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목이 이상해서 만져보니 큰 혹이 잡혔다. 옆에 있는 신도에게 그 부분을 보였더니 갑상선인 것 같다고 했다. 난 그 나이가 되도록 갑상선이라는 병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날 밤 노스님은 저녁공양을 들지 않았다. 왜 화가 나셨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튿날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5~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또 문을 부수고 짐을 가져가는 행위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옆방 할머니의 도움으로 산속으로 잠적해 버렸다.
이혼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공식적인 행자는 될 수 없었지만 행자로서의 할 일은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100일 기도에 들어갔다. 기도 시작한지 2개월 후 공양주 보살이 하산하는 바람에 정해진 백일기도는 뒷전이었지만 기존의 기도는 졸면서도 놓치지 않고 공양주보살을 대신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묘하게도 백일 되는 날, 몽중가피로 앞으로의 일들을 예견하게 되었다. 그 후 5개월 만에 합의 이혼이 이루어졌다. 2~3개월 후 나는 사찰에서 공식적인 행자로서의 수행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둘째 딸아이의 애절한 울음을 듣고 산속도 세속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 오히려 세속이 자유가 없는 산속보다 더 빨리 하고자 하는 공부를 마칠 수 있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 온지 만 3년이 다 됐다. 24시간이 자유로운 몸이 되고 나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했다. 내 생활은 새벽 3시에 기상해 단지 잠자는 시간과 자원봉사 하는 몇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기도에만 매달리는, 24시간을 물레방아 돌 듯 돌리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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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 시작한지 3~6년이 지난 사이, 환희심이 찰 때마다 우러나오던 ‘부처님 감사합니다’는 소리가 어느새 들어가 버리고 <혜능대사게송>까지 내 것이 되어 돌아와도 물에 물 탄 듯 과거의 환희심이 일지 않았다. 2003년 하안거 때 선방 도반들과 진제 큰스님을 친견할 때 나는 큰 스님께 질문했다.
“큰스님, 깨친 사람도 병이 듭니까?”
큰스님께서는 “들지 않는다”고 말하셨다. 나는 다시 “큰스님, 그럼 부처님은 왜…”라고 물었으나 말도 채 끝나기 전에 상좌스님의 중재로 우리는 그 자리에서 나와야만 했다. 그런데 마당에 나오자마자 그 질문의 요지가 풀려 버렸다.
‘아! 그것이구나.’
그 당시 돈오점수를 주장하던 것에서 ‘큰스님 말씀이 정말 맞구나’라는 것을 알았고, ‘돈오돈수라는 것이 저 것이구나’를 알아챘다. 그리고 5년이 지난 다음에야 ‘98년 갈증이 풀렸던 것이 다 였구나’를 알아냈다. 또한 그 갈증의 늪에서 헤 매이던 그것 자체가 나에게는 화두였었다는 것도 알아버렸다.
얼마 후 둘째 딸아이의 4년제 대학 편입시험을 준비하며 나 역시 더욱 더 정진했을 때, 내게는 한 생각이 떠올랐다.
큰스님의 “큰 스승 아래서 배워야 한다. 성지라도 선지식이 없으면 별 소득이 없다”라는 말씀에 ‘경전이 선지식이고 큰스님이 남기신 글과 육성이 내 스승인데 뭘 저러실까?’라고 생각했던 3~4년 전과는 달리 난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를 이번에는 확연하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여태껏 정말이지 누구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고 부처님에게도 당당할 수 있었지만 내 아이 두 명에게만은 죄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헌데 불현듯 ‘내 아이들이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서 내 자식들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죄인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아! 부처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내게는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지금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미국대통령도 부럽지 않다.
혹자들은 나를 두고 ‘불교에 미쳤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형제들까지도 말이다. 난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다.
“그렇게 미치지 않았다면 난 아직도 고통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불교만이 무명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인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묘법의 도라고 말해 주겠다. 짧은 시간에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다보니 두서없는 글이 되지나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지난날의 일기를 몇 편 모아 첨부해본다.
1998년 4월7일
새벽 3시 잠에서 깼다. 3~4일 높은 열과 견주더니 기어이….
힘없는 얼굴에 입을 맞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 혜선아! 왠지 불길한 너의 머리를 만져 빗어본다. 액체는 얼굴을 가리고, 5시쯤일까. 왜 그다지도 잠이 쏟아지는지 “선아, 엄마 잔다. 너도 자렴”하고 말했다.
선잠에서 묘한 꿈을 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는 시작됐다. 아침 식사 후 설거지를 할 때 너의 긴 숨 쉬는 소리에 방문을 열고 보았지. 그것이 마지막인줄도 모르고 이 멍청이 엄마는 또 설거지를 하러갔다. 다 끝내고 방에 들어와서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름답게, 곱게,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너의 모습.
‘아! 혜선아, 이 엄마는 어쩌면 좋으니?’
1998년 4월 10일
사랑하는 내 딸 혜선아.
지금 이 순간 하늘이 높은지 땅이 넓은지 바다가 깊은지 도저히 분간이 안 되는구나, 혜선아!
희뿌연 안개를 잡으려고 몸부림치듯 이 엄마 너의 망상에서 헤엄치고 있단다.
혜선아! 하늘 바라보며 목 놓아 목의 힘줄 튕겨 봐도 가슴 저 밑바닥 붉은 색 바래짐에 숨 죽여 봐도 이 메어짐을 삼키지는 못하는구나. 선아! 선아! 선아!
1998년 9월2일
깨달음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진리의 궤도를 3바퀴 돌아야 된다는 말이 있다. 첫 번째는 1차원, 즉 앎으로써 우주를 관찰하는 것이고, 둘째는 수행정진으로서 자신과 남을 다스릴 수 있을 정도의 원력이 쌓이는 것이고, 셋째는 원(圓)이라고 한다. 업이 다 녹여져서 명경지수, 즉 깨끗한 본성으로 돌아온 것을 지혜의 완성이라고도, 성불이라고도, 해탈이라고도, 무념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깨달은 이와 범부의 차이는 같은 길을 가면서도 우주의 이치를 알면서 가는 가에 달려 있다. 깨달은 이는 알고 가니 밝고 편안할 것이며 범부는 어둡고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이치를 깨달은 이는 느낄 것이고 범부는 그것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해탈.
다겁생 업 녹여서 지혜 받아 가져지고
무명중생 자비하여 진리의 불 밝혀서
자연으로 돌아가 세세생생 일심이어라.
1999년 5월5일
해탈과 성불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내게만은 그 개념자체가 조금 다르다고 해야겠다.
난 성불하기 위해서 기도를 한 것이 아니고 해탈을 꿈꾸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중생을 건지고 부처가 되기 위해서 불교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내 고통이 무거워서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선택했으며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었을 뿐이다. 소승이라고도, 아라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 들어가다 보니 대승불교 쪽으로 기울어지게끔 의도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그 높고 어려운 길은 수평도 계단도 아닌 완전 수직의 길이었다. 그 길은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세인이 말하는 “하늘이 준 복”까지도 실은 자기가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알면 이 세상 자체는 바로 극락세계가 될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기에 말이다. 물론 믿음이 전제된 조건하에서겠지만 말이다. 내가 말하는 믿음이란 불교를 믿는 그 마음도 되겠지만, 요는 불교의 지혜를 터득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2002년 7월 24일
맑아진 가을하늘처럼 오랜만에 마음을 열어본다.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곳이고 세상에 행·불행은 없다는 것, 그것이 어느 만큼이든지 사는 동안 충실하게 살면 그 사람은 책임 완수를 다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 문득 느껴진다.
내 딸 혜선이가 18세를 살고 간 것, 내가 인연이 다 되어 이혼을 한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이다. 그 행복을 갖기 위해 모든 방편을 동원한다. 그리고 그 행복이라는 것의 개념 자체는 그 사람 개개인의 근기에 따라 결국은 하나이다. 그렇다면 굳이 출가만이 상책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 어느 곳에서든 깨달아서 생활해가면 인간과 하늘의 복전인 것이다. 그리고 행복의 길로만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자신의 생각에 달린 몫이다.
2004년 3월 어느날
요즘 나에게 일어나는 꿈과 현상은 내 주위의 전생 한 부분 부분들이다. 7년 전부터 계속 조금씩은 알았지만 요즘처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일을 알 수는 없었다. 이 체험으로 인해서 현실적으로 인과가 있다는 것, 중생은 진화한다는 것, 불교는 대단한 파워가 있는 묘법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없지만 있는 그것을 녹여야 되고
텅비었지만 꽉 차있는 그것을 다듬어야 하고
그리고 붉은 해는 서산에 걸터앉아 있음이다.
일체중생 발보리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