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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스님과 수인사를 끝내고 “오늘을 사는 지혜를 듣고자 한다”며 찾아온 뜻을 밝히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만공 스님이 말씀하시길 ‘진언(眞言)은 불출구(不出口)’라. 참 말은 입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재야에서 비승비속으로 살고 있는 이가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처음부터 한 방 먹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평생 정진으로 일관한 큰 스님의 ‘한 소식’을 말로써 이해한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근처라도 갈 요량으로 스님의 초발심을 여쭈었다.
“나는 기라성 같은 큰 스님들을 모시고 공부하던 좋은 시절에 출가했어요. 노 스님들의 귀염만 받고 어리광 피우다 세월만 갔죠. 아직도 ‘너 이놈, 어찌 그리 시원찮은 짓을 하느냐’고 호통치는 노 스님들의 음성이 귓가에 생생합니다.”
“도봉산 망월사 춘성 스님을 10년간 시봉하셨다던데, 춘성 스님은 어떻게 공부하셨는지요”
“참으로 멋진 대장부셨어요. 평생 옷 한 벌 뿐이셨어요. 소지품은 물론 책 한권 소유하지 않으셨죠. 조실이시면서 당신 방도 없었어요. 팔십 노장님이 선방에서 사셨어요. 선방 중앙에서 정진하시다가 피곤하면 옆으로 팔베개하고 1시간가량 눕는 것이 전부였어요. 이불은 ‘부처와 멀어지게 하는 것(離佛)’이라며 평생 덮지 않으셨습니다.
노 스님은 일제 때 <화엄경> 80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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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춘성 스님을 옆에서 시봉이라도 하듯 ‘우리 노스님’하면서 꼿꼿한 선방 수좌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조심조심 수행 이야기를 이어간다.
“춘성 노스님은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80세에도 목탁석을 했어요. 도봉산이 쩌렁쩌렁 했습니다. 잡다한 일도 손수 하시며 당당하게 사셨기 때문에 시봉드는 스님이 할 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철 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70년대 초, 내가 해인사 선원장을 맡아 한철 났어요. 100여명 수좌가 막바지 일주일 용맹정진하는데 장군죽비 소리가 밤낮없이 콩 볶듯 했어요. 부목이 만들어온 물푸레나무 장군죽비 10짐이 다 부서졌으니 엄청 맞았어요. 그래도 누구하나 불평하는 이 없이 정진했습니다. 부처님에게 경책 받는 것이기에 신명나고 환희심까지 일었던 것이죠. 사자가 밀림에서 큰 소리를 외치며 나오는 기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때는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죽비였어요.
옛부터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한다고 했어요. 춥고 배고파야 도가 일어나는데 요즘은 너무 풍족해요. 그러니 근기도 낮아져서 한 철 나고도 도인이 나오지 않아요. 천하를 호령하던 장군죽비 기상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일곱 살에 천자문을 뗀 대선 스님은 어려서부터 ‘더이상 배울 것 없는 천재’로 유명했다. 중학교 때 <금강경>을 읽고 깨침을 갈구하다 도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19세에 계룡산 갑사로 출가했다. <천수경>을 단 하루에 외워 주위를 놀라게 한 스님은 계룡산 북사자암에 토굴을 짓고 3년 6개월간 생식하며 정진하던 중 홀연히 게송을 읊었다.
‘고삐없는 소를 몰다 / 깊은 꿈 깨어보니 / 소 간데 없고 / 소 임자 이 아니네 / 무변대공(無邊大空)에 달빛 가득 비었구나.’
“그때는 불도 안 때고 솔잎을 주식으로 생식하며 공부했어요. 불·보살이 나타난다 해도 주저하지 않고 밀어붙이겠다는 공부 힘이 생겼습니다. 그때 다소 밥값 한 것 같습니다. 공부는 쇠뿔도 단김에 빼듯이 밀어붙일 때는 끝까지 밀어붙여야 해요. 3천배 정진도 단숨에 해보세요. 생사를 걸고 밀어붙여야 하는데 요즘은 근기가 낮아지고 있어요.”
“공부가 잘 되면 마장도 많다는데 어떤 마장이 크던가요?”
“한창 때니 정력이 솟구쳐요. 참다보니 더 뻗쳐요. 다행히 공부에 힘이 붙으면서 잠잠해 지더군요. 그렇지만 완전히 뿌리가 뽑힌 것은 아니었어요. 내면에 잠재돼 있어 어느 순간 불이 붙으면 단번에 붙어 버리는 거예요. 색(色) 경계가 무섭긴 무서워요.
지금은 선에 대한 이론 홍수시대입니다. 한 방망이 맞아야 할 때죠. 내가 젊어서 짖궂은 수좌 노릇을 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전등록>에 치중한 어느 노스님의 방 창문을 열고 ‘까옥 까옥’ 까마귀 울음소리를 냈어요. 옛 조사 어록에 매달려 자기 소리를 하지 않은 것을 빗대어 까마귀 소리 내지 말라는 것이었죠. 죽은 소리는 소용없습니다. 자기와 계합하는 소리를 해야합니다.
1600년을 이어온 조사선은 가장 쉽고 가장 힘있고 직통으로 가는 공부입니다. 걸망속에 경허 스님의 ‘참선곡’과 <초발심 자경문>만 넣고 중노릇하면 공부 제대로 됩니다.”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한폭의 달마도를 보는 듯 하다. 굵은 붓으로 쓱 그어놓은 듯한 눈썹과 입술. 얼굴에서 풍기는 광채에 ‘눈푸른 납자’를 실감한다. 공부가 한창일때의 거칠 것 없던 당당함도 은근히 풍겨난다.
이쯤해서 재가자는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할는지 자못 궁금하다.
“공부는 인간성 회복을 떠나서 따로 있지 않아요. 먼저 가정이 바로 서야합니다. 아이들을 무섭게 생각해야 해요. 애들은 부모가 무엇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어요. 인간성 회복의 근본은 경로사상입니다. 노인들을 잘 받들어야 해요.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치고 복 안받는 사람 없어요. 부처님도 ‘석가를 위하려 말고 아랫목에 있는 너희 산 부처를 받들라’고 하셨어요.”
대선 스님의 효심은 제방선원에 유명하다. 30여년 전, 해제 때 생가에 토굴을 지어 모친을 공양하고 안거 때면 선방에 들었다. 그 토굴이 오늘의 홍련암 청풍선원이다. 20여년 전부터는 홍련암에서 두문불출하며 정진을 이어가고 있다. 공부하겠다며 찾아오는 선객과 일반인들을 위해 요덕사, 오도암 등의 참선 도량을 세워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어머니의 공부는 저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지난해 91세로 가시는 그날까지 공부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경전에 몰두하던 어머니가 65세쯤 눈이 밝아지더군요. 신문글씨도 돋보기 없이 읽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늙었다고 자포자기 하는데 가는 순간까지도 체념해서는 안됩니다. 초발심 못지않게 진(眞)발심이 중요하고 나아가 재발심해야 합니다. 순간순간이 재발심이어야 합니다.”
“요덕사 정진원에는 재가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들의 공부는 어떠한지요?”
“선은 승 속이 없고, 선 후배가 없습니다. 경허 선사의 사형인 허주 영산 스님이 이곳 완주를 지나가가 허수아비를 보았습니다. 스님이 입고 있는 누더기에 덧댈 요량으로 허수아비 옷을 벗겼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어느 보살이 ‘스님, 허수아비는 어떻게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할까요’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재가자들도 공부가 익어가는 이들이 많아요.”
‘더불어 살아야할 이 시대에 함께 풀어야할 화두가 있다면 무엇인지’ 묻자 스님은 단호하게 ‘환경’ 이란다.
“80년대에 환경정화를 해도 늦었다고 했는데 아직도 자연파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산을 헐어내는 것은 내 몸을 도려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의 생명체들이 몇 년 버티기 어렵습니다. 벌써 오염으로 인해 생명체가 병들고 지구가 죽어가요. 시내에 서서 주위를 보세요. 병원과 약방이 즐비합니다. 바로 우리가 지은 업의 결과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참선 공부를 하면 거울을 보듯 훤히 알 수 있습니다.
환경은 멀리서 찾을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생활속에서 먹을 거리만 잘 조절해도 환경오염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사찰에서 행하는 발우공양 정신을 배워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면 나와 이웃, 자연이 살아납니다. 특히 산중사찰에서는 조심 조심해야 합니다. 산 아래로 맑은물을 내려 보내야해요. 이것이 공부고 정진이고 기도입니다.”
“스님, 입으로 말하지 않는 진언하나 들려주세요”
“아직 공부가 시원찮아서 움막하나 지어 다시 정진할까 합니다. 그때 한마디 해 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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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스님은 1958년, 열아홉의 나이로 계룡산 갑사에서 만공 스님의 제자 혜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계룡산 북사자암에서 일대사 인연을 풀고자 생사를 걸고 3년6개월간 생식하며 정진했다. 그뒤 도봉산 망월사에서 10년간 근세 무애도인으로 일컫는 춘성 스님을 시봉했다. 해인사 성철 스님 회상에서도 꼬박 10년간 정진했고 금오, 향곡 스님 등 근세 큰 스님을 두루 찾아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화두일념으로 정진에 매진했다.
20여년전부터, 생가에 토굴을 짓고 속가의 모친을 모시며 두문불출해 왔다.
대선 스님의 철저한 계율과 올곧은 정진은 주위에 알려져 종교를 초월해 공부인이 줄을 잇고 있다. 20여년 이어온 용맹정진(매월 1, 3주 토요일)을 거쳐간 재가 수행자만 500여명. 수봉산 아래 홍련암 청풍선원으로 시작된 수행처는 산내에 요덕사 정진원, 오도암 등 선방만 세 곳으로 늘었다. 스님은 “근래들어 물질풍요와 약해진 근기로 도인이 나오지 않는다”며 “한번 들어가면 10여년간 나오지 않고 생사를 결판짓는 수행처를 두어 개 세워 한국선불교의 맥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모친이 91세로 세연을 다하자 수봉산 승정암터에 사방 8자크기의 토굴을 지어 올해 초파일 이후 다시 3년 결사에 들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