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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세계일화의 꽃 한 송이가 성성한 수행력을 간직한 채 안면도에 피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효봉 성철 벽초 인곡 용음 해산 삼공 등 큰스님들과 함께 만공 선사를 모시고 정진했던 한 노스님을 만나기 위해 충남 태안 안면도를 찾았다.
송림사 동산 스님(92). 스님은 만공 스님의 애제자인 보월 스님의 법맥을 이은 분이다. 만공에서 보월로 내려온 법맥은 동산 스님과 금오 스님에게 이어졌다. 보월 스님이 요절하자 만공 스님은 대신 동산 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이를 보전케 했다.
삼배를 마치고 앉아 동산 스님께 “이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파 왔다”고 여쭈었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은 한참 염주만 굴리다가 마침내 말문을 여셨다.
“만공 노스님은 여름 겨울 살림을 시작할 때마다 법문을 하셨지. 그때마다 하신 말씀이 무어냐면 바로 ‘진언(眞言)은 불출구(不出口)’라는 것이야. 참된 말은 입밖에 내지 않는다는 뜻이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평생토록 수행 정진한 스님의 깨달음을 한번에 이해하려는 게 얼마나 큰 욕심인지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말을 내는 순간 그르친다는 스님의 답변에 순간 무엇을 더 물어야할지 깜깜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번 더 욕심을 내어 스님께 그 뜻을 캐물었다.
“요새 사람들은 왜라고 묻고 따지길 좋아해. 그런데 불교는 왜라고 묻는 게 아니야. 만공 노스님은 이 말만 가르쳤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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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몸을 쓰지 않고 괴로움만 면해 보려는 게으른 불자를 경책하는 말씀일 게다. 그래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동산 스님의 수행 여정을 조금이라도 엿보기 위해 출가 동기를 물었다.
“출가 이유는 별게 없어.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하고 절에 다녔어. 불교가 좋고 부처님이 좋았던 거지. 그래서 신심을 부처님께 무조건 바쳤어.” ‘무조건’이란 스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믿는다면 무조건 믿을 것이지 어찌 이유를 따지랴!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동산 스님은 마곡사 토굴에 수행하던 보암 노스님 밑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스님은 15살에 정혜사 서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사미계는 정혜사에서 만공 스님을 계사로 같은 해에 수지했고, 비구계는 서울 선학원에서 일봉 스님을 은사로 수지했다.
스님의 수행이 궁금해 어떤 화두를 타파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스님은 “모두 잊어버려 화두가 뭔지 모른다”며 게송을 따로 짓지도 않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만공 스님을 모시고 살던 정혜사 선방이 어떠했는지 묻기로 했다.
“정혜사 선방 분위기는 어떻다고 말할 게 없어. 이건 옳다, 저건 그르다 이야기할 게 없었어. 그 때는 대중 모두가 원만히 화합하고 정진할 따름이었지.”
‘원만히 화합하고 정진했다’는 몇 마디 말씀에서 간절했을 당시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만공 노스님도 마찬가지였어. 물론 조실 스님이니 모범적으로 정진을 했지만 어떻게 했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앉아서 졸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곡차를 잡수기도 하고, 그냥 왔다 갔다 했어. 그런 얘기 뭐 할 거 있겠어. 밥 먹고 차마시고 세수하는 것이 다 똑같을 뿐이야. 우리는 그냥 스님의 행동거지를 보고 배우는 거야.”
스님은 오로지 화두타파에만 몰두하는 수행자의 모습이 이랬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불자들의 편견에 ‘할’과 ‘방’을 내리는 것 같았다. 알음알이에만 집착하는 우매한 중생이 헤매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듯, 스님은 문득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셨다.
“밤이면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잔다는 말이야. 아침이면 또 부처님과 같이 일어나 앉아. 마음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그 말하는 이것이 바로 그거야. 이걸 깨쳐야 하는 거야. 이야기 다 했어. 너무 많이 했네.”
스님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급한 마음에 스님이 입적하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걸 알 수 있나? 나도 몰라.” 또 다시 침묵. “그럼 스님, 그 모르는 곳이 어딥니까?” “이것이지.” 스님은 염주를 쥔 손을 힘차게 내어 보였다. 스님은 다시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몸과 마음으로 느끼라는 무언의 법문을 해 주시는 게다.
“예전에 일제가 총본산을 만들어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합방시키려고 했지. 그 당시 마곡사 주지였던 만공 스님도 총독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어. 그런데 한 스님이 ‘데라우치 총독이 스님들을 천민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고 불교를 잘 되게 해줬으니, 우리는 스님 노릇 잘해 총독의 은혜를 갚자’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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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만공 스님은 동산 스님에게 그만큼 호방한 호남아였다.
스님의 이야기는 독립 운동을 하던 만해 스님을 걱정한 일화로 옮겨갔다. “스님은 만해 스님에게 ‘곰은 몽둥이를 휘두르지만 사자는 사자후를 한다’는 말로 경책을 했지. 선학원 조실이던 만해 스님은 당시 한참 일본을 비난하는 글을 불교 잡지를 통해 발표했어.” 거침없는 행동 때문에 혹시나 만해 스님이 잘못될까 걱정했다는 것이다.
후학을 사랑하는 만공 스님의 자상한 마음을 느끼며 젊은 불자들이 어떻게 수행을 하면 되는지 물어보았다. 역시 선승답게 동산 스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오직 ‘식업양신(息業養神)’을 하도록 노력해.”
식업양신을 어떻게 하는지 다시 물어보았다.
“만공 노스님께서 보통 법문을 하시면 꼭 이 말을 잊지 않았어. 업을 쉬고 정신을 기른다는 말이지. 정신을 기르고 악한 죄업을 다 쉬고 소멸해 버려야 해. 화두 염불 기도의 근본이 식업양신이고, 식업양신이 곧 화두야. 참선하는 스님들의 공부법도 식업양신이야. 요새 젊은 사람들이 늙은이 말 안 들어도 식업양신만은 잘 해야 해.”
스님 친견을 마치고 처소를 나서자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노스님은 젊은 손님을 꼭 배웅하겠다며 기어코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간곡한 만류에 문밖을 나서는 것은 포기하셨지만 젊은이들이 감기 걸릴 것을 걱정하셨는지 우산을 들고 가라며 손에 쥐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산 스님이 길 떠나는 객에게 선물로 들려준 시를 음미해 보았다. 만공 스님이 금강산에서 수행하며 지었다는 시다.
신등벽공(身嶝碧空)
족하비로(足下毘盧)
안리대해(眼裏大海)
세안세족(洗眼洗足)
불시고야(不是苦也)
몸이 푸른 하늘을 오르니
발아래가 비로자나이네
눈 안에 동해 큰 바다가 있어
눈을 씻고 발을 씻으니
이것이 고가 아닌가?
# 만공·보월 스님 법맥 이어 평생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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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동산 스님과 수덕사 초대방장인 혜암 스님이 법거량을 한 것은 한참 동안 수덕사를 출입한 수좌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만공 스님 다례제 날 동산 스님은 “화소참불면(花笑慘佛面)이니 의제가 어떠하십니까”라고 묻자, 혜암 스님은 “수불리파 파불리수(水不離波 波不離水)이니, 오늘 다례법문은 동산 스님이 다했다. 시자야, 스님께 포도주 한잔 드려라”고 했다.
동산 스님은 28세에 정혜사 주지 소임을 맡아 대중들의 공부를 도왔다. 그 이후에는 대승사 송광사 심원사 마곡사의 선방과 강원을 돌며 수행을 했으며 경허 스님의 보임처인 천장암에서 30년간 주석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그 덕분인지 기자들이 동산 스님을 만난 바로 직후 수덕사 스님들이 찾아와 스님의 노년을 모시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