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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은 ‘열반의 산’에 오르는 탄탄한 발(戒足)이다. 이 발을 튼튼하게 하는 지계의 요체는 모든 악행을 그치고(止惡) 선을 행해(行善) 자기를 극복하고 남을 이롭게(克己利他) 하는 것이다.”
해인사 율원장 혜능 스님은 4월 3일 조계사(주지 원담)와 불교신문사(사장 향적)가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한 기획법회 ‘한국불교 미래를 듣는다’에서 계율수행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스님은 ‘현대사회에서의 계율’을 주제로 한 이날 법문에서 “우리 주변에는 근본이 되는 지계는 등한히 하며 결과인 깨달음만 구하는 깨달음 지상주의에 빠진 수행자가 많다”며 “계행이 없이 얻어진 ‘삿된 정(邪定)’과 바른 선정 없이 얻어진 악혜(惡慧)로는 열반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능엄경>의 ‘인계생정, 인정발혜(因戒生定因定發慧:계로 인해 선정이 생기고, 선정을 인해 지혜가 생긴다)’ 경구를 인용하며 “올바른 수행자는 계정혜 삼학을 함께 닦아야 ‘열반의 산’에 이를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스님은 특히 현대인들이 계율을 지키지 못한 이유에 대해 “훼계를 유도하는 환경적 유혹, 번뇌의 치성, 나약한 지계심에 있다”며 “크게 발심해 한 가지 계목이라도 온전히 지켜 해탈의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스님은 또 계율수행의 구체적 행법에 대해 ‘수계와 참회’가 그 핵심이라고 법문했다. 계율을 잘 지키려면, 먼저 잘못에 대한 ‘참괴심(부끄러운 마음)’을 먼저 갖고 본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스님은 육근의 단속, 음양(飮糧:음식의 양)의 조절, 지족의 자세, 늘 깨어 있는 삶 유지 등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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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율원장 혜능 스님의 법문 전문
오늘 법문의 주제는 '현대사회에서의 계율'이다. 계율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어떤 의미인가. 먼저 우리는 계율이라 하면 타율적이거나 명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시켜서 마지못해 따라하는 것으로 여긴다. 또 계율을 그런 형식적인 내용이나 덕목으로 생각한다. 때문에 계율은 귀찮거나 불편하거나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 계율을 잘 지키는 삶은 무엇인가. 보통 이를 ‘범행(梵行:브라흐마차리야)’이라 번역한다. 청정한 삶, 맑은 삶이란 뜻이다. 그 삶을 사는 것이 지계의 내용이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청정하고 맑은 삶을 산다는 의미다. 계를 지키지 싫다고 하는 것은 청정하고 맑은 삶을 살기 싫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된다. 우리는 저마다 수행과 기도를 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위해 수행과 기도, 법문을 듣는 것인가? 우리는 훌륭한 스님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중에 극락에 가보면 여러분들의 귀만 극락에 둥둥 떠다닐지 모른다. 귀로 듣기만 했지, 본인이 청정한 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행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청정하고 맑은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다른 말로 한다면 열반을 증득하는 일이다. 열반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수행하는 이유다. 수행의 목표는 열반에 있다.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열반을 얻는 길,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거기에는 누가 가야 하는가. 나 스스로 찾아서 가는 해탈의 세계다. 스님과 재가자들이 수행하고 정진하는 이유가 열반을 얻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것을 요원하게 생각한다. 열반이 어떤 세계인가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불자들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 ‘극락’이라는 말이다. 극락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이상이다. 다른 말로 ‘열반’이라 한다. 극락세계에는 아미타 부처님이 계신다. ‘아미타’란 말은 ‘영원한 생명’이란 말이다. 그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원한 삶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덧없고 변해하고 흘러간다고 했다. 그 무상함 속에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참마음 · 자성(自性) · 불성(佛性) 밖에 없다. 이것들은 태어나도 따라 태어나지 않고, 죽어도 따라 죽는 것이 아니다. 생사와 무관한 우리의 참마음 불성 자성뿐이다. 이를 한문으로 말한다면, 그 영원한 생명은 무량수(無量壽)라 한다. 무량수란 말은 영원한 생명이란 뜻이다. 생명은 단 하나이고 일회성이다. 우리에게 주어준 이 생명 이 목숨은 단 하나다. 그런데 이 생명이 영원한 목숨이라면, 그 영원한 생명을 무량수라 하는 것이며, 그것을 인도말로 ‘아미타’라 한다. 이 아미타라는 말은 무량수란 말이고 영원한 생명이란 뜻이다.
우리의 자성과 참마음은 햇빛보다 더 밝은 것이다. 오탁(五濁)의 더러움에 담겨도 참마음은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그 밝고 맑은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빛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마음이다. 한없이 밝은 이 마음을 무량광(無量光)이라 한다. 이 말을 범어로 아미타라 한다. 영원한 생명이다. 그림자가 없는 무량한 빛이다. 그림자가 없는 빛, 그 무량한 빛이 이미타고 우리의 참마음이다. 그 참마음의 근본 자리가 바로 극락이란 말이다. 이 우주법계에 그처럼 무량한 빛을 지닌 존재가 어디에 있겠는가. 여러분의 자성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기쁨이 충만한 삶이다. 근심 걱정 없이 무량한 기쁨으로 충만한 나라를 그 국토를 극락이라 한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니르바나’라고 한다. 극락세계란 곧 열반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 부처님은 오직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만을 설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우리로 하여금 그 열반에, 극락에 왕생하는 길을 일러주신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이 근기에 따라 독경 주력 참선 사경 등을 하면서 어떤 수행정진을 하든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점은 열반(니르바나)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도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이란 원을 세웠다. ‘원컨대 제가 원적의 산에 속히 올라가지이다’는 말이다. 원적이란 말은 열반이다. 적멸이라고 한다. 고요하고 고요하다. 모든 번뇌의 파도가 잠잠하고 고요하다는 뜻이다. 열반을 번역하면 불이 꺼졌다(吹消·吹滅)는 말이다. 그것을 산에 비유한 것이다. 열반의 산에 올라 살고 싶다는 원이다. 부처님에게 염불하고 절하며 경을 읽는 공덕은 삼천대천세계를 다 덮고 남는다고 했다. 우리는 한 번 예경하고 염주 한 알 굴리고 사경 한 페이지 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삼세의 업을 녹이는 큰 공덕이자 해탈 열반을 얻게 하는 불사다. 얼마나 귀한 일을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이가 전단향 나무 덩어리를 얻었다. 그 향은 아주 값비싸고 향기가 그윽한 것이라 이 법당에 조금만 떼 사르면 미묘한 향기가 온 법당을 채운다. 그런 전단향 나무 덩어리를 얻었다. 그것을 시장에 팔려고 갔다. 너무 비싼 나무라서 팔리지 않았다.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옆에 숯을 파는 사람은 한 나절에 다 팔고 또 집에 가서 더 가져와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전단향나무를 팔러 온 사람도 그 비싼 전단향나무를 태워 숯을 만들어 오니 금방 팔리더라는 것이다. 그 어리석은 사람은 진작 숯을 만들어서 팔껄 하며 후회를 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한 것이 잘한 일까? 그 비싼 것을 태워 숯으로 팔았으니 말이다. 불자님도 지금 그 전단향을 숯으로 만들어 팔려는 짓을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열반을 얻기 위해서다. 절 한번 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것도 성불한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들의 행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열반에 이르는 큰 길이고 수행이다. 그런데도 그 귀한 공부와 수행을 하면서도 ‘원하조등원적산’을 하지 않는다. ‘우리 집에 장사 잘 되고, 몸 건강히 해주며,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 한다. 이것은 무량하고 수승한 공덕들이 있는 그 수행의 값어치를 떨어트려 숯으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다. 그 귀중한 원력들을 ‘승진, 건강, 부의 축척’ 등 지금 당장 가지려는 ‘작은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궁극의 목표는 극락에 왕생하는 일이다. 열반 증득하는 일이다. ‘원하조등원적산’이다. 이 사바세계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얼른 원적의 산에 올라 해탈의 삶을 사는 것이다. <아미타경>에서도 “‘극락에 누가 갈 수 있는가. 극락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란 질문에 작은 선근이나 작은 복으로는 왕생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천수경>에서 “원아속득계족도(願我速得戒足道)”란 원이 있다. 이는 해탈 열반을 얻게 하는 계정혜 삼학을 ‘발’에 비유한 말이다. 산에 올라가려면 내 말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올라가야 한다. ‘원적의 산’에 오르려면 계정혜 삼학이란 발이 필요하다. 그 발로써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계율이란 무엇인가? 바로 발과 같다. 해탈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발이 계율이다. 계율은 ‘나는 이것을 하고 싶은 데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 말라 하니 마지못해 하는 척이라도 해야 겠다’는 것이 계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열반에 이끌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고 첫걸음이 된다는 것이다. 계행을 지키지 않고는 열반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작은 선근이나 복덕의 인연으로는 극락에 왕생하지 못한다. 큰 선근이나 큰 복이란 무엇인가? <법화경>에서는 “산란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한 마디만 찬탄해도 성불한다”고 말한다. 그럼 어떤 복을 지어야 극락에 왕생하고, 성불할 수 있는가. 큰 복이란 바로 계행이다. 계를 지키는 일이다. 살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도둑질을 하지 않고 사음을 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등 그런 맑고 향기로운 청정한 삶이 큰 복이고 큰 인연이란 뜻이다. 그런 계행의 발로 원적의 산을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행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원이 열반과 극락왕생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발심하고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에 대한 자각이다. ‘여기가 고통이구나. 고통스럽다’는 그 고에 대한 자각으로 윤회의 삶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극락왕생과 열반을 증득하려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생노병사 등의 괴로움을 처절하게 자각하고 두려워할 때, 괴로움에 벗어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괴로움이 다한 삶을 희구하고 갈망하며 그런 진리를 찾아가려는 마음을 우리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윤회의 괴로움에 대한 자각하고 그 괴로움을 소멸하려는 큰마음을 낼 때 열반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계를 받음으로써 불자가 되는 것이고 그런 불자의 삶을 살 때, 해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계들을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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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의 계율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스님이 훈련소 1천여 훈련병에게 수계식을 하기 전에 “오계 중에 술을 마시지 말라 했는데, 이 가운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자, 단 2명만이 술을 안 마신다고 손을 들었다고 했다. “왜 술을 마시지 않느냐”고 되묻자, “계를 받았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아니고, 몸에 안 좋아서 또 체질상에 맞지 않아 술을 못 마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이 스님이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 술 안 마시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지금 불음주계를 줘봐야 지킬 사람이 없는데, 이런 계를 줘서 무엇 하겠는가”해서 오계수계를 안 하고, 불음주계가 없는 십선계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스님은 “요즘 사회에 불음주계를 필요가 없지 않는가. 차라리 그 계를 주지 말고 다른 것을 줘서 불자로 만들든지, 술을 마시더라도 취하지 않을 정도 마시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 현대사회에서 계율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계를 상황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인가. 계와 율은 다르다. 계는 경건한 생활이나 좋은 생활습관을 말한다. 윤리도덕과 같은 것이다. 율은 법률과 같다. 승단의 청정과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들을 율이라 한다. 국가에 헌법이 있듯이 승단 유지의 규칙이 율이다. 계라 하지 않는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도덕 양심이라 한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내용인이다. 이것을 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계는 ‘이고득락(離苦得樂:고를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다)’하게 한다. 즉 모든 악행을 그치고(止惡) 선을 행해(行善) 자기를 극복하고 남을 이익되게 하고 이롭게 하는(克己利他) 것이 계의 내용이다. 그래서 계를 지켜야만 선정이 생긴다. 선정은 섬세하고 고요한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된 상태(心一境性)를 선(禪)이라 한다. 한 곳에 몰입하고 깨어있기 위해 화두를 참구하며 좌선을 하기도 하고, 또 그런 삼매를 얻기 위해 주력이나 염불을 한다. 그런 선정은 계를 지켜야만 생긴다는 것이다.
<능엄경>에서는 ‘인계생정인정발혜(因戒生定因定發慧)’이란 경구가 있다. 즉 ‘계로 인해 선정이 생기고, 선정을 인해 지혜가 발한다’는 말이다. 그런 선정이 생길 때 우리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되는 삼매를 얻고, 그 삼매를 통해 지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선정과 지혜가 무엇인가. 번뇌를 끊고 해탈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 계정혜 삼학이다. 이 계와 선정과 지혜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번뇌와 악업을 제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비나야(律)을 선치(善治), 즉 ‘잘 다스린다’고 말한다. ‘조복한다. 다스린다’고 한다.
그럼 무엇을 다스린다는 것인가. 우리의 업을 다스리는 것이다. 악업을 다스려 선업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계와 율이다. 악업을 그치고 선업을 이뤄 성불하게 된다고 한다면, 이런 법칙과 과정은 과거든 현재 미래든 일관된 내용이다. 과거 칠불, 즉 모든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법문이 있다. 그것이 바로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다. 한 부처님뿐만 아니라 일곱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내린 불법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淨其意) 시제불교(是諸佛敎)’로, ‘무릇 온갖 악을 짓지 말고 착한 일만 행하며 자기의 마음을 맑힘이 불법의 요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계를 지킨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악업을 그치고 선을 행하고, 그리고 자기를 다스리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 이 3가지가 계율수행의 요체다. 이 3가지를 지키는 그 튼튼한 계행의 발로 열반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자님들이 수계하고 불자로서 다짐하고 또 이렇게 열반을 얻기 위해 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 알지만, 우리가 누생에 익혀 온 숙세의 습이나 업은 한 순간에 소멸시킬 수가 없다. 물론 수계를 해서 계를 온전히 지키겠다는 약속은 정말로 어렵다. 그래서 계를 받고도 금방 돌아서 바로 받은 그 계를 잊거나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런데 한 번 범하고 나면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두 번 세 번 자꾸 계를 범하게 되면 아예 부끄럽다는 생각도 없이 포기해 버리게 된다.
‘나는 이제 안 되는가 보다’ 하고 지계의 삶을 포기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계를 잘 지킬 수 있는가. 계를 지키는데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참괴심’(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청정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란 선과 악이 뭔가를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참괴심을 가지고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우리는 참회라고 한다. 그래서 ‘수계와 참회’, 이 두 가지는 지계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우리가 계를 받는 것은 맑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고 약속이다. 가장 중요한 약속을 일러 ‘오계’라고 한다. 이런 계를 받아 맑고 향기로운 해탈의 삶을 살겠다는 약속에서 불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약속은 지키는데 의미가 있다. 약속만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미 약속이 아니다. 그런데 계를 받아 어겼을 때, 그것을 덮어두거나 자기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부끄럽게 생각하고 뉘우치며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바로 참회다.
늘 참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계행을 잘 지키지는 모습이 된다. 참회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참회를 함으로써 우리는 청정하고 맑게 거듭 태어나게 된다. 청정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계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5가지 방법이 있다.
물론 수계와 참회를 통해 다시 청정을 회복하지만, 계를 맑게 하는 방법은 첫째는 우리 육근(六根)을 잘 단속해야 한다. 육근은 늘 밖으로 마음대로 나 다니려고 한다. 눈과 귀 등의 육근을 잘 다스리면서 부처님과 이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다.
둘째는 음량(飮糧) 즉 ‘음식의 양’을 잘 알아야 한다. 자기가 먹을 음식을 획득하기 위해 온갖 업을 짓게 된다. 음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온갖 번뇌와 갈등이 생긴다. 음식의 양을 안다는 것은 스님들의 발우로 설명할 수 있다. 범어 발다라를 ‘응량기(應量器)’라고 한다. 즉 양에 맞는 그릇이라는 뜻이다. 가령 발우공양은 발우에 자기가 먹을 만큼의 음식을 담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식사방법이다. 항상 음식의 양을 아는 것, 이것이 계를 범하지 않고 계를 잘 지키는 방법이 된다.
셋째는 ‘늘 깨어있는 일’이다. 늘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이 두 가지를 똑똑하게 분간하면서 고고하게 걸어가야 한다. 계를 2가지로 나눠 보면, ‘무엇을 하라’는 계(作持戒)와 ‘하지 말라’는 계(止持戒)가 있다. 우리들은 ‘하지 말라’는 계만 늘 들어왔기 때문에 계를 명령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하라고 권장하는 행선의 의미를 더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늘 알고 있어야 한다. 부처님이 이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는가를 명확히 뚜렷이 알아차리고,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넷째는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물질에 대해 지족해야 한다. 물론 만족이란 것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만족하지 않을 때 우리는 늘 허둥대면서 더 많은 것을 획득하려 하다보니 많은 악업을 짓게 된다. 그래서 계행이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음식의 양 등 앞에 세 가지를 늘 염두 해야 한다.
마지막은 마음을 세속의 여러 가지 일에 매이지 말고, 늘 전심으로 불법을 구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계행을 청정하게 만든다. 오로지 밝고 맑은 고요한 부처님의 말씀만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면 모든 번뇌와 악업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가장 필요한 오계란 약속들을 받고 불자로서 삶을 살지만, 정작 그 오계를 명령과 제약, 억압하는 내용으로 생각한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 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삶을 살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혜 없이 해탈의 삶을 살 수 없다. 범행으로 맑고 향기롭게 사는 모습을 다섯 가지 범주로 제시한 것이 오계다. 모든 생명은 귀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남을 헤치지 않는 생활 등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불자라고 말한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덕목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불자라면 이 5가지 덕성을 온전히 다 갖춰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근기가 모자라고 업이 두텁고 거칠어, 이 5가지 계를 다 지킬 수 없다면 근기에 따라 한 가지 계목이라고 받아 지켜야 한다. 다 지키고 많이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 한 가지라도 온전히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계는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장>에서는 ‘오계분수(五戒分受)’라는 말이 있다. 즉 오계를 받을 때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만 받으라는 것이다. 한 가지 계목이라도 잘 지키라는 말이다. 한 가지만이라도 받으면 그 한 가지로써 악업에 벗어날 수 있다고 해서 계를 ‘별해탈(別解脫)’이라 한다. 한 가지 계목이라도 잘 지키면, 그 악업에서 해탈을 얻게 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여 살벌하고 각박해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선정과 지혜이다. 선정과 지혜는 청정한 도덕적인 윤리의식에서 생겨난다. 선정과 지혜가 해탈로 이끄는 가장 지름길이지만, 그 선정과 지혜가 생기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계행이다. 남의 다리와 발이 아니고, 나 자신의 계족(戒足)이다.
내 계의 발이 튼튼할 때 깨달음의 보배가 있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염불 참선 독경 등 여러 가지 수행을 한다. 그 수행에는 무량한 복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특히 그 수행의 가치가 헛되게 또는 중생스럽게 하면 안 된다. 그 수행에다 작은 것으로 승부를 걸지 말고, ‘생사해탈’을 걸어야 한다. 그 수행을 앞서 말한 전단향을 쉽게 돈벌려고 불에 태워 숯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내 욕심을 채우려는 도구로 생각하지 말라. 부처님은 해탈열반의 세계로 인도해주시는 인도자다. 그런 부처님께 예경을 드리면서 부처님이 내 욕심을 채워주는 그런 장사꾼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부처님과 거래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반드시 계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계행이 있어야만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58가지의 보살계(10重 48輕戒)를 다 지켜도 되겠지만 그 중에 한 가지라도, 또 보살계를 줄인 모든 계의 총체 십선계 중 한 가지라도, 더 줄여 오계 중 한 가지, 또는 삼귀의 중에 한 가지라도, 그 한 가지를 지킴으로써 ‘나는 악업에서 벗어난다.
내 업이 맑아지고 악업이 가벼워지고 그래서 선을 행해 궁극에는 열반을 증득한다’는 계행을 해야 한다. 계행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환경적 유혹이다. 우리 주변의 여건과 환경이 계를 지키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런 환경과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악영향에서 계를 범하게 되는 예가 많다. 둘째는 번뇌의 충동력이다. 자기 업이 두텁고 내 번뇌가 치성해서 부처님과 약속은 했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나약한 지계심이다. 환경이 열악하고 자기 번뇌가 치성하며 계를 지켜야 겠다는 의지가 나약한 사람들이 계를 지키지 못한다. 이런 속에서도 우리는 크게 발심해서 자기가 받아 약속한 계 가운데 한 가지 계라도 온전히 지키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은 산다면 우리는 바로 열반의 증득과 극락왕생을 기약할 수 있고, 맑고 향기로운 해탈의 삶을 기약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우리의 번뇌와 고통은 오직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계를 지켜야만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계는 많이 아는 것보다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