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선문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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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한 80년 전, 경기도 양주 망월사라는 좋은 선방이 있었습니다. 제방에서 발심한 수좌 스님들과 모여 결제방을 짜기를 용성 선사를 조실 스님으로, 운봉 선사를 입승 스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던 중, 반살림이 도래해 용성 스님이 법상에 오르시어 법문하기시를, ‘나의 참모습은 삼세(三世),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보지 못함이요, 역대의 무수 도인들도 보지 못함이어니 여기 모인 모든 대중은 어느 곳에서 산승의 참모습을 보려는고?’ 했습니다.
그러니 운봉 선사가 일어나서 이르되,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 하고 멋진 답을 하셨습니다. 만약 산승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빗장 관자(關字) ‘관(關)’이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운봉 선사가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 라고 답을 하자, 조실 용성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을 내려와 조실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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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법문에 바로 답하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산승에게 묻는 것을 허락하거니와, 만약 바른 답을 못하면 진리의 문답에 있어서 동문서답을 할 것이다. 또 사(邪)와 정(正)을 가릴 눈이 없는 것이니 물을 자격이 없음이로다. 대중은 이 세 가지 법문을 이르고 일러보라! 답하면 내가 주장자를 주리라.”
진제 스님이 이 같이 질문을 던지자, 장내는 잠시 정적이 흘렸다.
첫 번째로 부산 명륜동에서 체육관을 운영한다는 류두식 재가불자가 법거량에 나섰다.
“(삼배를 올리고)세 가지 중에, 저는 조실 스님을 따라가겠습니다.”
“답을 하라니 ‘조실 스님을 따라 가겠다’고 하니, 이게 무슨 소리고?(웃음)”
이어 다른 재가불자가 질문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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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놔두고, 내가 아까 물은 3가지를 명백히 하나하나 들어 말해야지.”
2명의 재가거사가 잇따라 답처를 제시했지만, 결국 올바른 답처를 못 내보이고 모두 물러나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진제 스님은 다음과 말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바른 답을 하는 이가 없는 줄 알겠습니다. 지금 금일 참여한 모든 대중들이 이 세 가지에 대해 답하는 이가 없다고 손을 들었으니, 이 산승이 양 팔을 던지고 이 세 가지의 답을 만천하에 나의 살림살이를 공개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용성 대선사님께서 나의 참모습은 모든 부처님도 보지 못함이요, 역대의 도인 스님들도 보지 못함이니. 대중들은 어디 곳에서 나의 참모습을 보려고 하는고?’ 하니, 운봉 선사는 ‘유리 독 속에서 몸을 감췄다’ 하셨습니다. 산승이 만약 그 당시에 있었다면, 빗장 관자(關字)의 ‘관(關)’이라고 답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용성 선사는 아무 말 없이 법상을 내려와 즉시 조실 방으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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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진제 스님은 대증들에게 화두 드는 법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할 것을 주문했다. 곧바로 무차선 법회에 참가한 출ㆍ재가자들이 선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점,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등 참선공부와 관련된 질문들을 쏟아냈다.
먼저 해운정사에서 정진 중인 수좌 범주 스님이 진제 스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삼배를 올리고)위빠사나 수행법 등의 소승 수행법이 우리나라에서도 승속을 막론하고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예로부터 남방소승의 수행법으로 부처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화선을 주창해왔는데요. 또한 부처님의 정법이 이 간화선맥으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럼 전통 수행법인 간화선의 힘은 무엇입니까?”
“위빠사나는 수행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설사 알았다 해도, (또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법신의 진리와 여래선의 진리에 눈이 열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최고 향상의 일구 진리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부처님과 도인이 법신의 진리를 비밀히 전한 것도 아니고, 여래선의 진리를 전한 것도 아닙니다. 향상의 일구 진리를 오늘날까지 비밀히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이 비밀히 전하는 향상의 일구는 활구참선, 즉 간화선만이 그 관문을 투과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간화선만이라야 (그 관문을) 투과할 수 있는가. 간화선 깨달음의 열쇠는 일념삼매가 지속되는 그 과정에서 의식과 화두가 한 덩어리가 돼, 밤낮으로 흐르고 흐르다가 보면 홀연히 보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 납니다. 이 깨달음의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옛 도인들이 말씀하시길, ‘의심이 크면 깨달음도 크다’고 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의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힘이 미약해 대오견성을 못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요?”
이어 선원 수좌인 정오 스님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대중 스님들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대해 옳고 그름, 높고 낮음을 논하지 마시고,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대중들이 선수행을 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조실 스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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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점수는 이제 몰록 깨달아 습기를 제하는 것입니다. 차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견성법에 이르기 법이 없습니다. 명안종사들은 돈오돈수를 주창했지, 돈오점수를 제창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향상 일구의 이치를 몰라 그 사상이 맞다며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해인선원의 건봉 스님이 올바른 활구참선법에 대해 진제 스님에게 물었다.
“올바른 활구참선법은 한 걸음도 내딛지 않고 곧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한 걸음도 내딛지 않고 곧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일천 성인의 이마 위에 일구의 진리가 있습니다. 일천 성인의 이마 위에 일구를 뚫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한 걸음도 내딛지 옮기지 않고 부처님의 진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천 성인의 이마 위에 일구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말에 한 걸음도 옮기는 않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일천 성인의 이마 위에 일구를 투과하는 그러한 정진 자세를 갖추면, 앉은 그대로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는 그러한 정안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의 눈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또 수좌인 금전 스님이 질문을 던졌다.
“깨닫기 위해서는 도량, 도반, 선지식 등 3가지 중요하다고 합니다. 만약 이 3가지를 다 갖추지 못한다면, 무엇에 의지해 공부해야 가장 으뜸이 됩니까?”
“3가지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은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는 그 인연입니다. 이 광대무변한 진리의 세계, 허공보다도 넓은 진리의 세계에서 밝은 눈을 갖추지 못하면, 몇 생을 어긋나게 되는 법입니다. 스승 없이 대도를 깨달았다고 것은 망념 중에 망념입니다. 왜냐면, 허공의 경계는 다함이 없습니다. 동서남북 상하사유에서 넓디넓은 이 허공보다 더 넓은 부처님의 세계에서 혼자서 알았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럼 혼자서 알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동쪽 허공의 한 부분만을 보고 다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동서남북 상하사유를 다 봐야 합니다. 그것은 선각자가 아니면, 먼저 깨달은 대선지식이 아니면, 바르게 인도할 수도 바르게 점검할 수도 없습니다. 3가지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 그 밑에서 바른 참구, 바른 지도, 바른 탁마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광대무변의 진리의 세계를 알고자 한다면,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 바른 지도를 받고 바른 참구를 해서 바른 눈이 열리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겠지요?”
곧이어 재가불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부산 광안동에 사는 재가불자 최대각 씨가 진제 스님에게 질문을 올렸다.
“화두를 들고 있는데요, 잠 잘 때가 제일 문제입니다. 목침을 베고 (잠 잘 때) 챙기는 것은 어떻게 챙깁니까?”
“참의심의 발동이 걸리면 화두가 잘 들립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일념이 흐르는 시냇물처럼 쭉 마음속에서 화두가 흘러갑니다. 시냇물은 근원이 마르기 전까지는 끊겼다가 쉬었다 흐르지 않습니다. 그럼 진리가 발동이 걸리면 또는 화두와 참의심이 발동 걸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때는 보고 듣고 분별심 모두가 마비가 되고, 화두 한 생각만 쭉 흘러가게 됩니다. 흐르는 시냇물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잠을 자다가도 영식은 화두와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꿈을 꿔도 다른 꿈이 안 꿔지고 아주 또렷또렷하게 챙기는 그 꿈만 흘러갑니다. 이런 과정이 되려면, 마음에 사무치는 참의심이 발동이 걸릴 때 바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 처사님께서는 그러한 참의심이 발동되지 않았으니, 마음에 간절히 우러나는 일념이 지속될 수 있도록 무한한 정진에 몰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최 씨가 진제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잠은 자되, 꿈이 없고 깊은 잠에 들어서도 저는 목침을 베고 오른 쪽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계속 잡니다. 그렇게 깊은 잠에 들어서도 빼앗기는 수가 있는데 그 때는 어떤 마음을 챙겨야 합니까?”
“그때도 진의가 발동이 걸리면 생시나 죽 흘러가는 법입니다. 그렇게 한번 (화두를) 잘 들어보세요. 내가 거짓말 했는지 잘 들어보세요.”
이어 소림사 신도회장 대원성 보살이 ‘인과법과 참선’의 관계를 물었다.
“재가신도로서 인과에 대한 법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 인연을 저희들은 재가 생활자로서는 어쩔 수 없이 걸릴 일이 많이 있는데 참선을 해서 그 인과와 어떤 관계를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참선을 잘 해서 진리의 바른 눈이 열리시면 삼생의 중생의 인연이 직하에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봄바람에 온 산하의 눈이 일시에 녹아지듯이 진리의 눈이 활짝 열릴 때 삼생 업이 다 녹아서 다 없어지고 모든 악한 인연도 동시에 단절이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과 모든 대 보살들과 더불어 정안이 열리면 억만년이 다하도록 부처님 국토에서 부처님과 손을 잡고 부처님 락을 멋지게 누리는 그러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잠시 후, 어느 재가불자가 “화두가 1700공안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듣기로는 수좌계에서도 1700공안이 지금 시점이 너무 걸이가 멀어서 의심이 날아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법맥을 이었습니다. 그러면 스님께서도 이 시대에 맞는 화두를 생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마삼근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제가 스님께 여쭤 보겠습니다. 스님 무엇이 불법입니까?”
“(크게 세 번 웃고) 그래요.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다) 1700 공안은 도인들이 견성을 하셔서 한 마디를 던져 놓은 것입니다. 한 공안이 타파되면 모든 공안이 다 풀립니다. 고기 잡은 그물의 한 코가 풀리면 모든 그물의 코가 풀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천불의 만조사가 심성의 고향에 돌아가서 법문을 베풀어 놓았기 때문에 다 서로 통하게 돼 있습니다. 알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산승은 하도 의견이 분분하고 해서 이런 화두를 많이 줍니다. 가령 이 몸뚱이는 허망해서 호흡지간에 숨을 못 내쉬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냥 썩습니다. 또 화장하고 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는 참나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떠한 것이 ‘참나’인가? 이 참나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습니다. 부처님도 참나를 알아서 위대한 부처님이 됐고, 모든 도인도 참나를 알고 위대한 도인이 됐습니다. 참나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으니, 여러분도 참나를 알면 부처님도 도인도 됩니다. 그리고 무진 법문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요?”
곧이어 어느 재가불자가 법석에 나와 진제 스님에게 물었다.
“저는 이름도 없고 성도 없습니다.”
“이름도 없고 성도 없다 해도 이 주장자로 한 대 맞아야 되겠네. 할”
“할. 그러면,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옛날에 사조 도신대사가 삼조 승찬 대사한테 법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삼조 승찬 대사가 한마디 일러라 이랬답니다. 그러자 사조 도신대사가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습니다. 이랬는데 이 도리가 어떤 도리가 입니까?”
“뒷북을 쳐도 이만저만이 아니네. 아까 물을 때는 벙어리가 돼 있더니 엉뚱한 소리를 하니 어허허허. 할.”
“할!”
“쉬시고 참 나를 바로 알아가지고 한번 찾아오십시오.”
잠시 후, 통도사 희문 스님이 ‘지계청정과 대도 성취의 관계’를 진제 스님에게 물었다.
“출가대중도 지계청정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재가자들도 도덕적으로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스님, 지계청정하지 않고도 대도에 들 수 있겠습니까?”
“대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계율이 근본이 됩니다. 계행이 청정한 그 가운데, 화두를 아주 상기를 들어 정(定)의 일념삼매가 지속되는 경지를 성취해야 합니다. 정이 이뤄지는 그 가운데 홀연히 밝은 지혜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하나입니다. 하나이면서 세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세 가지를 원만히 구족할 때, 부처님과 같은 거룩한 선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산에 사는 재가불자 오갑춘 씨가 질문을 던졌다.
“1년 전에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일반 선원에서 화두를 받고 1주일간 정진을 했습니다. 온몸에 전율과 함께 화두에 대한 성취감을 맛보았습니다. 지금은 매일 1시간씩 정진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진 공포가 제에게는 ‘제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는지’ 또 ‘제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에 대한 의심과 ‘이렇게 공부를 하면 제가 과연 참마음을 알 수 있는지’ 이런 의심 속에서 모든 번뇌 망상을 잊으려고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저의 공부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전생도 내생도 깜깜합니다. 인생은 생명호흡지간에 있어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이 자기의 참모습을 내보였습니다. 방 거사의 일가족처럼 멋지게 벗고 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행선 일구를 깨달아 바른 정안을 갖춘 이는 홀연지간에 이 몸을 벗되, 진리의 적적삼매를 누립니다. 이 적적삼매를 누리면, 사바세계 삼천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모든 부처님과 도인이 깨달은 살림살이에 딱 머물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안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 적적삼매의 누리는 것이 모든 부처님과 도인의 살림살이입니다. 그러니 일생생활에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를 참구해야 한다. 이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습니다. 이 ‘참나’를 알면 부처님 국토에 이르고 부처님과 같은 생활을 하고, 억만 년에 다하도록 생사의 고통이 없는 적적삼매의 복락에 편안하게 머물게 됩니다.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이 일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해놓았습니다. 그러니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하고 간절히 화두가 흘러가도록 전력을 다하면, 시절인연이 도래해 홀연히 자기 참나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 때, 산승이 바른 말을 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