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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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참마음 바로 알고 사는 것이 선의 삶"
설선대법회 지상중계<6>-지환 스님(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은 "어려운 일이 있어도 활기 있게 살면 웬만한 장애물은 극복된다"며 "이것이 참선수행을 할 수 있는 반야행을 닦는 기초"라고 법문했다.


보리자성(菩提自性)이 본자청정(本自淸淨)하니 단용차심(但用此心)하면 직료성불(直了成佛)하리라.

이 한마디 속에 불교의 대의와 선의 삶이 다 들어 있습니다. 보리자성은 깨달음의 성품자리, 참마음자리를 말합니다. 참마음은 도를 닦고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청정합니다. 모든 번뇌망상과 자아의식이 텅 비어 버린 그러한 성품자리를 말합니다. 이렇게 텅 비었지만 일체 공능이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텅 비었다고 하는 부정 가운데 일체 공능이 구족되어 있는, 전체를 살려내는 긍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참마음으로 살게 되면 곧바로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이 단용차심 직료성불입니다. 먼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깨달음의 삶, 부처의 삶, 자유자재한 해탈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본래 모습인 참마음만 바로 알고 살면 이것이 바로 선의 삶이예요.

(죽비를 들고)이것 보입니까? (대중이 예라고 대답하자 죽비를 치고) 이 소리가 들립니까? (대중이 예라고 대답) 이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면 다 된 것입니다. 본다고 하는 작용 속에는 온 우주법계가 총 동원돼서 보는 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고 하는 작용은 온 우주법계가 총 동원되어 연기작용으로 보는 어마어마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내가 죽비를 본다’고 생각하면 보는 ‘나’와 죽비라고 하는 ‘대상’이 설정되어 주관과 객관이 나뉘고 맙니다. 이 ‘나’ 속에는 내가 그동안에 살아오면서 아뢰야식 속에 축적된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 경험 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있고 모든 업기운들이 개입이 되어서 좋은 것은 취하려고 하고 싫은 것은 배척하게 됩니다. 이는 갈등이 되어 수많은 괴로움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괴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괴로움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괴로움이 왜 생기는가를 통찰해서 괴로움을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괴로움이라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일 뿐입니다.

나를 잘못 보아 이것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데서 이 괴로움이 생기는거예요. 나의 정체가 공(空)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괴로움은 싹 사라집니다. 수행의 목표는 참마음을 깨닫는 일이죠. 이 참마음을 깨쳐 괴로움을 해결하고,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는 수행의 목표, 삶의 좌표가 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참마음을 확실하게 깨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한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 수 없어요.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는 모습.


수행의 목표, 삶의 좌표가 확립되지 않으면 열심히 수행할 수 없고 진실 되게 살 수 없으며 꾸준하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의 목표. 수행의 좌표가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되는 불자들은 강의나 법문을 듣고 열심히 공부해서 확고한 믿음이 생기고 발심이 된 연후에 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야안목과 반야삼매, 반야행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반야안목, 진정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불교를 배우고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반야안목, 즉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갖는 일입니다. 만약 반야안목을 갖게 되면, 생사에 자유자재하며 가고 머무름에도 자유롭고, 대조화와 절대평안, 참 행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구족하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절대평화와 대자유를 얻는 해탈의 삶, 참다운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수행자가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데 있습니다.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믿고, 밖에서 찾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처인데 뭘 밖에서 찾는단 말입니까. 이 믿음이 서지 않으면 참선 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이 의미 없는 거예요.

임제선사는 “스스로를 믿고 밖으로 찾지 말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너의 한 생각 마음위에 청정한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법신불이요,
너의 한 생각 마음위에 분별없는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보신물이며,
너의 한 생각 마음위에 차별없는 광명, 이것이 네 자신 속의 화신불이니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참마음이 참부처라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서야 참선이 됩니다.

흙탕물을 상상해 보십시오. 흙탕물에는 맑은 물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대중들 있어요) 그렇습니다. 맑은 물이 있습니다. 맑은 물은 흙탕물이 가라앉은 후에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흙탕물인 상태에도 있다는 말이예요. 흙탕 같은 번뇌망상을 일으키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해도 맑은 물 같은 참마음은 여여한 것입니다. 흙탕물의 비유에서 흙탕물을 떠나 맑은 물이 따로 있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이 보고 듣는 이 일상의 마음에 참마음의 묘용이 여여하다는 이 도리를 믿어야 합니다. 믿어야만 참선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반야삼매, 정혜일체, 지관등지가 되도록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번뇌망상입니다. 그러면 번뇌망상을 어떻게 비워버릴 것인가. 번뇌망상을 비운다는 것은 선의 삶이 아니라 선수행의 차원으로 내려온 거예요.

수행의 초점은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텅 빈 진여, 참마음만 있을 뿐 비울 것도 없는 것을 확실하게 알면 됩니다. 번뇌망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원인은 내가 있다고 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임을 명심하세요. 있지도 않은 번뇌망상을 어떻게 해야 비울 수 있을까요? 마치 꿈에서 깨면 꿈의 내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있지도 않은 번뇌망상을 인정하고 속으면서 끌려다니고 있는 걸 안다면, 분발심을 내야 합니다.

화두만 잘 들면 분별망상은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화두의심에는 분별망상이 붙을 수가 없어요. 마치 불덩이가 활활 타고 있으면 그 불덩이 앞에서는 벌이니 나비니 참새니 다 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화두의심만 간절하게 일어나면 번뇌망상이 그 순간에 작동을 못합니다. 번뇌망상이 들어올 수가 없는거예요.


지환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는 재가불자들.


화두의심을 잘 들고 있으면 선정과 지혜가 그 속에 함께 있어요. 그것이 올바른 수행입니다. 지혜를 따로 닦고 선정을 따로 닦는 게 아닙니다. 선정 속에 지혜가 있고 지혜 속에 선정이 있는 것이 화두삼매입니다. 선정과 지혜는 불과 불빛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불이 선정이라면 불빛은 지혜입니다.

셋째는 반야행, 생명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참다운 수행은 반야안목, 반야삼매, 반야행, 이 셋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입니다. 반야안목을 갖추고 있으면 반야삼매가 그 속에 있습니다. 이때에는 스스로 참생명의 모습으로 반야행을 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반야행의 첫걸음은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무아행을 해야 합니다. 행복하려면 나를 비워야 됩니다. 내가 드러나면 반드시 대립이 있기 마련입니다. 나라는 것이 있으면 네가 있게 되고 네가 있으면 내가 있게 되니까 대립이 생겨 조화가 깨집니다. 참다운 행복을 위해서 나를 비워야 됩니다.
반야행의 첫걸음은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으면 주더라도 상을 내게 됩니다. 나를 비우면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듯이 내 생명의 자비한 기운으로 주게 돼 있어요. 생명에는 자비의 힘이 있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주는거에요. 내가 비워지면 동체가 되는 겁니다.

가정이 수행공동체, 동체적인 관계가 되어 나와 내 가족은 하나의 삶의 터전에서 조화롭게 머무른바 없이 그저 베풀어야 합니다. 남편한테 아내한테 자식한테, 그리고 좀 범위를 넓혀 이웃한테 상에 머물지 않고 베푸는 연습을 하다 보면 내 마음이 무한히 넓어지고 (해탈의 장이 열리고) 내 마음이 참마음의 흐름으로 흐르게 되어 행복을 느끼고 자유를 느끼고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수행을 하세요. 사랑은 엄청나게 좋은 수행법입니다. 사랑을 수행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멋지게 사랑하며 사세요. 멋진 사랑을 하는 방법은 먼저 상대방 입장에서 서 주어야 가능합니다. 나중에는 나를 비우고 오직 상대만을 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비우고 주는 것이 사랑이지,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까 너도 이렇게 해달라는 것은 거래일뿐입니다.

참생명은 대활(大活)이며 대환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또한 기쁘고 활기있게 사세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활기 있게 살면 웬만한 장애물은 극복됩니다. 이것이 참선수행을 할 수 있는 반야행을 닦는 기초라 할 것입니다.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


지환 스님

1967년 해인사 입산

1969년 범어사에서 광덕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수지

1972년 석암스님 계사 비구계 수지
범어사 선원, 해인총림선원, 덕숭총림선원, 고불총림 운문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참선정진
쌍계사 금당선원장 역임
현 조계종 기본선원장, 동화사 선원장




정리=박봉영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 bypark@buddhapia.com
2005-04-15 오전 1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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