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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훼손된 지구에는 해가 갈수록 재앙의 위협이 커지는 상황입니다.
이 속에서 중생들은 ‘인류가 무엇에 의해서 아니 어떻게 하여야만 구제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지요.
지구문제에 관심 있는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연구 노력하고 있지만 좀처럼 해답을 찾지 못해요.
그런데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답은 가까이에 있어요. 바로 불교의 올바른 가르침(正法)에 따른 보살도(菩薩道)의 실천(行)이 그것입니다. 보살도의 실천을 통해 인류를 구하고, 자기도 건질 수 있어요.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보살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보살도는 반야(지혜)에서 나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란 너와 내가 하나 즉 동체임을 아는 것입니다. 반야는 베푸는 동안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행의 최고 형태를 ‘동체대비’라고 합니다.
동체대비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보살의 회향은 일체중생이 다같이 행복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원래 이타행(利他行)이 기본입니다.
이타행은 자비심을 발하여 남의 곤란을 덜어주는 행위입니다. 남을 위한 행을 통해 자신의 번뇌망상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가진 것은 작지만 조금이라도 나눠주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재물이 넉넉해 도와주는 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사찰에 가면 목어가 있지요. 목어는 눈 뜨고 잠자는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눈뜨고 잠자는 중생을 뜻하는 것입니다. 목어를 두드리는 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경책하는 의미가 강하지요.
불자들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경책한 뒤 사고를 전환해야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라는 모든 일상과 작용이 그대로 '도(道)'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 독립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는 상호 관계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물이나 무생물까지도 ‘우주의 대생명’에 의해 살려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 가치는 근본적으로 모두 평등한 것입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보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지니고 있는 그 근원적인 생명들은 서로 상호 공존 공영해야 합니다. 사람만이 지구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석가세존이 입멸한 후 약 2500년간 고승대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생들이 우주의 실상을 증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우주의 실상을 증득한 고승대덕 마저도 언어와 문자의 부족 때문에 그 내용을 설명하지 못했던 관계로, 불교는 자연히 민중과 멀어지고 일부계층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기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욱이 근래에는 서양의 신문명이 휩쓸면서 불교의 세계관이 묻혀버렸습니다.
현대인들은 편협한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물과 무생물은 모두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자연을 아무렇게나 이용하고 소비하고 파괴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인간과 자연은 공존의 원칙을 어기고 지배하는 개념을 가지면서 환경오염은 가속화됐고, 서로에게 불행을 안겨준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 생물과 무생물 할 것 없이 서로가 존중하고 깊은 우애를 가지고 사랑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또 우주 전체의 대조화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다른 생물들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잘못을 즉시 반성하여 바로잡지 않는 한 지구는 갈수록 나락의 구렁텅이에 허우적거릴 뿐 절대로 구제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절대 물질의 풍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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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그 깨달음에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은 팔만대장경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쉽게 얘기하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참선삼매에 들면 우리가 사용하는 20% 의식의 세계를 포함해 4차원의 세계인 80% 무의식의 세계도 관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으면 아득한 과거부터 미래까지 두루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샛별보고 깨달았다는 것은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소리예요. 우주 전체 생명체를 관통시켰다는 뜻이지요. 깨달음은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우주관 인생관을 갖게 될 때 명확해집니다.
부처님은 어떤 형상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실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형상은 없지만 성품은 이 세상에 두루하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있다는 것은 힘과 작용을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보면 영혼이 없습니다.
무아(無我) 즉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식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내가 동일성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마음은 한마음이지만 부모의 행위 때문에 바뀌는 것입니다. 장소와 공간이 다르면 형제의 모양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면 틀려버립니다. 4차원의 세계를 3차원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안으로 아는 내증(內證)이라고 하는데, 즉 자기만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35세에 깨달음을 얻으신 후 45년간 행위로 보여주셨습니다. 의식은 언어가 있지만 무의식은 언어가 없기 때문에 표현을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은 모두 방편인 것입니다. 하지만 방편도 진실함에 기초를 둬야 합니다.
상좌부는 절대절명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만 그대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심입니다.
하지만 대승부는 부처님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진리가 중심입니다.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난행도(難行道, 자력으로 오랜 시간 수행)와 이행도(易行道, 불보살의 원력에 의지해 생활 속에서 수행)의 차이만 있습니다.
현재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참선입니다. 하지만 참선은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일부 계층만 가능한 난행도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일상에서 부처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염불 주력등 이행도가 더 효과적입니다.
염불 주력등 이행도를 하면서도 쉽게 무의식의 세계를 정화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아미타불’ 만 번, 저녁에 ‘준제진언’ 천 번을 고성(高聲)으로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귀로 들어서 정화되고 우주의 파장과 자신의 파장이 일치될 수 있습니다. 염불을 하면서 반드시 덕도 함께 베풀어야 정화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라던가 어떤 일을 회향할 때는 자신의 공덕을 남에게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음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베푸는 것이 바로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남을 위해 수행하십시요. 불교의 이치를 알고 보면 애당초 마음은 비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깨닫겠다는 마음도 결국 집착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복을 얻고 해탈의 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 혜경 스님은
현재 양주 화담정사에 머물고 있는 세수 72세의 혜경 스님은 새로운 포교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스님은 “요즘 불교계에 문제가 많다”며 “가장 먼저 불사 개념이 틀렸다”고 일갈했다. 스님은 “전국 곳곳에 절 짓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며 "지금 같은 시대에는 있는 절을 ‘팔아서라도’ 포교를 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그것이 포교를 본령으로 하는 불교”라고 설명했다.
자연과학, 인문학, 예술학을 아우르는 해박함과 정교한 논리로 부처님의 교리를 쉽게 설명해주는 스님은 신도들을 대상으로 경전을 가르칠 때도 항상 믿음의 차원에서 시작하여 실천행을 강조한다.
스님은 ‘법화천태’ 홈페이지를 개편해 내달에 재개통할 예정이다. 그동안 해놓은 저술과 번역내용을 후학들이 좀더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보완을 거듭해 인터넷으로 서비스 하겠다는 것.
수행하며 틈틈이 경전번역에 주력해온 스님은 <법화경 이야기>(범우사), 법구경 입문(범우사), <법화삼부경>(문학예술사), <우리말 법화경>(도서출판 삼양), <법화경 총설>(도서출판 삼양), <관무량수경>(집문당) 등을 펴냈다.
1933년 전남 여수에서 출생한 스님은 56년에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출가했다. 스님은 법화사에서 혜선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혜경(惠耕)이란 법명을, 야옹 스님에게서 회옹(晦翁)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스님은 재단법인 법화종 유지재단 이사장과 법화불교대학 학장을 지냈다.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법화경>의 권위자로서 경전공부모임을 이끌며 그 가르침을 널리 전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