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영화는 그 모두 봄날의 꿈이요.
모이고 흩어짐과 살고 죽음은 물위의 거품이다.
극락세계에 노니는 마음 그것 하나 말고는
생각하면 추구할 일 한가지인들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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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성철·자운·보문·우봉·청담·향곡·월산·종수·보경·혜암 스님등 20여 명의 스님들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원력을 세우고 수행에 진력했던 봉암사 결사(結社)에 동참했던 스님은 현재도 밝은 선지(禪旨)로 사부대중에게 참된 진리의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스님의 좁은 방에 들어서니 달마 그림이 즐비하다. 스님은 대뜸 붓을 들더니 달마도를 그렸다. 스님의 달마도는 유난히 자비롭다. 웃음을 머금고 있는 원만한 모습의 달마이다.
“요즘 사람들이 그리는 달마 그림을 보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달마도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 선사는 성스러운 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림은 소림굴에서 9년 수행한 달마선사가 추우니까 거적을 덮어쓰고 날이 밝으니 삐끔하게 쳐다보는 모습입니다.”
스님은 인도 남천축국 왕자였던 달마가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와 민중들과 친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을 닮아간 속뜻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달마가 왜 동쪽으로 왔을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스님께 여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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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알을 품어 온기가 단절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이 하고 간절히 화두를 들되 ‘이뭣고’가 의심이 잘 안나면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입으로 ‘이 뭣고’ 소리를 내어서 의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뭣고’같은 화두는 원래 인도에서는 없던 용어입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도 아니요, 가르친 바도 없습니다.
인도에 없는 언구술어가 중국에 전래되면서부터 1700공안(公案)이란 화두를 처음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선종의 임제종에서 간화선으로 화두를 사용하지만 조동종에서는 묵조선으로 화두를 의심치 않는 묵조좌선(默照坐禪)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화두는 무엇입니까. 육조 스님께서 상당법문(上堂法門)을 하려고 하는데, 남악회양 선사가 대중보다 늦게 들어왔습니다. 육조 스님이 ‘이 무슨 물건이 들어오는고?’하니 남악 스님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끙끙대다가 8년이 지나고서야 ‘설사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남악 스님이 8년이 지나는 동안 ‘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고?’ ‘이 뭣고?’ 이 대목이 화두의 시작입니다. 어떤 수좌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뜰 앞의 잣나무니라’한 이 뜻을 알면 화두가 필요 없지만 모르면 화두를 참구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지어 나가되 그 하는 모양이 흡사 닭이 알을 품어 온기가 단절이 되지 않아야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한 눈 팔지 않고 꼼짝하지 않고 응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요즘 자기가 확철대오(確徹大悟)하였다고 생각하는 스님들이 많은 것 같다는 스님은 “전국에 있는 선지식에게 인가를 받아 확철대오한 줄만 알고 지내다가 우연히 질병에 걸려 앓다보면 공부하였던 도력은 하나도 없고 아픈마음 뿐이요. 알음알이는 다 어디로 가고 남은 것은 수척한 몸에다 아픔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선의 궁극을 생사초탈에 두어야 확철대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대오(大悟, 큰깨달음)가 18번이요, 소오(小悟, 작은 깨달음)는 부지기수라는 대혜 스님 신상담을 얘기했다.
“대혜 종고(大慧宗 ) 선사는 워낙 지혜가 출중하시고 기봉(機峰)이 남달리 예민하시어 늦게 만난 원오 스님과의 법담과 문답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잘 응하였습니다. 하지만 원오 스님은 종고 스님을 인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대혜 스님은 원오 스님을 원망하고 지냈습니다. 대혜 스님은 자기의 깨침에 더 이상 깨칠 것이 없는데도 원오 스님이 인가를 해주시지 아니하니 기가 찰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원오 스님께서 대혜 스님을 불러놓고 ‘자네는 부처의 경계는 들어갔지만 마(魔)의 경계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공부를 더 하여야겠네.’ 하고 인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대혜 스님은 ‘저는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더 무슨 공부를 합니까?’하니 원오 스님이 ‘무의언구 시대병(無疑言句 是大病,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대혜 스님은 자기는 확철대오하여 더 이상은 할 공부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 대 선지식이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니 그 말씀을 듣고 ‘천하 선지식이 다 속였지만 오직 스님만이 저를 속이지 아니하였으니 제가 다시 살아남으면 스님 법에서 맹세코 다시 공부하겠습니다.’하고 다시 화두를 의심하여 생사대사를 해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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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부좌를 단정히 하고 앉아 두 손을 겹쳐서 왼쪽 손은 위로가고 오른쪽 손은 그 손바닥 아래에 포개놓고 엄지손가락을 마주 대하여 꽉 쥐고 생각은 배꼽 밑 단전에 둔다는 생각으로 합니다. 그런 다음 배꼽 밑에 둔 단전에서 호흡하도록 하면서 서서히 화두를 속마음으로 생각하고 자꾸 의심해 나가면 몸과 마음이 편해지면서 기분이 좋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이 경계가 선의 경계가 아닌가.’ 하고 딴 생각을 내지 말고 화두를 들어 생각하고 의심을 지어가야만 공부가 되니 깨닫기 전에는 딴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두가 안 잡힌다고 억지로 무리하게 해서는 상기병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온전히 단전에서 호흡하고 의심을 지어 나가면 상기병이나 소화불량등 일체병은 근접할 수 없습니다. 설사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더라도 장차 깨칠 인연을 지어놓았으니 언젠가는 확철대오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선수행 할 때는 취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화두드는 생각과 마음을 취미에 빼앗기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리고 참선을 하지 않을 때는 묵언(默言)으로 돌아가 선시(禪詩)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스님은 생업에 종사하는 불자들을 위해 참선만이 깨달음의 길이 아님을 얘기했다. 스님은 불자들의 근기에 따라 참선과 염불을 병행하는 것이 오히려 괜찮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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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시간이 없거나 직장에 다니는 불자들은 염불선을 하라고 권했다. 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나무아미타불 염하는 이 놈은 뭔가’라는 화두를 타파하라고 했다.
“나무아미타불이 깨닫기 전 법장 비구로 48원을 세워 누구나 나의 이름을 부르거나 생각하여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발원하면 기필코 극락정토에 간다고 하였으니 미타정토삼부경을 부지런히 독송하시기 바랍니다. 원효 대사께서는 일체유심을 깨치시고도 화엄종, 해동종을 개종(開宗)하시면서 구경 회향은 서방 극락세계로 돌리고, 서민 대중들도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태어난다고 방방곡곡에 다니시면서 권고하셨습니다. 화엄종의 의상대사께서도 부석사 무량수전을 짓고 법당 정면에 무량수불을 모시지 아니하고 서방에 모시어 자연스레 서쪽 아미타불님께 예배하셨다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간화선이 한국불교의 전부인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불법 수행의 목적과 의식이 아미타불 극락정토(阿彌陀佛極樂淨土)로 구경 회향하는 염불 수행이었습니다. 꼭 간화선이 염불수행보다 수승한 것은 아닙니다. 또 선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닙니다. 자신의 주어진 환경에 따라 참선과 염불을 병행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도우 스님은
봉암사 결사 참여…한평생 생식·묵언 생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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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또 서예 분야에서 이름 높은 맥문(麥門) 홍경 스님(1899~1971)으로부터 춤을 추듯 유연한 하소기(何紹基, 중국 청나라 서예가) 서체도 전수하고 있다.
도우 스님은 1922년 경북 문경 동로면에서 출생했다. 스님은 13세인 1934년 경북 상주 남장사에서 제응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40년 문경 김룡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했으며, 42년 직지사 천불선원 초안거 이후 44년부터 문경 봉암사, 묘향산 대승사, 고성 문수암, 창원 성주사, 해인사 퇴설당 등에서 청담·성철스님 등과 안거에 들었다. 48년 문경 봉암사 결제에 참여하여 <공주규약 제정>을 통한 한국불교를 새롭게 정립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스님은 52년 문경 봉암사 주지를 시작으로 선산 도리사 주지, 영주 부석사 주지, 제 16교구 본사 고운사 주지와 조계종 정화대표자회의 비구측 비상종회의원, 감찰원 감찰원장을 역임했다. 62년 청담 스님을 법사로 건당한 스님은 현재 삼각산 도선사에 주석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즉시불> <사바가 정토요 정토가 사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