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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봄비치고 꽤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다. 모두 잠든 깊은 밤이지만 낮에 먹은 커피 때문인지 잠은 오지 않고 부질없는 생각들로 머리만 복잡하다.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며 번뇌로 괴로울 때면 난 염주를 습관적으로 돌리며 관세음 보살님을 불러본다. 관세음 보살님에게 의지하는 그 마음조차도 여의여야 하지만 “관세음 보살님!”하고 부르는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의 의지가 되는 것이 지금의 나다.
갓 태어난 조카가 심장이 좋지 않아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계속해서 그 명호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항상 나에게 격려해주고 의지가 됐던 언니에게 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언니는 나를 불법으로 이끌어주었던 사람이었다. 또, 지금의 결혼을 지탱해나갈 힘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겁 없이 시작한 결혼이었다. 올해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간다. 내 나이 스물한 살에 낳은 아이다. 애가 애를 낳았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대형사고(!)였다. 출산의 기쁨보다는 육아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커 솔직히 막막하고 두렵기만 했었다. 남편 나이 스물네 살, 내 나이 스물한 살에 위태로워 보이는 한 가정이 탄생한 것이다.
남편을 만나 연애하기 전까지의 내 생활은 비교적 평범한 축에 속했다. 교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고 먹을 것을 못 먹고 지냈다거나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져 상처를 받은 적도 없었다. 어려움도 고생도 몰랐던 나는 당시의 내 상황들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앞으로도 어려움이나 궁핍함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것 같았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은 없을 것 같았고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도 없을 줄 알았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어려서 언니나 부모님의 해주었듯이 누군가가 계속 해주리라 믿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로만 생각했다.
지독한 아집이요 어리석음 그 자체였다. 이렇게 철없고 어리석은 내가 스무 살이라는 어린나이에 결혼하는 간단치 않은 세월을 선택했으니 내가 받아야 했던 절망감과 아픔은 말로는 표현 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겠는가! 모두 내가 선택한 것을.
그러나 당시의 나는 날마다 한숨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깊은 늪에 빠져 나올 수도 없는 현실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 시절, 신혼의 기쁨이나 아이 재롱을 보는 재미는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 꿈, 내 이상, 그리고 젊음이 날 힘들게 했다. 내 가정에 안주하지 못하고 사춘기 때부터 시작된 방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꿈과 젊음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을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 또한 강요만 하는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생각한 삶의 질서나 계획들은 무시당했고, 나라는 존재는 서서히 묻혀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남편도 아이들도 날 낳아준 부모님도, 그 누구도 그때의 나에게는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더구나 나에게 맞는 피임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큰 아이 다음에 아들 둘을 내리 더 낳았다. 졸지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극에 달했다. 남편은 이런 나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나는 세 아이의 엄마노릇은커녕 나 자신조차도 주체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화내고 짜증내는 날이 계속됐다. 때때로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져 내 자신조차 감당이 되질 않았다. 소중하고 예쁘기만 해야 할 아이들도 나에겐 부담스럽게만 느껴졌고 엄마로서 당연한 희생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침이 두려웠고 잠들면 깨어나기가 싫었다. 현실은 암담하게만 느껴졌고 내 마음은 지옥 이었다. 남편 또한 무책임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경제적인 가난까지 겹치면서 나의 절망은 끝없이 계속됐다.
그러던 중 남편은 화를 내고 짜증만 내는 나를 피해 외도를 했고, 난 남편의 외도를 핑계로 가출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막상 가출을 하고보니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두고 온 아이들 생각에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나쁜 엄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지 않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나쁜 엄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지 않고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극으로 치닫던 내 삶에 커다란 돌파구가 되어주었던 계기가 바로 불법과 인연을 맺은 일이었다. 언제부터 불법과 인연을 맺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비구니 스님이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불법과의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생의 난관에 부딪치기 전까지는 형식적으로 절에만 다녔을 뿐 진정한 불법의 의미를 알려고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런 나를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언니가 더 이상 안 되겠던지 무작정 한 명상센터에 데려다 주며 한 달만 살다가 나오라고 했다.
언니는 강조했다. “한 달 동안 명상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자. 진짜 이혼의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정말 이혼을 하면 네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 이혼 이후에는 어떻게 할건지를 생각해 보는 거야. 그런 후에는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렇게 명상 수행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가부좌를 틀고 면벽하여 참선을 하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올라오는 다리의 통증을 견디며 화두를 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남편을 택한 이유’를 계속해서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명상을 통해 처음으로 가엾은 내 영혼과 만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움켜지고 그 것을 놓칠까봐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내 자신을. 평생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내가 남편에게 끌린 이유는 다름 아니라 나 자신이 정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불쌍하고 애처로웠다. 내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거짓된 내 모습을 진짜 인줄알고 살았던 내 자시의 어리석음에 가슴을 쳤다. 밖으로만 향해있던 원망이 없어지고 진정한 참회가 시작되었다.
나 밖에 모르고 그 누구도 배려하려고 하지 않았던 지독한 내 이기심, 이런 내 이기심에 상처받아야 했던 남편과 아이들!
모든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만 여겼던 내 자신을 보며 명상을 통해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누가 나에게 살라고 강요한 적이 있었던가!
행한 것도 나요 괴롭다고 아우성을 쳤던 것도 모두 내 자신 이였다. 슬픔도 괴로움도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인가! 모두 나였다.
나 혼자 괴로움을 만들고 내가 만든 괴로움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얼마나 많은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했던가! 무서웠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진적으로 참회하고 뉘우치지 않았다면 난 그 어리석음으로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참 많이 울었다. 서러워서 울고, 가엾어서 울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내 어리석음에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참으로 내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동정심에 이끌려 결혼을 결심했던 것이구나! 그렇게 모성애를 느낀 이유 또한 나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내게 정을 주시기를 바라며 부족한 정에 늘 굶주려 있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나는 왜 이렇게 어머니의 정에 집착하게 됐을까? 명상을 계속하며 내 기억의 흐름을 과거로 되돌려갔다. 기억하기도 이전의 태아기까지 점차 명상해 들어가자, 내가 갖고 있는 줄도 몰랐던 응어리들이 발견됐다.
아버지는 3대 독자였다. 그리고 독자에게 시집 온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상심하신 나머지 3일 동안 나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기억의 표면으로 떠오르자, 아버지가 나를 보지 않았던 때의 상실감이 밀려 들어왔다.
내면을 향한 질문은 계속됐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에게 외면당해서 슬픈 걸까? 스승님은 “이것을 알려면 명상을 통해 전생까지 관찰해 보아야 한다”고 하셨지만 끝내 전생까지 들여다볼 수 는 없었다. 그러나 비로소 나는 날 가로막던 막을 한 꺼풀 벗겨낸 느낌이었다.
불쌍하고 가여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혼자되신 시어머님, 막둥이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남편, 어리석고 이기적인 엄마를 만나 어리광 한 번 부려보지 못하고 일찍 철이 들어버린 불쌍한 내 아이들!
난 정말 아이들에게 나쁜 엄마였다. 내가 내 문제로 인해 괴로워할 때 아이들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내 기분에 따라 예뻐했다가 소리 지르고 때렸다 하는, 정말로 몹쓸 엄마였다. 불쌍한 내 아이들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건가.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내가 죄를 지었구나’라고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 향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외도와 방관으로 부부 사이의 갈등을 제공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남편이었지만, 나는 사실 내 마음 속에서 남편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로써 행동하기 보다는 마치 엄마가 아들을 대하듯 그를 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힘들 때는 보호자가 아이를 어루만져주듯 그가 무엇이든 나를 위해 양보하고 헌신해주기를 바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