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눈앞의 한 물건을 아는가?"
"일백 가지 풀끝에 불법의 진리 아님이 없습니다"
"답처를 알면 주장자를 부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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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하시어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요평불평(要平不平)이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혹지혹장(或指或掌)이여
의천조설(倚天照雪)이로다
대야혜(大冶兮)여
마룡불하(磨龍不下)요
양공혜(良工兮)여
불식미휴(拂拭未休)로다
별별(別別)이여
산호지지탱착월(珊瑚枝枝撑着月)이로다
평평하지 못한 것은 평평함을 요함이요
크게 공교로움은 옹졸함과 같음이로다
혹은 가리키고 혹은 때림이여
하늘을 비껴서 눈(雪)을 비춤이로다
큰 화로에는
보검을 갈고 갈아서 내려오지 아니함이요
일등 양공이여
보검을 갈고 닦음을 쉬지 아니함 이로다
특별히 다르고 다름이여
산호나무 가지가지에 달빛이 영롱함 이로다
선(禪)은 지혜의 보배칼을 완성하여 단칼에 다생(多生)의 무명초(無明草)를 베어 없앰이로다.
옛 도인들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빈한하게 삶은 지혜가 짧음이요, 말이 야위면 털이 긺이로다.”
하셨습니다.
나고 날 적마다 출세와 복락을 누리고자 할진대, 만인에게 앞서는 지혜의 보배칼을 잘 연마해서 뭇 성인의 대열에 들어가 지혜의 보검을 잘 쓸지어다.
어떤 분들이 이렇게 걸어왔는고? 열거하는 것을 잘 경청하소서.
경허 선사는 근대 백여 년 전의 대 선지식인데, 명성이 전국에 분분하니 그 당시에 발심한 혜월 스님 -경허 선사로부터 법을 받기 전까지는 ‘혜명’이란 법명을 썼다-이 경허 선사를 참방하여 여쭙기를,
“스님, 저도 견성도인(見性道人)이 되고자 찾아왔습니다. 화두를 하나 내려주십시오.”
하니, 경허 선사가 말씀하셨습니다.
“허공이 법을 설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이 사대(四大) 몸뚱이 또한 법을 설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나니, 다만 눈앞에 뚜렷이 밝은 한 물건이 있어서 법을 설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니, 그대는 이 목전(目前)의 고명(孤明)한 한 물건을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화두 삼아 잘 정진해서 알아오게.”
혜월 스님은 7년 동안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씨름했습니다. 어느 날 짚신을 삼다가 방망이로 신골을 치는 소리에 화두가 타파되었습니다.
곧장 경허 선사를 찾아가니, 경허 선사께서 마루에서 정진하시다가 당당하게 들어오는 혜월 스님의 모습을 보고는 즉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어떤 것이 목전의 고명한 한 물건인고?”
“저만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혜명인고?”
이에 혜월 스님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가,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서 섰습니다.
“옳고, 옳다.”
경허 선사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혜명 스님에게 ‘혜월’이란 법호(法號)을 내리고 법을 부촉하셨습니다.
혜월 선사는 경허 선사로부터 인가 받은 후 남방으로 내려오시어 통도사, 선암사 등지에서 선법을 크게 선양하였습니다.
혜월 선사께서 부산 선암사(仙岩寺)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많은 대중이 모여 살다 보니 항상 식량이 부족해 선사께서는 늘 논 개간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한번은 일등 호답(一等好沓) 다섯 마지기를 팔아서 산중 논을 개간했는데, 여러 달 만에 겨우 세 마지기를 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섯 마지기를 팔아서 개간했으면 적어도 일곱 여덟 마지기로 불려놓아야 하는데, 왜 겨우 세 마지기밖에 개간하지 못했느냐?
일꾼들이 일하다가 게으름이 나면,
“스님, 법문 좀 해 주십시오.”
하여, 한번 법문을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법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절의 스님들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스님, 일등 호답(一等好畓) 다섯 마지기를 팔아 세 마지기밖에 개간하지 못했으니, 이렇게 살림을 살다가는 대중이 다 굶어 죽겠습니다.”
그러자 혜월 선사께서는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 소견머리 없는 사람들아! 논 다섯 마지기가 어디 갔어? 세 마지기가 더 불어나지 않았느냐.”
누가 농사를 짓던 간에 다섯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세 마지기를 더 개간했으니 불어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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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너른 세계를 사는 것이 깨달은 도인의 살림살이입니다.
혜월 선사께서는 연로하시도록 손수 시장을 보러 다니셨습니다.
하루는 절에 천도재가 있어 일꾼을 데리고 시장을 보러 가게 되었는데, 노변에서 콩나물 파는 아주머니가
“스님, 우리 콩나물 좀 사 주십시오.”
하면 한 동이를 사시고, 또 옆에 앉은 이가
“우리 것도 사 주십시오.”
하면 또 사고, 또 사고 해서 정작 사야할 재물은 못 사고 절에 콩나물만 여러 동이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혜월 선사의 명성이 자자하자 신도들이 다투어 좋은 옷을 지어다가 선사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선사께서 그 옷을 입고 장에 나가시면, 거지들이 무심도인인 줄을 알고는 다가와서,
“스님, 그 옷을 저희에게 좀 주십시오.”
하면 선사께서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고 대신 거지들의 옷을 받아 입고 오셨지요.
그래서 신도들이 옷을 지어 드리기가 바빴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행(行)입니다.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있고 ‘나’라는 상(相)이 있으면 이렇게 할 수 없는 법입니다. 바로 이러한 행을 천진(天眞) 영아(?兒)의 행, 무심도인의 행이라고 합니다.
일제치하 당시에 새로 부임한 남 총독이, 남방에 유명한 도인이 혜월 선사라는 소문을 듣고, 하루는 수하 몇몇을 데리고 선사를 방문했습니다.
총독이 인사를 올리고는 혜월 선사께 물었습니다.
“스님, 어떤 것이 부처님 법 가운데 가장 높고 깊은 진리입니까?”
“부처님의 높고 깊은 진리? 귀신 방귀에 털이 났지.”
귀신도 허무한데 귀신이 방귀를 뀐다는 것, 더군다나 그 방귀에 털이 난 것이라고 하니, 대체 이 무슨 소리인고? 이것은 총독 아니라 지나가는 이라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 총독은 여기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만 물러갔습니다.
남 총독이 혜월 선사에게 방망이를 맞았다는 소문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분분하니, 남 총독의 부하 무사 하나가 혜월 선사를 혼내주려고 장검을 차고 찾아왔습니다.
구두를 신은 채 노크도 없이 혜월 선사가 계신 방문을 박차고 들어와서는 선사의 목에다 장검을 들이대었습니다.
“스님이 혜월 선사입니까?”
“그렇소. 내가 혜월이오.”
대답과 동시에 선사께서는 손가락으로 무사의 등 뒤를 가리켰습니다. 뒤에서 누군가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 무사가 급히 뒤를 돌아보는 찰나 혜월 선사께서 벌떡 일어나 무사의 등을 치며 소리쳤습니다.
“내 칼 받아라!”
순간 당황한 무사는 칼을 거두고 혜월 선사께 큰 절로써 예를 올리며,
“과연 위대하십니다.”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지혜의 기봉(機鋒)을 갖춘 선사가 아니고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 석화전광(石火電光)과 같은 기틀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혜월 선사께서 그 상황에서 두려워했다거나 마음에 공포심이 일어났던들, 선사의 목은 즉시 달아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수행을 하여 지혜의 보검을 잘 연마하면 혜월 선사와 같이 이처럼 멋지게 보검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선사께서 노령(老齡)에는 항시 뒷산에 올라가 자루에다 솔방울을 가득 주워 담아 짊어지고 내려오시곤 했습니다. 하루는 산을 내려오다 잠시 쉬시던 바위에서 솔방울 포대를 지고 반쯤 일어서는 자세로 이 몸뚱이를 훌쩍 벗어버렸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숨이 떨어지면 앞으로 거꾸러집니다. 부처님 이후로 무수한 도인이 계셨지만 이렇듯 독특한 열반상을 보인 분이 드뭅니다.
시회대중은 무심도인 혜월 선사를 알겠는가?
막위무심운시도(莫謂無心云是道)하라
무심유격일중관(無心有隔一重關)이로다
무심이 진리의 극칙이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하나의 관문이 가리워져 있느니라
마조 선사는 84인의 도인 제자를 둔 위대한 도인입니다.
하루는 마조 선사께서 백장(百丈) 스님을 시자(侍者)로 데리고 산골 저수지를 지나가는데, 저수지에서 놀던 오리들이 인기척에 놀라 훨훨 날아갔습니다.
마조 선사께서 백장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인고?”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날아가는고?”
“저 산 너머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조 선사께서는 대뜸 백장 스님의 코를 쥐어 세게 비틀어 버리셨습니다. 백장 스님이
“아얏!”
하고 아파서 소리를 지르니, 마조 선사께서
“어찌 날아갔으리오.”
하셨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절로 돌아오자 백장 스님은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산 너머로 날아가고 있다고 하는데 마조 선사께서는 어째서 코를 비틀었는고?’
이것이 의심이 되어 일주일간 침식(寢食)을 잊고 의심삼매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일주일 만에야 마조 선사께서 코를 비튼 뜻을 깨닫고는 방문을 박차고 나와 조실스님 방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조실스님! 어제까지는 코가 아프더니 오늘은 코가 아프지 않습니다.”
마조 선사께서는 백장 스님의 눈이 열린 것을 아시고 운집종을 치게 하니, 몇 백 명 대중이 모두 법당에 모였습니다. 조실스님이 법상에 올라 좌정(坐定)하고 있는 차에 백장 스님이 맨 나중에 들어오더니, 대뜸 법당 마루에 깔아놓은 절하는 배석자리를 돌돌 말아 어깨에 메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조 선사께서 즉시 법상에서 내려와 조실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시회대중은 마조 도인과 백장 시자를 알겠는가?
마조 도인이 좌정하고 있는데 백장 스님이 배석자리를 말아 메고 나간 이 도리를 알겠는가?
용수불개전체현(龍袖拂開全體現)이요
수미도탁반공중(須彌倒卓半空中)이로다
어의(御衣) 소매를 떨치는데 전체가 드러남이요
수미산이 허공 중간에 거꾸로 꽂힘이로다
부처님 출세 이후로 무수 도인이 나왔지만 재가자(在家者)로서 온가족이 견성한 것은 방거사 일가족뿐입니다.
당시에 중국에는 위대한 마조 선사와 석두 선사가 쌍벽을 이루어 선법(禪法)을 크게 선양하고 있었습니다.
방거사가 하루는 ‘나도 불법의 진리의 도를 깨달아야겠다’는 작심을 하고, 큰 신심을 발하여 두 분 도인을 친견하러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석두 도인 처소에 다다라 예삼배(禮三拜)를 올리고는,
“tm님께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만 가지 진리의 법과 더불어 벗을 삼지 아니한 자, 이 누구입니까?”
하고 아주 고준(高峻)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석두 도인께서는 묻는 방거사의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입을 틀어막는 여기에서 방거사의 진리의 눈이 팔부가 열렸습니다.
방거사는 석두 도인께 큰절을 올리고 그 걸음으로 다시 마조 도인을 친견하러 갔습니다. 마조 도인 처소에 이르러 예삼배를 올리고는,
“만 가지 진리의 법과 더불어 벗을 삼지 아니한 자, 이 누구입니까?”
하고 종전과 똑같이 물었습니다. 이에 마조 도인은,
“네 입으로 서강수(西江水) 물을 마셔 다해 올 것 같으면 그대를 향해 일러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방거사는 이 한 마디에 진리의 눈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 후로 집에 돌아와서 조상대대로 내려온 가보(家寶)와 모든 재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다 나눠 주고, 개울가에 조그만 떼집을 짓고 산죽으로 조리를 만들어 팔며 온가족이 참선정진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방거사의 부인과 딸까지 온가족이 다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방거사가 딸 영조에게 한마디 던지기를,
“일백 가지 풀끝에 불법의 진리 아님이 없구나.”
하니 영조가 받아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백발이 되고 이빨이 누렇도록 수도(修道)를 하시고도 그러한 소견밖에 짓지 못하십니까?”
“너는 그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백 가지 풀끝에 불법의 진리 아님이 없습니다.”
이렇게 똑같이 대답했지만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대중은 영조의 낙처(落處)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루는 방거사가 출타 중인데 단하천연 도인이 방거사를 찾아왔습니다. 사립문 앞에 이르니, 마침 방거사 딸 영조가 우물가에서 채소를 씻고 있었습니다.
단하천연 도인이,
“거사 있느냐?”
하니 영조가 채소를 씻다가 일어서서 정중히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서 있었습니다. 천연 도인이 재차
“거사 있느냐?”
하고 물으니, 영조가 올렸던 손을 내리고 채소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에 단하천연 도인은 즉시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대중은 알겠는가?
단하천연 도인이 “거사 있느냐?” 하는데 영조는 어째서 가슴에 손을 얹고 서 있으며, 단하천연 도인이 척 아시고 다시 “거사 있느냐?” 하는데 영조는 어째서 손을 내리고 채소 바구니를 이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느냐?
영조가 손을 얹고 서 있는 것과 채소 바구니를 이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 이것을 바로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을 바로 보지 못하면 부처님의 진리의 법과는 거리가 멀고 멈이로다.
영조는 여자의 몸으로서 부처님의 진리의 대도를 깨달아 이렇게 고준한 법을 쓸 줄 알았습니다. 천불(千佛) 만조사(萬祖師)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이 고준한 법을 자재하게 썼던 것입니다.
하루는 방거사 일가족이 초가집 방에서 쉬던 차에 방거사가 누웠다가 앉으면서 한마디 던지기를,
“어렵고 어려움이여! 높은 나무 위에 백 석이나 되는 기름을 펴는 것과 같구나.”
하니 부인이 받아서 말했습니다.
“쉽고 쉬움이여! 일백 가지 풀끝에 불법의 진리 아님이 없구나.”
그러자 딸 영조가 석화전광(石火電光)과 같이 받아서 말했습니다.
“어렵지도 아니하고 쉽지도 아니함이여! 곤한 즉은 잠자고, 목마른 즉은 차를 마신다.”
방거사 일가족의 이 세 마디에 부처님의 49년 설법이 다 들어있습니다.
하루는 방거사가 방안에서 좌복에 앉아 있다가 딸 영조가 들어오니, 딸을 보고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정오에 이 몸을 벗고 열반에 들리니, 네가 밖에 나가 정오가 되었는지 해를 보고 오너라.”
영조가 밖에 나갔다 들어와 말했습니다.
“아버지, 오늘은 일식이라 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나가서 한번 보지.”
방거사가 밖에 나간 사이에 영조는 아버지 좌복 위에 앉아 찰나지간에 애지중지하는 몸뚱이를 벗어버리고 열반에 들었습니다.
방거사가 들어와서 보고는,
“장하다 내 딸이여! 너의 시신을 화장하기 위해서 내가 천상 일주일을 연기해야 되겠다.”
했습니다. 밖에 나갔다 오는 사이, 그 찰나지간에 애착의 주머니를 벗고 열반에 들었으니 장하다 아니할 수 없지요.
방거사는 일주일 후, 딸의 시신을 화장해 마치고 부인에게 간다 온다는 말도 없이 좌복에 앉아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웃 노 보살이 방거사 집을 찾아왔다가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 방문을 열어보니, 방거사는 좌복 위에 앉은 채로 열반에 들어 있었습니다. 노 보살이 밭에서 풀을 매고 있는 방거사의 부인에게 달려가서,
“거사님이 열반에 드신 것 같네.”
하니 부인은 한 손으로는 풀을 잡아당기고 한 손으로는 호미로 땅을 파는 자세로 그 몸뚱이를 벗어버렸습니다.
모든 대중들이여!
방거사 일가족이 멋지게 살다가 멋지게 간, 이것을 바로 볼지어다.
이것은 천추(千秋)의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자유자재로 벗고 가는 것은 오직 불법에만 있지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참선수행을 해서 바른 진리의 눈이 열리면, 이와 같이 멋지게 살다 멋지게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모든 대중들도 방거사 일가족과 같이 대자유인이 되려면, 참선정진을 잘 해서 바른 안목이 열려야 됩니다. 모든 도인과 더불어 지혜의 보검을 자재하게 쓰는 그러한 저력이 있어야만 이렇게 멋지게 살다가 멋지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거사가 마지막으로 하신 법문,
“어렵고 어려움이여! 높은 나무 위에 백 석이나 되는 기름을 펴는 것과 같구나.” 한 것은 어떠한 진리의 한 모퉁이를 드러내 보인 것이며, 방거사의 부인이 말한 “쉽고 쉬움이여! 일백 가지 풀끝에 불법의 진리 아님이 없구나” 한 이것은 또 어떠한 진리의 한 모퉁이를 드러낸 것이며, 방거사의 딸 영조가 말한 “어렵지도 아니하고 쉽지도 아니함이여! 곤한 즉은 잠자고 목마른 즉은 차를 마신다” 고 한 것은 또 어떤 진리의 한 모퉁이를 드러낸 것인가.
이 세 분의 답처를 아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금일 산승이 이 주장자를 부치리라.
만약 산승이, 방거사 일가족이 고준한 법문을 한 마디씩 할 적에 동석했더라면 이 주장자로 각각 20방망이씩 때리리라.
만약 “방거사 일가족이 고준한 법문을 토해냄으로써 무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눈을 열게 하였는데, 스님은 무슨 장처가 있어서 각각 20방망이씩 때린다고 하십니까?” 하고 묻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이월한식청명후(二月寒食淸明後)에
녹수지상황앵제(綠樹枝上黃鶯啼)로다
이월 한식 청명 후에
푸른 나뭇가지에는 노란 꾀꼬리가 아름답게 울고 있구나
지금으로부터 한 80년 전입니다. 경기도 양주에 망월사라는 좋은 선방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30년결사를 하자. 30여 년 간 마을에 내려가지 않고 정진해서 대오견성을 하자.” 해서, 전국에서 발심한 수좌 30여 명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용성 대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석우 선사를 선덕으로, 운봉 선사를 입승으로 모시고 멋진 회상을 열어 정진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결제 중 반살림이 도래하여 조실이신 용성 대선사께서 법상에 올라 법문 하시기를,
“나의 참모습은 삼세(三世),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보지 못함이요, 역대의 무수 도인들도 보지 못함이어니 여기 모인 모든 대중은 어느 곳에서 산승의 참모습을 보려는고?”
하니, 운봉 선사가 일어나서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
하고 멋진 답을 하셨습니다.
만약 산승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빗장 관자(關字) ‘관(關)’이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당시에 운봉 선사가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라고 답을 하자 조실이신 용성 대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을 내려와 조실 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대중들은 세 분의 답처를 바로 볼지어다.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췄다’ 함은 어떤 뜻이며 빗장 관자 ‘관’ 함은 어떤 뜻인가? 또 법상을 내려와 말없이 조실 방으로 돌아간 것은 어떤 뜻인가?
이 세 가지 법문에 바로 답하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산승에게 묻는 것을 허락하거니와, 만약 바른 답을 못하면 진리의 문답에 있어서 동문서답을 할 것이며 사(邪)와 정(正)을 가릴 눈이 없는 것이니 물을 자격이 없음이로다.
대중은 이 세 가지 법문을 이르고 일러보라!
(대중이 답이 없으니)
양구(良久:한참을 묵묵히 앉아있는 것)하신 후에,
산승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천하대중에게 이 세 가지 법문에 대해서 답을 하리라.
(직접 답을 하신 후에)
진리의 문답은 이로써 마치고 선(禪)의 상식에 대해서 질문하고자 하는 이가 있으면 물으시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시고 하좌하시다.
# 진제 대종사 약력
- 1931년 경남 남해에서 출생
- 1954년 남해 해관암에서 석우 선사를 은사로 출가
- 1957년 통도사에서 구족계 수지
- 1967년 향곡 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음으로 해서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전해 내려온 법맥을 이음. 석가여래 부촉법 제 79법손
- 1971년 해운정사 창건.
- 선학원 이사장, 중앙선원 조실 역임
- 1999년 경주 금천사 창건
- 2000년 문경 봉암사 조실
- 2002년 국제무차선대법회 법주
- 현재 해운정사 금모선원 조실, 부산광역시 불교연합회 증명,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
- 2003년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
저서:<돌사람 크게 웃네> <선 백문백답> <염화인천>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