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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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체득한 삼법인
현대불교 제10회 신행수기 진흥원 이사장상


2004년 1월말.
방콕 돈 무엉 공항에 밤11시30분 도착. 밤의 열기가 대단히 후덥지근하다. 입국 검사를 통과하고 나오니, 마중 나온 사람들 중에 한분이 손을 들어 표했다.

“배거사시죠? 환영 합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시고 내일 스님을 만나시죠.”

다음날 아침 8시 30분.
국내선 항공으로 태국북부 치앙마이로 향했다. 공항까지 마중 나오신 스님과 함께 스님이 계시는 숲으로 향했다. 초막 하나에 짐을 풀고 주위를 둘러보니, 네 평 정도의 방에 칸을 막은 화장실, 침대 하나, 옷장 하나. 과연 이곳에서 얼마나 지낼 수 있을 것인지….

2년 전,
그림=문병성.
태국 절에서 집중명상 일주일을 마치고 나니 도인 스님께서 나에게 제안을 하시며 의미 깊은 말씀을 한마디 던지셨다.
“공거사는 열성이 대단해. 내가 상으로 장학금을 주고 싶은데 받겠는가? 올바른 제자 찾기도 힘들고 올바른 스승 찾기도 힘들지.”

그 후 스님으로부터 세 번의 초청장을 받았으나 번번이 바쁘다는 핑계로 늦추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마지막 편지를 보니, 이제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배거사, 허송세월 말게나. 마음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키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쁘고 중요한 일이야. 더 이상 늦출 수는 없다. 세월과 썰물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공부 기간도 정하지 말고 기대감도 갖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너라.”
스님의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스님은 한국에서 치앙마이까지 날아온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부터 수행을 시작한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시간을 사용한다.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다섯 가지 계를 주노니 잘 지키겠는가?”
“예.”
“이곳에서 수행할 때 몇 가지 명심할 일이 있다. 묵언 정진이니 지도 스님과 수행점검 시간 외는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전화, 편지, 독서, 기록 모두 금지 되어 있다. 새벽 정진이 좋으니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다. 자유로이 수행하되 방일하지 말고 부디 시간을 아껴 쓰라. 세수, 이 닦기, 식사, 배변도 수행이니 언제나 마음 챙김 하라.”

수행 시작이 시작됐다.
30분간의 좌선을 하는데 왠일인지 타이머가 도통 울리질 않았다. 눈을 살며시 뜨고 고개를 재빨리 돌려 벽시계를 훔쳐보았다. 20분밖에 안 지났다. 아직도 10분이 남았다. 눈을 감고 다시 시간 가기를 기다렸다. 10분이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타이머가 울리지 않는다. 고장 난 것일까?
다시 한 번 시계를 쳐다봤다. 25분 지났다. 5분만 더 참자.
마지막 5분이 한 시간이나 지나는 것처럼 길었다.

그날 저녁 스님이 물으셨다.
“명상은 잘되는가?”
“예.”
“시계를 자주 보더군.”
부끄러웠다. 얼굴이 빨개졌다. ‘스님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보고 계시는구나.’
“그래, 시계를 봐도 좋다. 다만 그것도 명상이니 눈을 뜨는 것을 알고 고개를 돌리는 것을 알고 시계를 보는 것을 알고 다시 제대로 자세를 잡고 명상하는 거야. 일거수 일투족을 마음 챙김 하면서 천천히 해라. 여기 있는 24시간은 모두 명상하는 귀중한 시간이니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마음 챙김 해라.”

졸음과 망상 그리고 고통 이 세 가지가 명상의 최대 적이었다. 수행도중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왔다. 아니면 쓸 데 없는 과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왔다. 과거에 잘못한 일들, 후회되는 일들, 재미있었던 일들, 특히 오계를 범했던 일들, 낚시 갔던 일, 물건을 훔친 일, 거짓말한 일, 옛 애인과 관련된 일, 술 먹고 다투던 일….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마음의 성질을 알고 길들여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란 본래 항상 현재에 있어야 마땅한 것. 과거는 흘러갔으니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또한 없으며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를 불러올 수는 없고 미래를 당겨올 수도 없다. 명상을 통해 심신을 정화시켜 삶을 개선하면 미래도 자연히 개선된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삶을 개선하는 길은 명상뿐이다.”

이곳에 친구들이 있다면 도마뱀, 개미, 고양이, 달팽이, 개구리, 모기, 파리, 뱀 등이다. 개미는 얼마나 부지런한지 이들로부터 부지런함과 인내심을 배운다. 어쩌다 내가 비스킷 부스러기를 방바닥에 흘려 놓으면 어떻게 알고는 친구 수백 마리를 줄 지어 데리고 와서 먹고 간다. 깨끗이 방을 닦아 두어도 그 자리에 음식이 있는지 며칠이고 계속 정찰한다.
고양이는 아침마다 일출을 보면서 지붕 위에서 명상한다. 그의 좌선은 조금도 움직임이 없고 그의 행선은 너무 부드럽고 조용하다. 나는 이 말없는 동물 친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처음 명상할 때는 뉴브라이튼 바닷가가 자주 생각났었다. 길게 뻗은 백사장, 바윗돌, 방파제, 작은 배, 큰 배, 흰 구름, 멋진 바닷가 카페, 날아가는 갈매기 떼, 밀려오는 파도, 낚시하는 사람,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들….
눈을 감고 있어도 자세히 기억이 났다. 명상이 진전되면서 같은 바닷가가 생각나긴 했지만 그 그림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한 달 후에는 바닷가 생각이 났다는 자체만 알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고 그곳에 사람이 있는지 건물이 있는지 갈매기가 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두 달 후에는 바닷가 생각도 없어지고 오직 명상에만 집중하게 됐다. 이제 망상도 고통도 졸음도 없어졌는데 좌선을 하노라고 앉아있으면 까닭 없이 눈물이 흘렀다. 슬프지도 않은데 왜 이유 없이 뜨거운 눈물이 자꾸 나오는 것일까?
며칠째 계속되니 잘못된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눈물도 땀도 오줌도 피도 거의 비슷한 성분의 것이니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하셨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지도 못한 채 오로지 명상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하루는 스님이 잭 푸르트를 갖고 오셨다. 겉껍질이 울퉁불퉁한 수박만한 크기의 연둣빛 과일의 배를 가르자 털과 같은 내용물이 있었고 씨를 감싸고 있는 연 노란색의 부드럽고 두터운 속껍질이 보였다. 먹어보니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향기와 맛이라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스님은 이 과일 한 개를 내 앞에 놓고 법을 설하셨다.
“말로는 맛을 확실하게 전달하기 힘들다.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남이 대신 맛봐줄 수가 없다. 법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과일을 자네 대신 먹어준다고 해서 자네가 그 맛을 알 수 있다거나 자네 배가 부를 수 없듯이 자네 명상을 내가 대신해서 결과를 얻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너 스스로 해야 한다…잭 푸르트를 잘라도 먹을 수 있는 부분은 매우 적다. 사람도 이와 같다. 쓸모없는 사람은 너무 많고, 정작 필요하고 훌륭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루는 명상 중에 콧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좌선을 마치고 눈을 뜨니 상하의 하얀 명상복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코피가 난 것이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방을 닦았다. 명상을 하면 또 흐른다.
며칠을 계속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스님은 명상 중에 죽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위로하시며 포기 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셨다.

될 듯, 될 듯…금방 될 것도 같은데 그러나 역시 되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하다. 점검시간이 벌써 가깝다. 오늘도 실패했다. 왜일까? 옷을 모두 갈아입자. 목욕을 하자. 깨끗한 몸으로 다시 시작해보자.’
도저히 그 경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오늘도 허송세월이다. 밥이 아깝다. 나는 어찌 밥값도 못할꼬. 이 밥 도둑놈.’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그러나 야단칠 줄로만 알았던 스님은 진전되고 있으니 걱정 말고 계속하라고 격려하셨다.

법우들에게 가르쳐 줘야지 하는 마음이 자주자주 떠올랐다. 그러나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 말씀.
"남을 가르칠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자기가 성취하지 않고는 결코 가르칠 수 없다.
허황된 꿈은 꾸지도 마라. 순수하지 않은 조그만 생각이 모든 일을 그르친다."
스님은 나의 마음을 읽고 계셨다.

아! 명상은 무상, 고, 무아 삼법인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로구나….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 같았던 고통도, 눈물도, 코피도, 설사도 결국은 멈추었다.
스님은 "이제 길은 좁혀져 간다. 험한 산은 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그날 밤 나의 방 앞에 촛불과 향불을 피워 주셨다.
행복을 찾아 집으로부터 6천 마일이나 멀리 떠나왔지만 찾고 보니 정작 행복은 내 마음 속에 있었다. U turn하여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나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늘 죽음의 공포가 뒤따르던 것이 이제 사라진 것이다. 겁날 것이 없었다.

“이제 너는 승리자이다. 자기의 마음을 알고 자기를 이기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이기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 너에게 승리의 월계관으로 이 화관을 주노라.”

스님은 손수 만드신 수백 개의 자스민 꽃을 연결한 화관을 씌워 주시며 당부하셨다.
"네가 얻은 경지나 자신감에 대해 아무에게도 자랑하지 말라. 낮은 풀처럼 자세를 낮추고 겸손 하라"

집에 오니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마누라는 먹고 살 돈을 벌어 오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이전 같으면 화를 내고 한바탕 싸웠을 것인데 이젠 달라졌다.
그냥 취업문을 두드렸다.
금방 취직이 되고 몇 달 안가서 진급까지 되었다…….인내심과 지혜가 생기고 쓸데없는 욕심이 없어지니 달라진 세상이 내 앞에 성큼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행복하게 사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랴!

법우 여러분,
한국, 미얀마, 태국 등의 수많은 수행센터에서는
오늘도 수많은 깨치신 스님들께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찾아가 법을 구하십시오.
구하는 자 얻을 것입니다……. (끝)
배명호(뉴질랜드 크라이스처치 거주) | |
2005-03-25 오후 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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