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3인 막내 성모가 온다기에 푸줏간을 들렸다. 무심코 주인아주머니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미국대통령이 재선이 되었으니 앞으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무슨말씀이세요? 미국에 선거 있었습니까?”
“네, 어제요.”
“어머! 난 몰랐네. 아주머니, 어제 신문 있으면 보여주시겠어요?”
근 7~8년을 TV와 신문을 보지 않고 오직 불교에만 매달려 있었던 난 미국 대통령 선거일도 몰랐었다는 부끄러움에 신문이라는 매체에 새삼스런 관심을 갖게 됐나보다. 여태껏 어떤 신문이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튿날 공양간에서 날짜지난 신문을 들춰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순간 시선을 멈추게 하는 현대불교신문의 신행수기모집공고문.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고 뭔가를 내놓을만한 자신도 없었기에 간혹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도 흘려버렸는데 이번에는 스스로 마음이 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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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12년 전인 1993년 4월 30일 새벽 3시가 지나서였다 이상한 소리에 놀라 아이들 방으로 가보니 큰 딸 혜선이가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1남 2녀가 있었다. 13세인 혜선이는 6세 때부터 1년에 한번 정도 놀라게 했었다.
이번에는 몇 시간을 소요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원거리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아이들 아빠가 도착하여 병원에 옮길 때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 상태였다. 부산 모병원에 입원하여 MRI촬영 등등이 이어졌다. 그날부터 약 20일간, 의사들의 위급하다는 소리와 함께 6~7번을 대형 산소호흡기가 아이 옆을 지킬 때마다 난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엄마, 이 아이 이대로 혼수상태로 있어도 좋으니 제발 내 곁에 있게 해 주세요”였다.
20일이 지나자 한방에 있던 환자 가족들 간에는 농담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혜선이는 엄마가 와서 울기만 하면 정신이 드는데 뭐”였었다.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 상황에서도 애 아빠와의 사이는 아이가 쓰러지기 전 “이혼하자”는 말이 오갈 단계까지 간 채였다. 나빴던 감정은 여전했다.
한 달이 지나자 병원 측에서는 더 이상 어떤 치료방법도 없고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 퇴원하라는 것이었다. 서울병원으로 가니 받아주지 않았다.
경희의료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는 한 달 정도 지켜보자며 입원을 수락했다. 한 달이 지나자 그곳에서도 별진전이 없다면서 퇴원을 종용했다. 집에 오자 아이는 눈도 뜨고 간혹 웃기도 했다. 이때부터 난 아이들 뒷바라지는 뒷전이었다. 기본적인 엄마의 역할만 하고 가까운 서점을 들락거리는데 분주했다. 업, 인과응보, 등등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비유품>중에는 화살을 맞은 이가 화살을 얼른 빼지 않고 ‘누가 겨냥했을까?’ 등을 물어보다가 숨이 끊어지고 만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난 그때 그 어리석음을 행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성철큰스님 열반소식이 매스미디어를 탔다. 그 당시의 난 큰스님의 법어집은 물론 책장만 지키고 있던 깨알 같은 글체의 책들까지도 불교에 관한건 무조건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했다. 책을 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백련암에서 3천배기도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아이 둘을 동반하고 백련암에 가서 3천배를 했다. 그 뒤 1년 간격으로 드나들며 3번을 더 했다.
나의 마음은 차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불교의 묘미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집 앞 포교당에 들려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하루 천배를 하며 <지장경>을 독송하는 등의 신행생활을 해나갔다. 하루 중에 기도하는 시간이 최하 12시간은 족히 넘었다. 백일기도 중 몽중가피가 있었다. 칼날 같은 바위조각들이 수직으로 치솟은 깊은 산꼭대기에서 나는 그 높은 곳을 떨어 질까봐 덜덜 떨면서 기어오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상에 올랐다. 올라서자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기어올랐던 그 밑을 바라보며 “어휴! 여기를 어떻게 올라왔을까?”라고 말했다.
1996년 동화사 포교당 보현사대구불교대학에 입학했다. 그때에도 나는 몽중 가피가 있어 3~4개월 후에 일어날 일들이 보이고 들리고 했었다. 이때 난 포교사도 포교당을 운영할 수 있다기에 포교사 고시에 응시하여 포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었다.
나의 하루일과는 아이들을 학교 보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집 정리하면 8시, 혜선이 돌보고 곧 절을 300배한 후 2시간동안 기도에 들어간다. 1시간 운동 다녀와서 혜선이를 다시 살펴보고 바로 간경기도에 들어간다. 이 시계추 같은 세월이 5년이 다 되어갈 무렵 혜선이 몸 조짐이 이상했다. 등창도 잘 낫지 않았다.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더니 3~4개월 후 눈을 감았다. 아이가 눈을 감을 당시에도 난 갈증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계속 헤매고 있었다. 혜선이를 49재 지내는 동안에는 5~6시간동안 계속 앉아 기도만 붙잡고 있었다. 기도를 하고 있을 때면 몸에 이상이 오는 느낌도 감지되었건만 ‘죽으면 죽었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이 당시의 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무조건 알아내야만 했다. 그 해탈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아이가 누워 있어도 기도만 하고, 눈을 감아도 기도만 하고 있었다.
혜선이가 눈을 감은지 6개월이 다 되어 갈 무렵, 즉 불교를 공부한지 5년이 조금 지난 1998년 9월 28일에야 그렇게도 목말랐던 갈증이 풀렸다.
‘아! 그것이구나’란 대답이 되어 돌아왔다.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혜선이가 한 없이 보고 싶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알려고! 이것을 알려고 그렇게도 헤매고 헤맸더란 말인가!’
그 당시는 어떤 경전을 보든 그것이 모두 이해됐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허전하기만 했다. 그리고 이상했다. 한 바퀴를 돌아 이제 다 알 것 같은데도 뭔가 잡히지 않았다. 단지 알았을 뿐이지 내 것이 되지는 않았던 셈이다. 힘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소위 원력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인 기도가 들어갔다. 얼마 후 남편의 야비한 행위에 질려 언니 집에서 기거를 하며 수행에만 매달렸다. 백일동안의 수정 같은 기도는 ‘성철큰스님을 감동케 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백일 후 꿈속에서 뵌 큰스님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다정한 모습으로 말씀을 주셨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백일 동안 난 아이들이 보고 싶으면 대구로 와 마땅한 곳이 없어 식당이나 노래방을 찾아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부산으로 돌아서는 매번 뜨겁게 눈시울만 붉히곤 했다.
백일이 되는 날 남편의 사과를 받고 아이들 집에 들어가긴 했지만 말뿐이지 변하지는 않았다. 부부간의 사랑, 정이 없어도 자식의 끈으로 지탱된다는 말이 있듯 나 역시도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의 정진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 집에 들어간 지 6~7개월 후 남편에게서 표현할 수 없는 살기 비슷한 것을 느껴 몸이 오싹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법무소 사무실을 찾았다. 법무소 직원은 “이혼을 전제로 한 재산압류는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혼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나의 대답은 “아니에요”였다.
백일동안 아이들과 떨어져 있으면서 내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젠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었다. 그런데 바로 이틀 후 남편은 새벽에 방문을 두드렸다. “이 미친…. 네가 가야 될 곳이 있다….”는 폭언이었다. 그러고는 이층에 계신 아이들 할아버지에게 들렸다가 출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난 절을 하고 있던 중이어서 다 듣지는 못했다. 기도 도중 ‘뭔가 있구나, 그 오싹하던 시간이 지금이구나’ 싶었지만 평상시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조금 후 성모가 “엄마, 아빠가 이상해. 나보고 빨리 학교가래”라고 말했다.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는 “집에서 나올 때 혼자 나오지 말고 성모 학교 갈 때 같이 나오너라”라고 했다. 그때부터 내 몸과 마음은 떨리고 있었다. 아이들 할아버지가 식사를 하시는 중이면서도 모른 척 했다. 새벽에 아들에게서 다 듣고 있었으리라. ‘XX병원사람들이 와서 집안이 소란스럽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말을, 그리고 ‘겁을 줘서 이제부터 기도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는 돌려보내겠다’는 것을 말이다. 옆집에 사는 친구에게 가면서도 100M도 안 되는 거리였건만 난 성모를 학교 보내고 무서워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오후부터 떨리는 몸을 이끌고 이혼 소송을 밟고 있었다. 그날 밤 친구와 여관방에서 12시에 헤어지고 나서도 난 다시 절을 하며 못 다한 기도를 졸면서 마무리 짓고 있었다. 2일이 멀다 하고 혹시나 하는 두려움에 여관을 옮겨 다녔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친구가 장기간 투숙할 수 있는 모텔이라며 한 곳을 소개했다.
그곳에서 2달 15일을 거처하다가 모 암자에 공양주로 가게 됐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정해진 기도를 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새벽 5시에 밥을 짓기 때문에 3시에 일어났다. 그곳에 간지 달포 되는 날이 마침 추석이었다. 그 날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재 지낼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알람을 1시에 맞췄다. 2시간을 기도하고 공양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