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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사실 간단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한 이해, 즉 정견(正見)을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무엇인가? 깨달은 부처님하고 우리하고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생활화하려고 하는 것인가? 실제론 차이가 없습니다. 꼭 같아요. 꼭 같은데 우리는 그 효능을 제대로 발휘 못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면 부처님 가르침이 뭐다 하는 것도 동시에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형상만 보고 있습니다. 형상만 쳐다보고 그 형상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우수하다 열등하다, 귀하다 천하다, 이렇게 계속 분별을 합니다.
<아함경>에서는 형상만 쳐다보는 사람을 장님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형상만 쳐다보는 장님이다보니 길을 걸을 때 부딪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상처를 많이 입습니다. 그 상처가 곪아 터져서 몹시 고통을 느끼면서 인생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눈만 그런 게 아니라 코, 귀, 입까지 모든 것을 취사 선택하고 비교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며 살고 있습니다.
취사선택하면서 자기만 학대하는 게 아닙니다. 앞집은 그랜저인데 우리 집은 왜 티코냐, 옆집 애는 서울대를 다니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그러면서 자기도 학대하고 주변 사람도 학대합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나 세계가 그런 식으로 비교, 우열을 따지고 취사 선택하면서, 사회는 사회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세계는 세계대로 계속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지구상에는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자기를 어떻게 보고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부처님은 형상만 보는 게 아니고 거기에 한 가지 더 보십니다. 우리는 형상만 보는 반면 부처님은 형상도 보지만 공(空)을 하나 더 보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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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보게 되면 장님이 눈을 떠버리니까 부딪칠 일도 넘어질 일도 없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잘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공만 이해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시골에 가면 새끼, 가마니, 덕석, 짚신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는 형상이니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들의 재료는 짚인데, 짚의 입장에서 보면 가마니나 새끼나 덕석이나 짚신이나 다 같아요. 거기에는 귀천도 없고 우열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이 짚이 <반야심경>에서 얘기하는 공(空)입니다.
우리의 짚은 무엇이겠습니까?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고 얘기했고요. 그것을 마음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선종에서는 주인공, 본분자리라고 하는 등 이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이지요. 간혹 이름만 듣고 그것을 알았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는 있는데 이름만 듣고 추측하는 것은 바로 안 것이 아닙니다. 바로 봐야 합니다. 오직 이 ‘짚’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생활화하면서 체험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수행이고 행복한 삶을 걸어가는 길입니다.
불교는 크게 어려운 것도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불교공부는 이해를 깊이 하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공부해가고 생활에 적용해 가면 깊이 가면 갈수록 쉬워집니다.
<서장>을 보면 “선 것이 익어가고 익어가는 것이 설어진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선 것이 익어간다는 것은 익어가면 갈수록 점점 힘이 적게 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처음 적응할 때 어렵지 조금만 적응해서 생활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떤 시각으로 생활화하고 수행해야 되느냐? 이것이 또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부처님과 다른 점이 실제로는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부처님과 같이 오온이 개공한 줄 알고, 나의 짚이 무엇인지 이것을 이해하면서 생활에 적용해보고 그 가운데에서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차근차근 수행해 갈 때 불교가 우리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짚이고 공이냐? 이것부터 알아야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갈 수 있습니다. 나라는 이 존재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든,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로써 존재합니다. 연기는 글자 그대로 인연이 모여가지고 형상이 지어졌다는 겁니다. 이 보제루만 해도 천 가지 재료가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재료 가운데는 나무도 창문도 있고 못이나 기와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여러 가지 중의 무엇을 갖고 집이라고 하겠습니까. 정확하게 얘기하면 천여가지 재료가 만든 것이지 집이 저절로 된 게 아니예요. 이것이 만약에 세월이 가서 허물어지면 집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재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집은 실체가 없다고 합니다. 그걸 공이라고 합니다. 무아(無我)라고도 합니다. 이 몸뚱이도 60조의 세포가 모여 있는 덩어리라고 얘기를 하는데 60조 중 어느 세포를 갖고 나라고 하겠습니까?
여러 신도님들은 이것을 알면 “나라는 것이 없고 실체가 없다면 너무 허망하고 허무한 것이 아닙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없다고 하는 요소도 있지만 지금도 여러 신도님들이 듣고 보고 하는 그 존재도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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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무엇이 없어져서 공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공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알면 허무하고 허망한 것이 아니고, 귀천과 우열을 따지는 등 계속 비교하며 자신을 괴롭히던 마음자리가 없어집니다.
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빛과 같은 지혜가 나옵니다. 그 지혜가 그렇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될 것은 지금 제가 설명을 드렸는데, 그것을 듣고 수행해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이 드실지 모르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체험을 안 했는데 체험을 하게 되면 본래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드는 게 아닙니다. 본래 그렇게 존재하고 있어요. 이 사실이 굉장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부처님과 같이 사고하고 행위도 하면서 매일매일 좋은 날이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원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생물, 무정물 모든 존재가 그렇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수행을 어떻게 해 가야 되느냐? 선수행은 생활에 선이 스며들어가게 해야합니다. <능엄경>에 손가락과 달 얘기가 나옵니다. 진리가 달이고 손가락은 진리를 보라고 가르치는 방편입니다. 우리나라 선불교는 아예 달을 얘기해 놓고 생활속에 바로 스며들어가서 달로써 생활하도록 하는 수행방법입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수행방편에 생활을 맞추는 다른 나라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선은 생활과 각각이 아니라 하나가 돼서 굉장히 평화롭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공부거든요. 우리의 선은 철저히 ‘달’불교입니다.
그런데 달 불교를 한다는 한국불교에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이 수행은 수행, 생활은 생활, 따로따로라는 겁니다.
“도인은 멀리서 봐야 도인이지 가까이서 보면 도인이 아니다” 흔히 이런 말을 해요. 이것은 정말로 욕입니다. 이 말은 ‘공부도 안한다, 생활화도 안 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 도인이 안 나온다, 선지식이 없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얘기를 많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법회를 열기로만 끝내지 말고 생활화로 이어가야 합니다. 생활화도 한 번에 다하지 말고, 백 가지가 있다면 한 가지 한 가지씩 실천해가면 백 가지도 가능하도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참선, 염불, 봉사를 하고 이렇게 해야 안팎으로 맞아서 수행이 되고 공부가 됩니다.
스님들의 법문을 통해 정견을 세워서 그것을 생활에 하나하나 실천하면서 공부도 같이 병행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 그 공부가 성취되는 것이지, 생활 따로 공부 따로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 고우 스님은
·1937년 성주 生
·20살 때 청암사 수도암에서 법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
·관응·고봉·혼해 스님으로부터 각각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수학
·축서사 김용사 등 제방 선원에서 참선 정진
·1968~9년 봉암사 선원을 재건해 조계종립 특별선원의 기틀 다짐
·각화사 태백선원장 역임. 현재 봉화 각화사 서암에 주석
■ 범어사 설선대법회 고우 스님 질의응답
스님께 묻습니다
사회 : 화랑 스님
질의 법사 : 화랑 스님
·범어사 출가
·동국대 승가학과 졸업. 선학과 박사과정수료
·현재 동국대학교 선학과 강사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재가 질의자 : 조명제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일본 고마자와 대학 불교학부 연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객원 연구원
·현재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연구원
화두통해 사량분별 끊어진 마음상태 만들어야
내가 부처라는 자부심으로 스스로 세상을 맑혀가자
화랑 스님: 묵조선에서는 ‘한 치 앉으면 한 치 부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본래성불해 있다고 합니다. 간화선에서 정견을 세워야 된다고 할 때 본래성불해 있다는 입장과 묵조선에서 말하는 본래성불은 어떻게 다릅니까?
또한 선 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경지는 삼매(三昧)의 경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에서 밥 먹을 때도, 차를 타고 갈 때도 삼매를 이어갈 수 있는지요? 돈오와 점수에 관한 얘기를 듣다 보면 ‘왜 돈오 정견을 세워야 되는가’를 알게 됩니다. 대중들을 위해서 그것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고우 스님: 본래성불이라 할 때, 우리 존재원리는 철저히 ‘달’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신심(信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만, 본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그런 의지가 우리 마음속에 일어납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인데 왜 비교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학대합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본래 모습대로 돌아가는,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는, 그것이 불교입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조사스님이나 도인스님들이 우리에게 화두를 제시합니다. 손가락 드는 분도 있고 주먹을 드는 분도 있고 말로 똥막대기라고 하는 분도 있고 ‘뜰앞에 잣나무’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으라는 겁니다. 본래 달인데 왜 손가락을 요구하느냐 이겁니다. 화두에는 손톱만치도 사량 분별이 붙으면 안 됩니다. 즉 주관과 객관을 나누면 선이 아닙니다. 화두를 통해서 우리의 사량 분별이 박살이 나는 그런 마음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길이 끊어진 자리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으라고 화두를 제시한 것인데 못 깨닫고 모르니까 할 수 없이 의심하는 겁니다.
의심하기 위해서 화두 든다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꼭 앉아 있는 것만 좌선이 아닙니다. 모르면 차 타고 가면서도 의심하고 밥 먹으면서도 의심하고 일상생활을 통해서 의심하고 있으면 그게 좌선이에요.
일상에서 흔히 말하는 독서삼매와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는 다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는 적적성성(寂寂惺惺)입니다. 이 불교 삼매를 통해서는 아무리 삼매에 깊이 들어가도 일상생활은 그대로 합니다. 삼매에 들었다고 해서 방으로 갈 걸 부엌으로 가고 부엌으로 갈 걸 화장실에 가고 이렇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삼매에는 거의 성성은 없고 적적만 있습니다. 적적삼매에 들면 행동도 정지하고 먹고 배설하는 것도 정지합니다. 그러면 생활하고는 완전히 분리돼 버리지요.
<육조단경>에 ‘적적과 성성을 분리하면 외도다’ 이렇게 나옵니다. 적적성성 이것이 하나로 굴러갑니다. 적적성성으로 생활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제일 쉬운 말로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이라 합니다. 응무소주가 바로 적적입니다. 이생기심은 성성이고요. 이것이 하나로 어울려서 생활하면 도인이라 하고 그것을 완성시켜가는 과정을 삼매라고 합니다. 이렇게 작용하게 되면 주관과 객관을 뛰어넘어서 비교하지도 않고 구별하지도 않고 전부 다 평등하게 보면서 마음이 굉장히 평화롭고 굉장히 자유 할 수 있는,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화랑 스님: 묵조선이 묵묵히 삼매에 들어있는 것이 아닐진대 본래성불이라는 입장에서 결국 깨어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으로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간화선에서도 화두를 꼭 들어야만 성성하게 될 수 있는가? 만약에 성성할 수 있다면 화두가 없이 묵조선으로서도 가능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질문이 남을 수 있거든요.
고우 스님: 간화선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 있고 회광반조해서 깨달음을 얻는 묵조선이 있습니다. 간화의 경우, 의심이 먼저 생기니까 성성이 돼서 적적이 따라오게 하는 간화의 경우는 성성적적이라면 묵조는 적적성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적적성성, 성성적적 이것만 갖춰지면 삼매를 거쳐서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래성불이라는 것을 정말로 믿고 공부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하게 되면 누구든지 순간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상근기 하근기 그게 어디 있습니까? 철저히 믿고 발심하면 다 상근기예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멀다 가깝다, 상근기다 하근기다 이걸 나눌 게 아니라 무조건 믿고 우리가 그런 의지로 진심으로 믿고 공부하면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묵조선, 간화선의 우열은 절대 없습니다.
화랑 스님: 제가 스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돈오점수에 대해서 좀 질문을 하면 어떨까요?” 하니 안 하시겠다고 하더니 역시 답을 안 주시는군요.
고우 스님: 중국의 육조 스님하고 신수 스님이 돈오돈수, 돈오점수 갈라졌는데요. 신수 스님은 돈오점수고 육조 스님은 돈오돈수인데 육조 스님의 뿌리가 한국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보조 스님 이후 돈오돈수 돈오점수가 나눠지긴 했지만 모두 육조 스님에다가 뿌리를 두고 있어요.
그래서 조상이 같으니 그것 가지고 너무 싸우지 말고 같이 인정하고 서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수행해서 구경(究竟)은 같이 가는 거니까 그렇게 이해하고 각자 자기에게 맞는 공부를 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입니다.
조명제: 현실적인 생활의 조건이 행복해 질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데도 실제로 개개인을 만나서 “당신 지금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행복합니다” 라는 대답을 하는 경우를 잘 보지 못합니다. 사회 구조나 조건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더라도 결국은 각자의 마음자리, 본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기에 마음자리도 단순한 관념이 아니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본래의 마음자리를 과연 어떻게 구현해야 되는지, 선을 대중화하려면 어떡해야 하고 또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요?
고우 스님: 현재 우리생활은 굉장히 편리해졌고 물질도 아주 풍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행복하냐? 행복 안 하거든요. 더 불안해요. 더 각박하고, 걱정도 더 많고….
왜 그러느냐? 형상만 보고 모든 행복의 조건을 바깥에서 찾기 때문이예요. 내면을 찾는 공부는 안 해요. 그래서 도덕 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인간성이 메말라 갑니다. 동물과 거의 다름없이 힘센 놈이 이기는 겁니다.
이런 사회가 되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갈등하고 대립하는 투쟁하는 이것을 종식시켜서 정말로 더불어서 서로 오순도순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부처님이 발견한 이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부처라는 이 세계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껴야 합니다. 이 자부심을 잃지 마시고 내 개인부터라도 그렇게 해 가면 그것이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웃에게 영향이 미칩니다. 그게 바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이고 사회화가 아닙니까?
조그만 맑은 물이 큰 연못도 맑힐 수 있습니다. 내 스스로라도 조금 조금씩 맑혀가는 그런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 나가려면 굉장히 고달플 텐데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할수록 행복감을 느낍니다. 또 행복감을 느끼면 열심히 하게 됩니다.
가정주부, 장사꾼, 직장인 등 무슨 일을 하시든지 열심히 하면 그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처님법을 이해하면 저절로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 법을 실천하고, 생활화 하는데 절대로 손해보고 괴롭고 불편하고 그런 게 아닙니다. 실천하면 즐거움을 느낍니다.
모든 것이 연기로써 존재한다는 이해를 집중적으로 하고 실천하게 되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