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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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답 듣기의 포인트는?
법어는 수행과 깨달음을 전제로 들어야


법어도 어(語)인 바에야, 말의 형식을 따를 수밖에 없다. 어란 글자는 사람의 목소리를 가리킨다. 사람의 입을 통해서 말해지는 말소리를 가리킨다. 글자만으로 따지자면 법을 말소리를 통해 전한다는 뜻이겠다. 물론 법어에도 형식이 있다.

선종본찰 범어사에서 모처럼 승속을 떠나 법을 거량하는 무차선대회가 열린다. 사진음 범어사 설선대법회에 동참한 사부대중. 현대불교 자료사진.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로 꼽히는 <벽암록(碧巖錄)>은 법어의 정형을 보여준다. 벽암록은 수시(垂示)와 본칙(本則), 본칙에 대한 송(頌), 본칙과 송에 대한 평창(評唱), 착어(着語) 등으로 구성된다. 벽암록은 100개의 본칙(本則)을 모아 놓은 책이다. 따라서 본칙이 벽암록의 중심이 된다. 본칙이란 수행자들이 믿고 따라야 할 법칙을 말한다. 옛 선지식들이 남겨 놓으신 말소리의 흔적들이기 때문에 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수시(垂示)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의 일종의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벽암록에는 수시가 달린 것도 있고, 생략된 것도 있다.

벽암록의 근간은 옛 스님들의 어록으로부터 골라 놓은 100개의 본칙과 이에 대한 설두 스님의 송(頌)이다. 고칙에 대한 송이라 하여, 송고(頌古)라고 한다. 송이라고 했으니 노래의 형식을 가리킨다. 고칙에 대한 느낌을 노래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평창은 본칙이나 송에 대한 설명이다. 고칙이 나오게 된 배경 등을 논리적으로 소상하게 설명한다. 착어(着語) 는 덧붙여 놓은 말이라는 뜻이다.

본칙이나 송 따위에 한 두 마디의 짤막한 평가를 붙여 놓은 것을 가리킨다. 평창과는 달리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형식을 갖고 있다. 일반 사람들이 선어를 어렵고 황당무계하게 느끼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사들의 법어는 대개 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구성된다. 맨 앞에 간단한 수시를 달고, 옛 스님의 고칙을 들어 준다. 수시와 고칙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법어를 끌어가며, 중간에 송을 인용하기도 하고, 직접 지은 송을 달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착어를 덧붙친 후 법어를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형식은 오래 된 전통으로써, 현대의 법어들도 상황에 따라 가감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골격은 대개 전통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굳이 선적인 법어가 아니라고 해도, 스님들 법문에 의례 한문 게송이나, 선지식들에 대한 일화들을 인용하곤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전통의 흔적 때문이다.

이 같은 형식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전통으로 자리를 잡은 까닭은 그런 형식 자체에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선적인 가르침을 펴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형식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안(公案)을 공안, 곧 관공서의 공문서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 이야기에 공문서와 같은 강력한 권위를 부여하려 했기 때문이다. 본칙이라는 표현도 비슷하다. 수행자들이 지키고 따라야 할 권위 있는 법칙이라는 뜻이다. 선의 가르침은 이처럼 선지식의 권위로부터, 선지식의 권위를 믿고 따르는 신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리무중의 표현이나 파격적인 발상은 수행자들을 자극하여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법어의 형식 안에는 이처럼 가르침을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 담겨 있다.

현대인들에게 이런 형식은 매우 낯선 형식이다. 형식을 떠나 한문 투의 노래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말장난 같은 착어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중간 중간 인용하는 선사들의 일화는 그래도 좀 알아들을 법도 하지만, 여러 차례 비슷한 일화들을 반복하다 보면, 지루하기도 하고 도대체 왜 옛날, 그것도 우리나라 스님도 아닌 중국 스님들의 일화를 반복해서 이야기하는지 어리둥절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형식의 법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구태의연하다고 불평을 한다. 조리 있고 체계적인 법문을 기대한다. 재미있고 알기 쉬운 법어를 바란다. 법어나 법문도 현대인들을 위해 현대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어쨌든 법어도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세간, 출세간을 떠나 다를 바가 없다.

언어를 통해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규칙과 형식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소통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서는 언어적인 규칙과 형식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고칙에 대한 송이나 평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형식은 선문의 오래된 전통이다. 전통이 깊은 만큼 선적인 법어의 경우, 이 같은 형식을 따르는 편이 가장 손쉽고, 설득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다. 선 수행을 하는 경우, 선의 특성상 직 간접적으로 과거 수행자들의 어록에 접하는 기회가 많다. 전통적인 어록들은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해도 역시 특정한 형식과 편제를 따르고 있다. 어록을 읽기 위해서는 이러한 형식과 편제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형식이나 편제는 어록의 이해를 위한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수시를 통해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문제에 관련된 고칙을 제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논지를 전개해가는 전통적인 형식은 매우 강력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이 같은 법어 형식이 낯설게 여겨지는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이런 형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형식의 전통이 흐트러져 들쭉날쭉이 되어 버린 것에도 원인이 있다. 왜 그 자리에 그 말이 있어야 하는지 까닭을 모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법어는 논설문이나 수필 따위의 형식이 아니다. 수행을 전제로 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말이다. 수행이나 깨달음을 전제로 듣거나 읽어야 한다.

이처럼 선사들의 법어를 듣거나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법어의 형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범어사 설선대법회의 경우, 법어를 채록하여 인터넷으로. 지상으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제공을 하고 있다.

법어의 가르침으로 바로 들어가기에 앞서, 법어의 형식을 눈 여겨 보아 두는 것도 법어를 읽는 좋은 방편이라고 하겠다.
오윤희 편집위원 |
2005-05-06 오후 9:07:00
 
한마디
아직까진 가장 수승해 간화선
(2005-05-09 오후 10:45:42)
65
선지식의 권위만 믿고 따르다가는 일생을 망치는 수가 있다. 사이비, 타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긴 공안의 문제에서는 다르지만 말이다. 종교에서 함부로 권위를 말할 것은 못된다. 종교적 허울이 권위에 의해서 후세들에게 기가 막히게 드리워져 헤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2005-05-07 오후 4:01:37)
66
역대 선객들이 인정한다는 것. 이를 두고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선문답이 추구하는 원래 의미를 벗어나고, 어거지가 되어버린다.
(2005-05-07 오후 3:34:24)
59
공안은 권위나 부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깨달음의 핵심적인 문제가 바르게 설하여졌기에 역대 선객들이 이를 인정한 것이고, 또한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2005-05-07 오후 3:28:13)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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