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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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노구에도 새벽 2시부터 쉼없는 정진ㆍ울력
지상백고좌-조계종 원로의원 활안 스님(송광사 천자암 조실)

조계산 천자암을 찾은 날이 말복이었다. 이날, 뙤약볕 아래 산길을 오르는 것 자체가 그대로 수행이었다. 사실, 떠날 때부터 수행
활안 스님.
자 심정이었다. 며칠전 천자암을 찾았다가 법문은커녕 사진 한 컷도 건져오지 못하고 쫓겨난 터였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게 하지마, 입만 아파”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란 말이야.”
분명 세속의 노인네 심술은 아닌 듯 싶었다. 무슨 뜻이 있으련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50년 넘게 목숨 걸고 정진한 큰스님과 어설픈 재가불자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어색했다. 더구나 서쪽을 향한 스님방은 한여름 오후가 되면서 가마솥마냥 찌는 듯했다.

마침 공양주보살이 찐 감자를 내놓자 스님이 유독 노란 감자를 들고서 한마디 했다.

“내가 감자밭에서 변을 봤는데 이것이 그 자리에서 나온 것이여. 맛이 기막히게 좋지. 자네도 감자나 먹고 어여 내려가.”
말 그대로 ‘감자’먹고 말았다. 법당옆 쌍향수 아래의 수각에 있는 냉수로 끓는 속을 식혀야만 했다.

천자암 조실 활안 스님.
이번엔 아이들을 동행시켰다. 더위에 지쳐 움직이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교과서에 나오는 나무(쌍향수·천연기념물 88호)도 보고 큰스님도 친견하자”고 꼬드겼다.

아이들 동행작전은 성공했다. 도인이 도인을 알아보듯, 동안(童顔)의 큰스님과 아직 때가 덜 묻은 아이들과의 대화는 술술 이어졌다.

“아야, 아가야, 너 나이를 바로 먹었냐. 거꾸로 먹었냐. 아니면 옆으로 먹었냐.”
“잘 모르겠어요.”
“그냥 먹었다고 해라.” “아가야, 너 잘 생겼냐 못 생겼냐.”
“그냥 생겼어요.”
“그러지말고 돈을 많이 가지고 있게 생겼습니다. 그래라.” “야야, 너그 아버지는 어디가서 거짓말해서 너희들 먹여 살린다냐.”
“…”
“마음이 밝지 못하면 세상이 다 거짓말입니다. 그래라.” “야야, 너는 무슨 새냐, 말 잘하는 앵무새냐.”
“…”
“사람입니다. 그래라.”

막둥이와 한참 선문답(?)을 나누는데 이상하게도 스님이 묻고 대답까지 가르켜 준다.
이쯤해서 조심스레 스님께 한 말씀 청했다.

“내가 보물을 하나 일러주지. 어느 것이 보물이냐 하면 밝은 것이 보물이야. 어떻게 밝은 것이냐 하면 근거가 없이, 상대가 없이 단번에 밝은 것이 보물이거든. 말 그대로 단번에 밝는다면 대동태허에 마음이 주인이 되지.

우주의 주인인 마음이 바르게 서 있으면 단박에 밝아질 때 판단력이 생겨나는거야. 판단력이란 쉽게 말하면, 거울을 볼 때 ‘내가 거울 앞에 선다’고 말하지 않아도 거울 앞에 서면 그대로 보여지듯 생겨나는거야. 이 보물을 찾아야 해.

그런데 이것이 쉽게 찾아질 것 같아도 그렇지 않아.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한눈 팔지 말고 노력해야해. 그러다보면 단박에 밝아지는 날이 와.”

활안 스님.
활안(活眼) 스님은 1926년 담양에서 태어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려서 병을 얻어 큰 고생을 했다. ‘죄없이 병으로 고통받는 육체’에 대한 의문을 안고 1946년 월정사로 출가했다. 이후 상원사 칠불암 범어사 용화사 등 제방선원에서 40안거를 성만했다. ‘나고죽는 이전의 나는 무엇인가(生滅未生前 是甚麻)’를 화두로 정진하던중 광양 백운산에서 오도송을 읊었다.

通玄一喝萬機伏 / 言前大機傳法輪 / 法界長月一掌明 / 萬古光明長不滅
통현의 할에 온갖 번뇌망상 굴복하니 / 말 이전에 한소식이 법륜을 전하도다 / 삼라만상 한 손바닥에 밝았으니 / 이 도리는 만고에 다함이 없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 마냥 천자암에도 울력은 생활 자체이다. 암자에 딸린 채마밭은 물론 차밭과 감자밭에서 대중들은 잠시도 쉬지 못한다. 활안 스님은 마치 조계산 호랑이와 같다. 일을 할 때도 용맹정진하듯 밀어붙여 보통사람의 2~3배를 한다.

며칠전 감자밭에서 크기에 따라 감자를 골라 담는 대중들에게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루해가 다 가는데 빨리 주워 담지 않고 일일이 세고 있느냐.”

대중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해떨어지기 전에 일을 마쳤다. 다음날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대중 가운데 활안 스님만 그 소식을 알았던 것이다.

천자암을 나설 때쯤 되자 다시금 스님이 아이들에게 인사말 삼아 한마디 건넨다.

“부처님을 존경하면 너희들도 부처님을 닮아 가게 된단다. 이것이 생활 속에서 하는 공부야. 학교에서 하는 공부가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우듯이, 부처님을 존경하고 따르면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이 자기한테 오기마련이야. 그렇게 공부해라.”


고옹 스님이 들려준 사형 활안 스님


활안 스님.
“50년전, 오대산 상원사와 북대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성불’을 위해 기도와 수행으로 초지일관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때 스님의 구도열을 지켜보면서 저뿐 아니라 함께 정진하던 도반들이 흩어져가던 공부를 바로잡곤 했습니다.”

이번 하안거를 천자암에서 나고 있는 고옹 스님은 “활안 스님과의 첫 만남에서 흩트러짐없는 수행력에 감복해 사형으로 모시게 됐다”고 회고하고 “큰스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수행에 있어 한치도 변함없다”고 말했다.

고옹 스님은 “큰스님은 승속을 떠나 게으른 것은 용납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쫓아낸다”며 “천자암 생활은 한마디로 정진과 울력의 연속으로 그대로가 수행이다”고 소개했다.

고옹 스님의 설명대로 활안 스님의 정진은 세간에까지 유명하다. 세수 80이 가까운 노구에도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도량석을 손수 돌고 예불목탁까지 직접 잡는다. 새벽예불에는 만생명을 위한 축원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땅의 유주무주 영가와 징용, 만리장성, 세계대전 희생자,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은 물론 미국 9.11희생영가 등등, 시공을 떠나 이들 영가를 위해 매일 천도재를 올리는 것이다.

특히 정초와 백중 때는 일주일간 하루 17시간씩 사분정진을 한다. 그것도 꼿꼿이 서서 목탁을 치며 하는 기도여서 함께 시작했던 젊은 스님들도 버텨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곤 한다.
“어느 정도 어른이 되면 문을 닫는 것이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큰스님은 아무나 부담없이 친견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계십니다. 이것이 자비심 철철 넘치는 큰스님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글·사진=이준엽 기자 |
2005-06-02 오후 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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