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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해 줄 사람도 없이 서울에 가서 항암치료를 마치고 9개월 만에 내려오니 살림살이는 엉망이었고 우울증은 더욱 심해져 있었다. 더구나 독한 항암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몸의 기능도 많이 저하돼있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난 것이 한약이었다. 그러나 ‘암환자는 한약을 먹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서 망설이다가 ‘어차피 죽을 것 먹어나보자’고 결심하고서 한 재를 주문했다. 한 봉지 한 봉지 먹을 때마다 몸의 기능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우울증도 점차 나아졌다. 그러나 ‘남편이 도와주면 살 것 같은’ 마음에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할 때마다 섭섭함만 더해져갔다.
의사는 2년 6개월 정도 살 가능성도 30%가 안된다고 했다. 남편도 이미 포기상태인 것 같았다. 나는 죽을 것 같아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남편이 예사로 생각하는 모습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만 신경 쓰게 되지 아이들 아버지에겐 베풀 것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죽음 앞에 서게 되니까 갑자기 참회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4살, 2살 된 사내 아이 둘의 원래 모친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웃집 아주머니께 사정을 들은 나는 너무 딱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아니면 누가 키우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내 나이 27살에 입양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친정에서는 당연히 반대를 했다. 나 또한 내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충분한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아이를 낳았다가 차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어진 아이 둘을 잘 키우겠다’는 발원을 세웠다. 그리고 소파수술을 하면서 복강수술도 함께했다. 몸이 아플 때마다 ‘남들한테 뒤지지 않게 키우겠다’고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운수사 부처님 앞에 앉아 그런 생각들까지 들자 ‘그러고도 모자라서 참회의 눈물까지 흘려야 하다니’라는 마음이 슬며시 들면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숨이 끊어질듯 몸이 아파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장 마음을 고쳐먹고 ‘내가 무조건 잘못 생각한 것이다’라고 부처님 앞에서 참회했다.
한참을 부처님 앞에서 눈물을 쏟고 나니 마음이 텅 비면서 편안해지고 어둡던 마음도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나는 30년 넘는 우울증과 암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서 교회에 가면 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잠깐 방황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에도 교회가 내게 안 맞는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몸이 너무 힘들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나는 부처님께 ‘부처님, 그래도 힘이 들면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굳은 마음으로 예불책을 돌려주기 위해 법당을 나서 종무소를 찾았다. 종무소에는 스님 한 분이 외국인 아이 팔을 다정스레 잡고, 벌레에 물린 상처를 치료해주다가 나를 보고는 천천히 일어나셨다.
내가 “스님, 저는 절에 다닌 지가 18년이 다되어 가는데 아무 것도 모르겠고, 이제 곧 죽을 것 같아서 예불책을 돌려드리고 교회에 가려고 합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스님은 가만히 생각하다 입을 여셨다.
“18년이나 다녔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시니, 불교대학을 다녀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늘 마침 불교대학 강의가 있으니 시간 있으면 올라와서 들으세요.”
스님은 간결히 대답하시곤 다른 스님께 무엇인가를 부탁하더니 요사채로 들어가셨다. 이상하게도 그 스님의 말씀이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계시던 다른 스님께서는 “기도를 열흘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기도 할 줄 모릅니다”라고 하니까 “108 염주 갖고 하나씩 돌리면서 절을 하세요”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셨다. 또 “집에서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3~7번씩 읽으라”고 하셨지만 금방 죽을 것 같은 사람의 눈에 글씨가 들어올 리 만무했다.
나는 그 동안 천수경·반야심경도 제목만 알았지 내용은 어떤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스님들의 말씀을 듣고, ‘아무래도 다니던 곳에서 무엇을 찾아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부할 결심을 세웠다. 함께 사찰에 왔던 남편을 먼저 보내고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가 큰 법당으로 갔다. 불교대학 강의 장소라는 큰 법당은 불자들로 꽉 차 있어서 주눅이 들었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데 아까 그 스님께서 들어오셨다. 스님은 “어느 보살님이 절에 다닌지 18년 됐는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서 시간 있으면 수업을 들으러 오라고 했다”며 “그런데 올라왔나 모르겠네”라고 말씀하시며 주변을 둘러보셨다. 나를 발견하신 스님께서는 “식구가 늘면 제일 먼저 입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말씀하시며 ‘인연’에 대한 설명, 비구·비구니 스님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에 대한 이야기 등을 해주셨다.
점점 어려운 개념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부처님을 바라보는 자세도 삐딱해질 무렵,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날 때까지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닦을 생각조차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시간여를 그렇게 울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을 닦아내고 스스로에게 ‘왜 이렇게 울고 있나’라고 물어보자 예전에 내 자신이 안 울고 억눌러 오던 것들이 스르륵 풀리면서 내 자신을 측은하고 안쓰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올라온 것임을 알게 됐다. 나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것, 나를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울지 못했던 내 자신의 마음속에 맺혔던 것들이 살아서 풀린 것이다. 이런 맺힌 것을 풀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천도재를 지내주고 나서야 극락왕생을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그제 서야 들었다.
강의가 끝나자 스님께서는 강의내용이 담긴 종이를 나눠주시고는 수강생들이 돌아갈 때까지 뒷모습을 배웅하며 일일이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셨다. 정말 친절하신 스님이라는 생각이 들며 ‘꼭 다시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다음 날 힘든 몸을 이끌고 겨우 법당에 갔는데 수능시험 기도 때문에 대웅전이 꽉 차 있는 것을 보고는 큰 법당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관세음보살 앞에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지금 죽을 것 같아요, 살려 주세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108배를 시작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와서 남편에게 3배를 하자 남편이 깜짝 놀라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스님께서 하라고 하시기에 이렇게 했지요”라고 하자 싫지는 않은지 피식 웃었다. 스님께 당시 부부사이가 안 좋다고 말씀드려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