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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 선사가 <육조단경>에서 의정(疑情)을 강조한 말이다. 의정이 간화선 수행의 고갱이이자 간화선 수행의 처음과 끝이란 뜻이다. 심지어 의심이 유발되지 않는 공안ㆍ화두는 아예 죽은 말이란 의미다.
이처럼 간화선 수행에서 핵심이 되는 의정. 이를 주제로 다룬 학위논문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그간 간화선 관련 논문이 다수 발표됐지만, 간화선의 ‘의정’만을 주제로 한 논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논문 제목은 ‘중국선종 수행법에 나타난 의정에 대한 연구-간화선을 중심으로’다. 지난 1982년부터 부산 보림선원, 서울 선도회, 한마음선원 등에서 간화선 실참을 해온 이상호 씨(43ㆍ한강홍수통제소)가 2004년 위덕대 대학원 석사논문에서 의정에 관한 모든 것을 조목조목 짚었다. 의정의 역할과 의의, 간화선 확립 전후에 나타난 의정, 간화선 수행법에 나타난 의정, 3심과의 관계, 조사선ㆍ묵조선ㆍ간화선 등에서의 의정에 관한 입장과 차이점 등을 밝혔다.
이상호 씨를 만나 의정이 왜 중요한지, 또 어떻게 의정을 일으켜야 하는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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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이란 무엇인가. 의심 의정 의단의 개념차이, 그리고 이들을 나눠 설명한 이유는?
→의심(疑心), 의정(疑情), 의단(疑團) 등의 단어는 대혜종고 선사를 중심으로 살필 수 있다. 의정이란 개념이 정립된 종고 선사 이전에 의정과 의심의 의미를 구분 짓기 위해서 나눠 설명했다. 종고 이전에는 의정을 의심이라 했다. 의단은 종고 선사가 화두에 대한 의심에서 그 성격이 좀더 구체화된 개념이다. 의정과 의심 사이에는 다른 개념정의는 없다. 의정과 의단은 종고 스님 이후 간화선 수행법이 세련돼가면서 의정은 화두보다 덜 강조됐다. 하지만 이후에는 의정이 더욱 부각됐다. 화두보다 의정이 강조돼 가는 과정에 나온 말이 의단이다.
▤의정(疑情)이 왜 중요한가.
→의정은 실참 과정에서 드는 의문이다.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생각이다. 즉 다른 생각들이 전혀 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의심이다. 때문에 의정은 ‘깨어있음과 같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깨어있는 순간에 의정이 돈발하기에 그렇다. 그래서 의정은 ‘이것인가 저것인가’란 사량분별적 차원이 아니다. 내적 발로돼 생생하게 깨어있음에 대한 표현이 의정이다.
이것이 간화선 수행에서 의정이 중요한 이유다. ‘깨어있음’ 그 상태에서 의심이 돈발돼 본격적으로 간화선 수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즉 그 깨어있음과 같이 가는 것이 간화선의 의정이다. 의정을 듬으로써 깨어있음이 동시에 함께 작용한다.
▥의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 화두ㆍ공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왜 그런가.
→화두 자체가 이미 의정을 담고 있다. 무엇을 깨달았는지 나와야 한다. 무엇을 깨달았는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화두 자체에는 이처럼 의심거리가 내포돼 있다. 문제에 이미 해답이 담겨져 있는 셈이다. 화두를 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수행으로 연결된다. 때문에 화두ㆍ공안에 의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죽은 수행을 하는 셈이 된다.
▤신심, 분심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특히 의정은 신심과 모순 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본래불성’을 믿는 신심은 의정을 통해 수행해 나아가는 하나의 목적이자 방향타가 된다. 또 의정은 완전한 신심을 성취하기 위한 계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분심은 불퇴전의 끊임없이 주저앉지 않고 나아가게 만드는 에너지원 역할을 한다. 이들 삼신은 하나라도 떨어져서 성립할 수 없다.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어 있고 필수불가적인 관계에 있다. 서로가 서로를 물고 있는 요소들이다. 마치 발이 셋인 솥과 같다.
▥논문 주제가 ‘간화선 수행법에서 의정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다. 그 논지 전개에서 의정을 의도적 의정, 주체적 의정이라고 나눠 설명했다. 그 이유는?
→의정의 연원은 부처님의 근원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화두에 있어 의정을 의도적 의정이라 한다면, 부처님의 근원적 문제의식은 주체적 의정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간화선이 중국선종의 수행법이지만, 그 자체는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불교의 한 줄기다. 선불교라 해서 독특한 수행법으로 달리 특징지을 필요가 없다. 그 뿌리는 부처님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연결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즉 부처님의 근원적 문제의식과 간화선 화두에 대한 의정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규명하기 위해 이처럼 분류했다.
▥최근 각묵 스님이 선우논강에서 “초기불교수행법은 분석적 해체, 간화선은 직관적인 통찰에 있다”고 했다. 초기불교와 간화선 수행법이 같다는 시각과 배치되는데. 이들 수행법은 의정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초기불교의 수행법은 분석을 통한 수행법이다. 접근방법이 다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원적 문제의식과 간화선의 의정은 접근방법상의 의미가 아니다. 간화선의 의정은 화두에 대한 의정으로 시작해 궁극에는 석존의 근원적 의정과 만나게 된다. 깨달음은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이고, 그것과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의정이다. 그리고 이것이 간화선의 의정이 되고, 그 의정을 의도적 의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를 석존의 근원적 문제의식임을 자각케 한다.
초기불교와 간화선 수행법 차이는 번뇌관에서 확인된다. 초기불교는 낱낱이 분류된 번뇌들을 제시했고, 그 분석된 번뇌에 맞게 수행법을 제시했다. 반면 간화선의 수행법은 분석된 번뇌들을 의정이란 말로 다 끌어다 뭉쳤다. 삼독심 등에서 벌어지는 갖갖이 번뇌들을 오직 의정 하나로써 뭉치게 했다.
▥조사선, 묵조선 등에서 의정을 어떻게 보는가?
→간화선과 묵조선의 차이점은 ‘의정의 유무’에 있다. 간화선은 의정을 통해 내가 깨닫고 확인하고 또 동시에 완전한 자각으로 ‘완전한 믿음’을 성취하는 수행법이다. 반면 묵조선은 의정을 통한 깨달음이 없이, 있는 그대로 조사선의 정신을 드러내려는 수행법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통한 깨달음이 의정을 통한다고 강조한다. 깨달음을 가기 위해서는 의정이 있어야 한다. 화두에 대한 의정이 없으면, 묵조선으로 가게 된다. 즉 현성공안으로 가는 것이다. 화두에 있어서 의정이 빠지면 현성공안으로 가는 것이고, 의정이 붙으면 간화선으로 가는 것이다.
▥의정이 다른 수행법에서도 회통할 수 있는가?
→그렇다. 의정은 간화선이든 염불선이든 절수행이든 다른 수행법에서도 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의정은 간화선에서만 해석될 뿐만 아니라 모든 수행법의 단초, 고갱이가 될 수 있다. 각 수행법에 응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앞서 말한 주체적 의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화두에 대한 의도적 의정은 인식의 길과 의도의 길을 끊어버리는데 특징이 있다. 의정이 대부분 수행법의 공통점이 되지만, 간화선에서의 의정은 심로를 끊는 또 의로 언로 등을 끊는다는 점이 다른 수행법에서의 의정과 다르다.
▥의정을 잘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올바르게 의정을 내려면 어떻게 무작정 의심할 수 없을 텐데.
→간화선의 치열함은 화두에 대한 의정에 비롯된다. 삶의 자기문제에서 우러나오는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완전한 의미의 의정은 의도적 의정과 자기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에 치열하라는 주체적 의정이 함께 이뤄질 때 가능하다. 진정한 수행자가 갖는 의정의 모습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그 자체로서의 문제의식으로만 남는다면, 의심을 위한 의심일 뿐이다. 즉 자기 자신의 문제에 치열해야 할 때, 그것은 정말로 화두에 대한 의정과도 연결된다. 자기 자신에 문제에 대한 의심이 없다면 의정이 힘이 약한 것이다. 밑받침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의정이 치열해야 화두에 대한 의정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