향곡 스님이 평소에 자주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옆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으셨을 것 같은데, 스님은 어떤 식으로 가르침을 주셨나요?”
“예전에는 큰스님들이 경전이나 율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출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목이 지내는 방에서 나무하고 일을 해야 했지요. 저 놈이 수행자가 될 그릇인가를 보고 싹이 보여야 출가수행자로 받아줍니다. 그리고 출가하고 나면 그저 또 열심히 일만해야 합니다. 아프다고 약을 주지도 않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옷도 모두 얻어 입었지요. 양식이 없으면 가끔 걸러서 먹고, 옷이 떨어지면 누덕누덕 기워서 입었습니다. 그렇다고 스님이 지금처럼 일일이 가르침을 내리거나 설명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온전히 전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 ||||
스님은 앞에 있던 물 컵을 불쑥 내밀며 “이렇게 전달하는 뭔가가 있었지요”라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더 이상 이런 모습을 거의 느낄 수 없다고 한탄했다.
스님도 힘든 수행 생활을 피해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았을까? 문득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옛날 스님들은 아주 잘난 사람이나 아니면 아주 못난 사람이 스님 노릇을 제일 잘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생각이 뚜렷하거나, 아니면 말도 못하고 모습도 못생긴 사람이 중노릇을 잘 한다는 것이지요. 나는 워낙 못생겼으니 어디 갈 생각도 못 하고 부처님 밥을 먹고 살았지요. 그러나 50이 넘으니 마음이 정확하게 굳어집디다. 오직 내가 할 일은 부처님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굳어졌지요.”
| ||||
그저 못났으니 부처님 밥 먹고 살아왔다는 스님, 그러나 화두가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스님의 눈은 예사롭지 않다. 한평생을 오직 화두참구 하나로 살아온 수행자의 빛이 역력하다.
“요즘 매스컴에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비유해 ‘화두’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화두는 참선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공안 말씀 주는 것을 화두라고 하는데 일반인들이 쉽게 말하는 화두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또 화두는 ‘탄다’, ‘태워준다’라는 말을 씁니다. 속가의 자식에게 재산을 태워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똑같은 자식이더라도 재산을 지닐 자식이 있고, 금방 떨어 먹을 자식이 있습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두를 타파해 부처님 혜명을 이을 사람인가 아닌가를 먼저 간파해 공부 잘 안할 놈에게는 화두를 잘 일러주지 않는 법입니다. 옛날 성철 스님에게 화두 한번 타려면 삼천 배를 해야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화두는 소중히 일러줘야지 떡 주듯이 쉽게 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과거 스님들은 화두를 일러줘서 그날 저녁에 타파하지 못하면 바로 쫓겨났습니다. 그만큼 무섭게 했지요. 만일 그날 저녁에 타파 못하면 3일, 또 3일 만에 못하면 1주일, 그 1주일 만에 해결 못하면 벌써 별 볼일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밥충이지요. 밥이나 먹고 세월이나 보내는 것이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부터도 밥벌레 노릇하고 있는 것이지요.” 화두를 타고, 타파하기 위한 옛 스님들의 수행 열기가 엿보인다.
| ||||
혜운 스님은 어떤 화두를 탔을까? 스님은 부산 선암사에서 큰 스님(향곡)이 너무 무서워서 몇 번을 망설인 끝에 화두를 탔다고 회고했다.
“옛날 중국 총림에는 황벽 스님이 3천명의 대중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황벽 스님 버금가는 목주 스님도 있었고, 또한 유달리 공부하려고 애쓰는 임제 스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목주 스님이 임제 스님을 찾아가 가사장삼을 수한 뒤 황벽 스님을 찾아가 ‘어떤 것이 불법의 똑바른(寂寂) 큰 뜻입니까?’라고 질문할 것을 권했습니다. 다음날 임제 스님은 목주 스님이 일러준 대로 가사장삼을 수하고 황벽 스님을 찾아가 ‘어떤 것이 불법적적대의입니까’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황벽 스님은 주장자로 마구 내리쳤습니다. 임제 스님은 꼼짝없이 두들겨 맞은 채 쫓겨났습니다.
| ||||
이 때 목주 스님은 다시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을 찾아갈 것을 권했습니다. 목주 스님의 말을 들은 임제 스님은 이렇게 3일을 황벽 스님으로부터 얻어맞고 쫓겨났습니다. 그리고는 황벽 스님을 떠나 대우 스님을 찾아갔지요. 대우 스님을 찾은 임제 스님은 ‘불법적적대의를 묻는데 무슨 허물이 있다고 방망이를 드는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우 스님은 ‘황벽 스님이 전심전력을 다해 불법적적대의를 일러줬는데 무슨 허물을 찾느냐고 말했습니다. 순간 임제 스님은 바로 깨우쳤다고 합니다.”
향곡 스님으로부터 “‘불법적적대의(佛法寂寂大意)’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탔다는 스님은 황벽스님 회상 이야기를 통해 스님들이 얼마나 순진하고 열심히 공부했던가를 강조했다.
그럼 스님의 공부는 어땠을까? 향곡 스님은 스님에게 어찌 일러주셨을까? 궁금했다.
| ||||
“향곡 스님은 수시로 공부가 어떠한가를 물었습니다. 또, 더러는 ‘나도 알았다’ 해서 스님을 찾아가 대질을 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스님은 그 때마다 ‘공부 진실하게 해라’. ‘나중에 알면 찾아오너라.’며 화두를 다시 일러주곤 했지요. 법을 설하거나 설명을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참선 얘기는 하면 할 수록 그르치는 것입니다. 한 번 화두를 타면 이렇게 하면 되나 저렇게 하면 되나 따지지 말고 그 자리에서 진실하게 할 따름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진실하게 공부하는 것입니까?”
“말 잘한다고, 오래 앉아있다고 도인인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자기를 알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누가 나인가?’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불법적적대의’를 묻는데 방망이로 때린 것을 알면 진실하게 한 것입니다.” 스님은 명확히 답을 했지만 어렵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기자를 위해 스님은 다시 친절을 베풀었다.
| ||||
“이 법은 대신심과 대의심, 대용맹심으로 공부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옛날 선사들이 위태로움과 득실을 돌아보지 않고 천리 만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선지식을 찾아가 친견을 하고 법의 문으로 들어가 일대사를 해결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 이 공부는 티끌처럼 미세한 것이라도 걸리는 곳이 있으면 다 틀려 버립니다.
‘공부를 해서 해결한다’는 자세로 그 길만을 밟아 가야 되는 것이지요. 금생에, 이 몸뚱이 있을때 해결할 마음을 가져야 하는것입니다. 모름지기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공부해야 하며, 감옥에 갇혀 고초를 받는 사람이 풀려 나기를 바라는것과 같이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향곡 스님의 가르침이고 역대조사님들의 가르침입니다.”
많은 큰스님들을 모시고 살았다는 혜운 스님은 “요즘은 사회적으로도 인물이 없고, 절집안에도 인물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특히 조실 없는 선방이 많다는 것은 큰일이라고 걱정했다. 스님은 조실 스님에게 일일이 지도받으며 참선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익이 별로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또 문중을 가려 조실을 모시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공부 많이 하려고 애쓰는 스님도 있지만 진실하게 안하니까 안 되는 것”이라며 진실한 수행을 강조했다. 또 재가불자들에게는 “자기완성한 사람이라야 온전한 불자가 되는 것”이라며 수행정진을 꾸준히 이어갈 것을 당부했다. 특히 화두를 타지 못한 재가불자들에게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반복해 수행의 밑거름으로 삼을 것을 권하고 있다. 다라니는 외우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된다며 부처님께서 이른 비밀 주문이기 때문이라는 것.
여인불경심상정 위공무사몽역한(與人不競心常靜 爲公無事夢亦閑)
“사람과 더불 경쟁하지 않으니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공적인 일을 위해서는 사사로움이 없으니 꿈에도 한가롭다”는 말을 지표로 삼고 있는 스님은 불교의 발전과 정직한 사회, 질서 있는 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비췄다.
| ||||
▲혜운 스님은?
대구시 달서구 송현동 한적한 주택가, 수십년의 수행이력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을주민과 어울려 살고 있는 자그마한 체구 인자한 얼굴의 노스님이 여여선원장 혜운 스님이다.
스님은 1931년 충남 대전에서 출생. 16세의 나이로 동학사에서 대강백 무불 스님 밑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7세에 해인사 향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했고, 1950년 하동산 스님을 계사로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부산 선암사에서 원주 소임을 맡아보며 당대 최고의 선지식 향곡 스님을 은사로 모셨던 스님은 상원사에서 수선 안거 후 하나뿐인 자식을 수행자로 떠나 보낸 채 23세부터 수절해온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1961년부터 20년간 염불암 주지 소임을 살았다. 이후 스님의 어머니는 발심 출가해 스님과함께 수행자의 길을 함께 걸었고, 스님은 1981년 여여선원을 창건해 지금까지 수행정진하고 있다.
한국 당대 최고의 선지식 향곡 스님의 직계상좌인 스님은 향곡문도회 대표로 향곡스님열반 20주기를 기념해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운봉향곡선사의 법어집을 재판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또, 청소년포교에도 많은 관심을 쏟은 스님은 청소년교화연합회 대구경북지부장을 역임했고, 대구사원주지연합회 부회장 소임을 오랫동안 맡았다.
60세 이후 모든 공적인 일을 내려놓았지만 스님은 매일 새벽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몸을 깨끗이 하고 예불을 모시며 수행자의 바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75세의 세수에도 도량청소며 궂은 일을 직접 행하는 스님은 화두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하는 것이라며 소중히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