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 입제
주제 - 설선대법회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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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깨달은 사람을 이름붙여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그럼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고, 우리는 무엇을 못 깨달았느냐는 말입니다. ‘무엇을’ 깨달음으로써 부처님께서 이때까지 고통 받고 있던 것을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깨달았다는 것이 뭡니까? 바로 자기 마음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안 가진 사람은 없어요. 심지어 벌레 짐승까지도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일체 중생이나 미물 곤충까지도 부처님과 똑같이 깨달을 수 있는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했어요. 생로병사의 무상함을 느꼈고 생사가 없는 영원불멸한 무엇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그것을 찾아 출가를 하셨고 그래서 자기의 마음 하나 깨달음으로써 성취했습니다. 이 마음이야 말로 영원히 영원히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랍니다.
그 마음자리는 깨치신 부처님만이 성취해서 있고 우리는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우리 일상생활 속에 차를 마시고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일할 때 일하는 그 속에 조금도 나를 떠나지 않고 자기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온 학문과 지식과 온갖 기술, 알음알이들이 구름처럼 자기를 둘러싸서 자기를 가리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데 다만 잊어버리고 있는 원인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자기 딴엔 옳다고 집착하는 것에 사로잡힌 까닭입니다.
지금이라도 선지식이나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아, 내가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하고 망상과 집착 분별을 놓아버린다면 바로 부처님과 똑같이 깨닫습니다. 깨달은 그 마음자리에서 볼 때 모든 것이 자기 마음에서 말미암아 벌어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고 하는데 그 모습에만 사로잡히다보니, 실제 자기 자신은 생기지도 않았고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마치 물건이 생기니까 나도 같이 생겨났다고 생각하고, 그 물건이 없어지면 나도 같이 없어지는 것 같이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것을 망상집착이라고 했어요. 각자 자기 스스로가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거기서만 해방된다면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의 지혜가 열립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든 무슨 죄가 많고 무슨 병이 들었든 그거 고칠 필요 없이 있는 당장 그대로 장사꾼은 장사꾼대로 농사꾼은 농사꾼대로 그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면서 이것을 바로 보라, 이것밖에 아무것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직지인심(直指人心)하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했지요. 당시 사람들은 그래도 요새처럼 머리가 복잡하지 않고 순박했기 때문에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렸어요. 그랬던 것이 차츰차츰 시대가 흐르면서 말귀를 못 알아듣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자네가 말하고 있는 그것이 뭐냐, ‘시심마’ ‘이것이 뭐냐’하게 된 겁니다. 애초엔 간화선이다 묵조선이다 위빠사나다 하는 복잡한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결코 복잡한 게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머리로 글자로 아는 것과 깨달음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햇빛이 있는데 구름에 가려서 햇빛을 보지 못하는 그릇하고 구름이 사라지고 빛을 받은 그릇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햇빛을 받으면 환하고 영롱하고 그렇죠? 깨달음도 그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학문과 지식이 있어도 망상분별을 제거 못하면 얼굴이 어두워요.
지식으로 알기는 많이 아는데 고민이 여전히 많다면 부처님같이 밝은 마음에 얼굴이 환하고 빛이 나겠습니까? 구름처럼 꽉 끼어 있는 사량 분별을 때려잡는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화두공안이 그것입니다.
진정한 화두공안은 뭘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 출가하셨을 때 당시 외도의 지도를 받고서 고생 고생하면서 수행을 많이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자기를 가르쳐준 스승보다도 높은 경지에 올라 스승에게 칭찬을 받았어요. 하지만 부처님에게는 과연 이 경지가 불생불멸의 자리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었어요. 그것이 해결이 안 되니 의심이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 말은 자기가 자기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은 꼭 수행을 통해서만 되는 게 아닙니다. 제일 가까이에 있는 자기를 도대체 내가 뭐꼬 하고 돌아보면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람은 목석이 아니고 바보가 아닙니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한 가지에 매달려서 염불도 좋고 간화선도 좋고 열심히 하다보니 자기 모습이 보여요.
사람은 자기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게 동물과 다르지요. 똑같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개한테 먹이를 갖다 주면 서로 먹으려고 싸움을 합니다. 그 개 중에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개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시기하고 싸우고 다툼을 천년동안 하더라도 우리가 왜 이러고 있나 하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수행이고 원력을 세우고 하다보면, 열심히 하다보면 사람은 감각이 있기 때문에 느낍니다. 다른 욕망이 없어지니까 ‘도대체 이게 뭣꼬’ 하는 의심이 생기고 그때 선지식들이 일러주는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하나님이다, 천국이다 하며 바깥에서 찾습니다. 동양 사람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러나 동양 사람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가 않으니까 진리, 도가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이렇게 돌이켜 보게 된 것입니다.
<법화경>에 거지 아이가 자기 집은 부자였는데 집을 뛰쳐나가서 거지가 된 얘기가 나오지요? 그럼 본래 부잣집 아들인데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 거지 행세를 하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다시 부잣집 아들이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내가 원래 부자집 아들이었다고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지. 다른 집 아이가 수행을 한다고 그 집 아들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물 밖에 있다가 차차 수행해 가지고 물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물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말입니다.
거지가 자기가 부자집 아들임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염불이고 기도를 해봐야 결코 자기를 깨닫지 못합니다. 면벽을 하고 있으면 면벽을 하는 내가 도대체 뭔지, 염불을 하면 염불을 하는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지 자기가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천년동안 애를 써서 자기를 깨닫는 사람이나 말 한마디를 듣고 깨닫는 거나 깨닫는 거는 똑같다 이 말입니다. 불가에서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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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고 보면 닦을 것이 없지만, 닦을게 없다고 하니까 보통 일반 사람들이 공부도 안 하고 그냥 방탕하게 생활하는 것하고는 다른 겁니다.
지유(知有) 스님은
·1931년 일본 동경 生
·15세까지 일본에서 생활하다 해방과 함께 귀국
·18세 되던 1949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50년 상월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 수지
·봉암사, 원효암, 관음사 등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수십안거 성만
·문경 봉암사, 부산 범어사 주지 역임
·현재 선찰대본산 범어사 조실
스님께 묻습니다
질의 법사 : 구주 스님(원효암 수좌)
재가 질의자 : 곽만연(동아대 교수)
물속에 앉아 물을 찾고 있었네
구주 스님 : 간화선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화두공안을 참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 당대의 조사선에서는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청정한 자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수행할 필요 없이 단지 쉬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조나 백장, 황벽, 임제 등 많은 당대의 선승들은 한결같이 깨달음을 얻기위한 수행은 부정하고 단지 쉬라고만 합니다. 이점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간화선 입장과는 모순이 되고 있습니다. 조실스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지유 스님: 당대의 임제 선사나 황벽 선사는 닦을 필요가 없다,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내자마자 십만 팔천리라 틀려먹었다 했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가 자기 자리를 박차고 나왔기 때문에 이미 잘못됐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 자리를 잘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 속에 있으면서 물을 모르고 내가 물을 찾아야겠구나 하고 물이 어디 있을꼬, 어디 있을꼬 하고 이미 자기 자리를 놔두고 떠났기 때문에 틀렸다 이말입니다.
달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십년 동안 손가락만 오매일여로 보고 있었다고 하면 달을 볼 수 있습니까?
화두공안도 ‘이뭣고’ 하든지 ‘무’ 하든지 처음엔 그렇게 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나 어느 정도 하다보면, 진짜 화두는 화두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선문촬요> 강(講)할 때, 화두 얘기를 하나도 안 한다고 묵조선(默照禪)이라고 하는 겁니다. 묵조라고 들어보지도 못했고 묵조선은 공부도 안 해 봤는데 어떻게 남의 속을 알고 묵조선이라 그러는지… 허허.
나도 화두공안 한 사람입니다. 화두밖에 몰랐고. <선문촬요>에 보면 화두공안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화두공안을 손가락에 비유하면 손가락을 제쳐놓고 달을 바로 가리켜 줬다 이겁니다. 오히려 손가락을 잊어버린 사람이 바로보는 사람이다 이말입니다. 실지 화두공안의 참뜻은 닦을 자리 없는 자리에 갔을 때에 깨닫는다 말입니다. 선사들은 깨달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닦을 것이 없느니라 까지 갑니다. 그게 힌트입니다.
그런데 깨닫지도 못한 사람이 닦을 것이 없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닦을 것이 없다는 그 말에 정말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의심이 안 날 수가 없어요.
지유 스님의 답변이 길어지자 지환 스님이 구주 스님에게 “깨달음을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간화선의 입장이라고 질문한 것이냐”고 물은 뒤 “질문자가 간화선에 대해 잘 모르고 질문한 것 같다”는 지적과 함께 정학한 질문의 요지를 재차 확인하면서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구주 스님은 “간화선은 깨달음을 전제한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고 지환 스님은 “쉬라는 조사선과 비교할 때 화두를 통해 쉬라는 것이 간화선의 입장”이라며 구주 스님의 질문이 자칫 간화선에 대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을 지적하며 한동안 설왕설래했다.
지유 스님: 초심자가 들어왔을 때는 솔직한 얘기를 하기 어렵습니다. 잘못하면 병이 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3년쯤 선방에 가든지 자기나름대로 공부해보라 합니다. 한바탕 주먹을 쥐고, 내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화가 나서 도저히 못 견딜 정도의 대분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모른다는 대의심, 또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이룬다는 대신심을 내야 합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란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해서 깨닫고 보니까, 내가 물속에 들어앉아서 물을 찾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에게는 닦을 것이 없다, 닦을 것이 없느니라 하는 그 모습이 실지 닦는 모습이다 이 말입니다.
지환 스님: 깨달은 사람이라야 닦을 것이 없다는 말이 되는데, 깨닫지 못한 입장에선 어떻게 됩니까?
지유 스님: 그러니까 열심히 하라 이 말입니다. 무슨 방법이 좋은 것이 아니라 분통이 터져서 죽을 정도로 하라는 말입니다. 병이 나든지 공부를 성취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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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만연 교수 : 지금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뿐 아니라 재가 신자들도 수행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 실제 수행하는 재가자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재가자들은 여러 수행방법 가운데 어떤 수행법을 택하는 것이 좋을까요?
지유 스님: 신도들한테 질문을 자주 받는 것이, 우리도 공부를 하고 싶은데 세속에 살다보니 생활을 해야 해서 스님들처럼 전심전력하질 못합니다. 수행하다 보니 살림이 소홀해져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가사에 집중하다보면 공부에 소홀해지고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공부라고 하는 것은 절대 두 가지가 될 수 없어요. 일을 하다보니까 공부가 안돼 불안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면 일이 안 되고... 그런 것은 진짜 공부가 아닙니다.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결국은 마음닦는 거예요. 마음의 정체를 확인하는 겁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말은 달리 말하면 내 자신이 무엇인고 이 말 아니겠어요?
보통 공부라고 하면 자다 가도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해야 공부한다고 하고, 화두를 드는 사람은 차 마실 때 ‘이뭣고’ 하면서 차를 마셔야 하는데 화두를 잊어버렸다면 깜빡 했다 그러잖아요? 보통 그렇죠? 깨친 사람의 수행 모습과 깨닫지 못한 사람의 수행의 모습이 이렇게 다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 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애초에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일상생활, 행주좌와 어묵동정 전체가 공부 아닌 게 없습니다.
일체 중생이 똑같이 할 수 있다 했는데 부처님이 거짓말을 했을 리 없는데 내가 못 믿어서 그런 것이지. 못 믿겠거든 그것가지고 내가 의심을 해서 확인을 해봐라 이겁니다. 그게 화두공안입니다.
곽만연 교수: 범어사는 두 가지 위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라시대 의상 스님께서 화엄 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하신 사찰로 의상 스님의 화엄사상은 신라 통일의 정신적 초석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전통은 불교가 쇠퇴한 조선 말기에 경허 스님께서 범어사에 오셔서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선불교의 성지입니다. 이렇게 범어사는 화엄사상과 선사상이 함께 스며있는 성지 중의 성지입니다. 선과 교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지유 스님: 우리는 경(經)이라고 하니까 화엄경, 금강경 등 책자로 보고 있어요. 옛날에 그런 법문이 있었어요. ‘나에게 한권의 책이 있다, 즉 경이 있다. 이 책이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종이나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펼쳐 봐도 글자 한자도 없지만 항상 빛을 놓고 있다.’ 그것이 진짜 경이거든.
‘여시아문하사’ 하고 읽는 이것이 경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엄경 따로 있고 선 따로 있고 염불 따로 있고 주력 따로 있고 그렇겠어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소리 내는 이게 염불이 아닙니다. 염불은 글자 그대로 생각할 염(念), 부처 불(佛),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를 생각한다, 부처가 무엇인고? 부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생각하는 것, 마음이 뭐냐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정체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염불이요, 부처님께 공양올린 것이지, 공양 따로 있고 염불 따로 있고 기도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근본 뜻은 똑같다 이 소립니다.
<관음경>에도 ‘백의관음무설설(白衣觀音無說說)-아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순동자불문문(南巡童子不聞聞)-듣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법문이요 진짜 청법입니다. 그러니 화엄사상 따로 있고 선사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구주 스님
·동국대 선학과 졸업
·1990년 범어사에서 지유 스님을 은사로 출가
·91년 사미계, 95년 구족계 수지
·12안거 성만
·현재 범어사 원효암에서 정진중
곽만연 교수
·1950년 서울 生
·72년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75년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 동국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동아대 인문학부 교수, 동양철학회 등 이사
·‘불교의 생명윤리 사상과 장기이식’ 등 논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