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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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의 門은 어디입니까?
10대선사 초청 범어사 설선대법회 입제하던 날
‘문 없는 문’ 열고자 선찰대본산 범어사에 전국 3천여 불자 운집

부산지역에서 101년만의 폭설이 내린 가운데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지유 스님의 법문을 경청하는 사부대중.
“선이 무엇입니까.”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의 목소리가 경내를 휘감았다. 그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환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를 때리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 선(禪)이 무엇이냐는 물음. 도대체 무엇을 묻는 것일까. ‘선, 문 없는 문을 열다’라고 플래카드에 적혀있는 법회 주제.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있지도 않은 문을 어떻게 열라는 말일까. 문이 있기는 한 것인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열 수는 있는 것인지….

3월 5일 오후 2시 부산 금정산 선찰대본산 범어사. 범어사와 현대불교신문사가 공동주최한 ‘10대 선사 초청 설선대법회’의 막은 그렇게 올랐다. 법상이 마련된 보제루, 보제루 앞마당, 대웅전 앞에는 3천명이 넘는 불자들이 운집했다.
이번 설선대법회는 지유 스님의 법문에 앞서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이 설명한 대로 고려시대 담선법회와 중국 무차선법회를 종합한 성격의 법회이자, 형식과 내용면에서는 고려시대 담선법회를 재현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차 마시고 싶으면 차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게 선인데….”
지유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다.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눈이 내리면 내리는 것일 뿐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껴입는 것과 같은 이치일 뿐이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심이란 자연심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바로 그 마음. 눈이 내리는 속에서 시작된 지유 스님의 법문은 이미 ‘선’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었다.

법회가 끝난후 설법전에서 이어진 참선 실수.

법회 시작 2시간 전인 낮 12시. 보제루는 이미 더 이상 들어설 틈조차 없었다. 보제루 앞마당에는 간이의자 1700여 개가 놓였고 서울ㆍ경기ㆍ강원ㆍ충청ㆍ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불자들이 속속들이 자리를 채웠다.

법회 시작 20여분 전, 이미 더 이상 앉을 곳이 없자 법회 참가자들은 대웅전앞 금강계단에도 자리를 잡았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보제루 양 옆의 심검당과 미륵전 바로 앞에서 선 채로 법회를 기다렸다. 간혹 외국인들도 눈에 뜨였다. 법회 참가자들은 이번 법회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지역에서, 그것도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인 범어사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사들이 나서서 법문을 하는 ‘특별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요. 10차례 모두 참가할 생각입니다. 흔한 기회가 아니지 않습니까.”(홍윤석ㆍ35)
“생활에 찌든 마음을 씻기 위해 왔습니다. 큰스님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데요.”(박 식ㆍ50)
“어머니와 식구들이 법회에 꼭 가고 싶다고 해서 왔습니다.”(김주태ㆍ57)

지유 스님의 법문이 계속되면서 눈은 폭설로 변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세차게 몰아쳤다. 일부가 눈을 피해 자리를 옮겼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옷에 달린 모자를 쓰거나 머리에 손수건과 신문 등을 쓴 채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자 참가자들 대부분은 대웅전, 심검당, 미륵전 처마 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참가자들은 보제루 양 옆에 설치된 대형 멀티비전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지유 스님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다.

일부는 눈보라 속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법문을 경청했다. 머리 위엔 흰 눈이 수북이 쌓여갔다. 몇날 며칠을 눈 속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달마를 향해 법을 구했던 천오백년 전 혜가 스님의 모습이 연상됐다. 천년고찰 범어사는 눈꽃으로 피어났고, 선(禪)은 설(雪)이 되어 내렸다.

지극한 신심으로 설선대법회에 동참한 불자들.

법문이 끝난 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지유 스님은 때로는 정곡을 찌르며, 때로는 에두르며 답을 했다. 선사들은 때때로 본질을 에두른다. 우리의 지식과 관념은 통렬히 깨져 구름조각이 된다. 지유 스님은 그 구름조각에 가려진 집착을 경계하라고 설했다.

“대중들을 위한 공부길을 충분히 상세하게 밝혀주신 정말 좋은 법회였습니다.”(혜총 스님ㆍ부산 감로사 주지)
“우리가 사는 그 모습이 마음인줄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화두 하나 들고 갑니다.”(무변심 보살ㆍ52)

“다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남은 아홉 차례 법회도 모두 참석해 큰 것을 얻고 싶습니다.”(보덕행 보살ㆍ60)
“미진한 공부에 좋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법회를 녹음한 테이프도 사 복습을 부지런히 해서 더욱 정진할 생각입니다.”(박선자ㆍ42)

웅장하고 장엄했다. 참가자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법회가 됐다. 법문도 그렇고, 그 법문이 범어사에서 설해졌다는 것도 그렇고, ‘설선(說禪)’법회를 ‘설선(雪禪)’법회로 바꾸어 놓은 자연의 가르침도 그렇고….

법회가 끝나고 저녁 7시부터 다음날인 6일 새벽까지 설법전에서 참선실수가 이어졌다. 폭설로 돌아간 참가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00명 가까운 대중이 정진에 참석했다. 그리고 ‘문 없는 문’을 열기 위한 삼매에 빠져들었다.
글=한명우 기자·사진=고영배 기자

지유스님의 법문을 경청하는 불자들.

■법회 이모저모
100여명의 스님들 참석

이날 법회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과 총무부장 무관, 기획실장 법안, 호법부장 종수 스님 등 종단 집행부 스님을 포함해 100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참석해 재가불자들 못지않게 스님들의 관심도가 높음을 보여주었다.

▶노보살들 3시간 전부터 자리잡아

행사시작 3시간 전인 오전 11시경 보제루 안에는 이미 20여명의 노보살들이 미리 자리를 잡는 등 법회의 열기를 반영하기도.

▶“눈(雪)속에서 선(禪)을 설하다”

이날 부산에 내린 눈은 1904년 부산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대 적설량. 하지만 지유스님 법문이 설해지던 오후 3시경 까지는 범어사가 위치한 금정산에만 함박눈이 내렸을 뿐 부산 시내는 화창한 날씨를 보였다. 이 소식을 들은 참가자들은 “설선법회가 눈(雪)내리는 날 선(禪)을 설하는 법회여서 범어사에만 눈이 내린다”고 한마디씩.

▶유료접수자 2500여명 “대단해요”

범어사 접수처는 낮 12시가 넘어서면서 법회참가 등록을 하려는 불자들로 크게 붐볐다. 접수를 맡은 8명의 보살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접수증과 ID카드를 발급했으며, 모두 2천5백여 명이 등록. 범어사 기획국장 정산 스님은 “남은 9차례 법회에서 접수자가 더 늘 것 같은데 참선실수 공간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기도.

▶부산 안국선원 신도 800여명 등록

이번 법회 등록자 중 부산 안국선원 신도만 800여명이 등록해 화제가 됐다. 이 인원은 단위사찰 등록자수로는 최대이자 전체 등록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대규모.

▶ID 카드로 전산관리 호평

이날 법회 등록자들에게 발급된 ID 카드는 10차례 진행되는 법회 참석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이 ID 카드 확인으로 전체 법회 참가자에게는 수료증을, 전체 철야 참선 정진 참가자에게는 안거증이 수여되는데. 사찰 업무는 물론 불자들에게도 상당한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철도공사 KTX 할인 제의

한국철도공사가 법회 참가자 명단을 알려주면 이들이 KTX를 이용할 시 평소 할인율의 두 배인 40%를 할인해 주겠다고 제의해 오기도. 그러나 법회 참가자 명단 유출을 우려한 범어사측에서 정중히 거절했다고.

▶외국인 관광객도 관심

범어사에 관광차 왔다가 법회장에 와봤다는 영국인 존(John)과 줄리에(Julie) 부부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 놀랍다”며 신기한 표정을 짓기도.

▶혜원정사 화엄산림법회 연기

매년 이맘때마다 화엄산림법회를 열어왔던 부산 혜원정사의 조실 고산 스님은 “큰절에서 설선대법회가 열리니 화엄산림법회를 열지 말고 신도들이 범어사 설선법회에 참석하게 하는것이 좋겠다”고 사중에 당부했다는 후문.

김원우·한명우·천미희 기자
특별취재팀 |
2005-03-14 오후 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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