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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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강이 되어 만물과 함께 흘러가자"
지상백고좌-화산스님(대구 보광원 조실)


5월 말, 꼭 3년 만에 화산 스님을 다시 뵈었다. 예전의 정정하신 모습 그대로다. 자기를 바로 보라는 그때의 스님 말씀을 이날 스
화산 스님.
님을 만나기 전 자료를 보고 다시 더듬어보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무엇을 여쭐까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넓게 쓰면 한없이 넓어지고, 좁게 쓰면 바늘구멍보다도 더 좁아진다. 이걸 알고 있는데도 살면서 바늘구멍처럼 마음이 좁아질 때가 있다. 그러다가 곧 후회하곤 하지만,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다보니 도무지 내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으로 여쭈었다. ‘마음’은 어떻게 쓰는 것인지.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존자하고 부처님하고 대화한 것이 있어요.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자식과 같이 잘 다듬어서 깨치게 하고 잘 보살펴 준다고 하셨는데 그러하옵니까”하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그렇다”고 하셨어요. 다시 수보
화산 스님.
리존자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 거기에 의존해서 사는데 어떤 것이 참마음인지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말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핵심인데 그것을 모르고 사는 게 중생이요, 그러니 핵심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든 생활이 그대로 마음인데, 그 마음 말고 자구 별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마음이 곧 이 마음이고 둘이 아니며, 모든 중생이 다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모든 법 가운데 근본이요, 일체 모든 기묘하고 미묘한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크다고 해도 큰 것이 아니요 작다고 해도 작은 것이 아닙니다.

불교공부를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얘깁니다. 그런데 그런 줄 알면서도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백 가지 꾀를 내고 천 가지 방편을 써서 이 몸뚱이 위해서 살지만 이 몸뚱이라는 것이 헛것 가운데도 가장 헛것이요, 하잘 것 없는 것 가운데서도 가장 하잘 것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자성이 충만해 우주에 이지러지지 아니하고 시방에 두루하는 법식을 알면 그 이치를 알 것입니다.

화산 스님.
마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자기의 본성을 찾은 핵심입니다. <금강경>에 사상(四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상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말하는데 이 네 가지 상에 빠지면 자기를 바로 볼 수가 없어요. 아상은 거짓된 나를 보고 진실된 나로 착각하는 것이요, 인상은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중생상은 자기를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수자상은 일체 모든 것을 시비분별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공부하고 불법을 안다면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는 것이니, 그 상이 없는 사람이 바로 보살입니다. 그러니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다 없애는 것이 진여인 즉 참사람이라는 얘깁니다. 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할까요? 하심을 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참사람이 되려면 하심을 해야 합니다.

스님 말씀이 끝나자마자 평소 품고 있었던 의문을 여쭈었다. “그러면 하심하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화산 스님.
그러자 스님께서는 “그렇지 그게 어렵지” 하시며 웃으신다.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표정이었다. 스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기자님도 주위 사람이죠.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내외간도 있고, 친구도 있으시겠지. 그 사람이 모두 주위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주위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내 주위사람을 항상 편안하게 즐겁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하심입니다. 하심은 별 게 아닙니다. 하심을 해야 내가 편안해요. 내가 편하려면 하심부터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기자님이 친한 친구와 다투었어요. 그러고 돌아서면 마음이 편치 않지요? 서로가 이해했더라면 편안했을 텐데 말이오. 내가 제일인 것처럼 떠들다보면 내 가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아상인데, 아상을 버리려면 하심을 해야 합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배우는데도 마음을 비워야 옳은 것이 남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아는 게 아니에요. 마음을 비우는 것이 곧 하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런 것처럼 한편으로는 일체 모든 중생을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체 모든 중생을 부모같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옷깃을 단정히 해 보세요. 예의라고 생각하지 말고 평상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친구를 위하고 남을 위해 도움을 줄 때도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도 충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참 충성이에요.
이 세상 살고 가면서 이름 없이 살고 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름이나 명예를 남기려는 것이 상이지. 이것이 없는 것이 하심이에요. 하심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닙니다. 하물며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하심하고 또 하심해야 합니다. 먼저 고개 숙이고, 먼저 인사하고 이것이 하심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지극한 도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별 게 아니면서도 하심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기자님은 자기 존재를 사물에 비유한다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는 계곡에 흘러가는 물이다, 강물과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강물은 어떤 것입니까. 위에서 나뭇잎이 떠내려 오든, 돌이 굴러오든 자꾸 씻겨서 내려 보내지요. 그래서 강은 맑은 것입니다. 나는 강물이다, 나는 강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심입니다.
넝쿨을 본 적이 있지요? 또랑을 사이에 두고 넝쿨 두 개가 있는데 이쪽 넝쿨은 저쪽 넝쿨을 감아주고, 저쪽 넝쿨은 이쪽 넝쿨을 감아주지요. 네 좋을 대로 감아라 하고 서로 거부하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무가애(無?碍) 무가애 입니다.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 무가애 무가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에는 서로 얽혀서 네 것 내 것이 없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넝쿨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얼마나 즐겁습니까. 대자연의 이치는 이렇게 위대하지요. 우리도 아옹다옹하지 말고 서로 돕고 편하게 해주면서 하나로 얽혀지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서로가 즐겁고, 이것이 바로 하심이에요.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수순(隨順)하셨습니다. 중생의 뜻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수순할 수 있습니까. 각기 다른 그 마음을 다 따라줄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언제나 따라주셨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53선지식이 나오는데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났어요. 그리고는 물었어요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냐” 이렇게 말이죠. 그랬더니 보현보살이 “나는 열 가지 원이 있어 모든 부처님을 수순해서 다 받들고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선재동자가 “그러면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까”하고 다시 물었어요. 보현보살은 답은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끝이 없는 것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보현보살의 말대로 끝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이 될 때까지 예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심이에요. 하심하는 것이 보살정신의 첫째 조건이요 수행자 정신입니다. 일체중생이 다 성불할 때까지 하심을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심에 어디 끝이 있겠습니까.

화산 스님.
그러면 아까 물었던 대로 하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냐. 불교는 마음 닦는 공부입니다. 수순중생(隨順衆生)이라, 쉬운 말로 주위사람을 편안케 해주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쉽습니까. 집안 어른을 그렇게 모시기 어렵지. 내 마음에 안 맞으면 화도 내고 하는데 그 고비를 넘기기가 참 어려워요. 그럴 때 참선을 해보세요. 참선은 불교의 최고 수행법입니다. 염불도 하고 경전도 읽고 그렇게 해 보세요.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이 편해지면 남을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선은 또 어디 쉬운가요. 그러면 이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마음을 어떻게 잡습니까. 염불을 해도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고, 경을 봐도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고 참 뜻대로 잘 안되지요. 그러면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주위사람 편하게 하는 것하고 공부하는 것하고 어떤 게 쉬울까요. 참선하고 염불하고 경전 보는 것이 더 쉽겠지요. 주위사람 즐겁고 편안케 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게 다 이렇게 어려워요. 주위사람 즐겁고 편하게 하면 참선도 잘되고 염불도 잘 되고 그래요. 그러니까 스스로 강이 되고 계곡이 돼야 합니다. 강은 무엇이든 떨어진 그대로 떠내려 보내주죠. 공부할 때 이렇게 해야 합니다. 넝쿨처럼 가만히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화산 스님은 나무를 무척 좋아하신다. 강물처럼 살라는 스님의 말씀이 나무와도 무관치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를 여쭈었다.

나무, 좋아하지. 생각해보면 나무처럼 늘 그 자리에서 초심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곤 해요. 모든 것은 다 자기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설 자리가 있어요. 일체 사물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본성을 지켜가며 사는 것이 중요해요. 앉을 자리 설 자리 구분하며 도리대로 사는 게 얼마나 큰일이고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자기 도리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세상에 걸릴 게 없겠지요.

스님은 세상을 사는 가장 필요한 지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가 다르겠지요. 세간에서는 학문을 닦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또는 돈을 많이 벌고 그런 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출세간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어요. 잘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죽어도 죽는 게 없고 살아도 사는데 걸리지 않고 사는 것이 참지혜입니다. 그런 지혜를 얻으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잠깐 왔다 가는 것이니 열심히 공부해야죠.


화산 스님은?

화산 스님.
선(禪)과 교(敎)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 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불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런 소신은 화산 스님의 이력에서도 잘 드러난다. 화산 스님은 1919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7살에 통도사 자장암에서 몽초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한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그 후 일본 임제선문학교와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하는 등 불교와 철학을 폭넓게 공부했다. 그리고 통도사 강주를 맡아 후학을 지도했으며, 1962년에 대구에 보광원을 창건하고 현재까지 이곳에서 불자들을 대상으로 참선지도를 해오고 있다.
소탈하고 부지런한데다 친근한 성격이어서 많아 불자들이 많이 따른다. 대구에서만 40년 넘게 불자들을 지도해오면서 지역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고 있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법문으로도 유명해 전국 곳곳에서 법문을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후학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문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평상시 나무와 꽃을 좋아해 추운 겨울이면 아랫목을 화분에게 내 줄 정도로 인정이 많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은 오전 시간에 참선을 하고 오후에는 불자들을 지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글ㆍ한명우/사진ㆍ박재완 기자 |
2005-06-04 오전 11:13:00
 
한마디
큰스님을 뵈오니, 눈물이 나려합니다.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데, 보광원을 검색했다가 큰스님을 뵈오니 반갑고 기쁘기 한량이 없습니다. 늘 하시는 말씀, 주위 사람을 편하게 하라그러시고, 강과 같이 흐르는데로 살으라고 하셨지요. 큰스님 항상 건강하시길 합장합니다.
(2005-09-23 오후 7: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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