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3일 만에 여기저기 직장에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 후 남편은 절에도 잘 나가고 불심을 키우며 바르게 잘 살고 있다. 요즘은 불법에 귀의하게 된 것을 남편이 더 고마워하고 있다. 그 후부터 나는 포교에 자신감을 갖고 부처님 앞에 원을 세우고 1년에 한 명 이상에게 꼭 포교하고 있다.
신앙생활도 무르익어 어언 10년이 될 즈음 보름달이 가까워지면 왠지 마음이 설레고 보름달이 그렇게 곱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달빛이 아쉬워 밤을 하얗게 새운 적도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또 달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 때 그 스님, 무원 스님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소낙비가 올 때면 차를 몰고 무작정 달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 때도 그 스님이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용기 없는 바보처럼. 그래도 그 스님 찾아가서 한 마디 말 해 본적도 없고 찾아가 인사 한 번 한 적 없이 그저 먼발치에서 ‘고맙습니다’라고 뒷모습에만 대고 합장하곤 했다. 둥근달이 뜨면 뵙고 싶고 소낙비가 와도 뵙고 싶어, 여름휴가 때 남편을 졸라 구인사에 갔다. 나는 대조사님 앞에 합장하고 “이 연유가 무엇입니까?”라고 하소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중생 불쌍히 여기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무원 스님 장삼 한 벌 해드리고 싶고 그때 고마웠다는 인사도 드리고 싶지만 용기 없는 이 중생 한 마디 말도 못하는 바보입니다. 무원 스님이 저를 부를 때 7대 조사님의 원력으로 불렀겠지요. 그러니 그 스님 옷 대신 대조사님의 탄신일 날 꽃 시주 하시라고 공양금을 올리겠사오니 그 스님을 귀하게 봐 주시고 멋지고 멋진 최고의 장삼을 대조사님께서 입혀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는데 눈물이 비 오듯 흘러 내렸다. 기도를 마치고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천상의 세계를 보았다. 그 세계는 이루 말로도 글로도 표현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내가 보고 느끼던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지 이 세상 부귀영화가 아무리 좋아도 그 순간하고 바꾸지 않으리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누운 지 불과 5분이었다. 꿈인지 생신지 안타까워 몸부림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도록 내 마음에 깊이깊이 뿌리박혔다.
열심히 관음정진하며 부처님 정법대로 살다 가도록 노력하리라.
작은 것부터 실천 수행하여 다음 생엔 꼭 천상세계에 태어나고 싶다. 기도를 통해서 나의 전생도 보았고 일상생활에 약간의 고통도 있었지만 기도로 다 해결되고 항상 평범하게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그 다음해 여름이 다시 왔다. 갑자기 남편이 베트남에 1년 동안 연수를 떠났다. 마음도 허전하고 하안거 주간이라 구인사 3일 기도를 갔다. 4층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나서 멈춰지질 않았다.
기도를 할 수가 없어 바람 쐬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 때 약속이나 한 듯 저 밑에서 무원 스님이 또 올라 오셨다.
스님은 나를 보더니 “보살님,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라고 했다.
눈물을 줄줄 흘린 채 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내 방 몇 호실로 오세요”하고 지나갔는데 우느라고 방 호수를 잊어 버렸다. 식당 마당 마루에 앉아 눈물을 닦고 진정을 취해서 무작정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너무도 신기하게 마중을 나와도 그렇게 정확하게 만날 수 없었다.
스님께서는 나를 보더니 첫 마디가 “보살님, 남편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슬하에 자녀는 몇을 두었습니까?”하고 묻더니만 “보살님이 나한테 묻고 싶은 말 있으면 물어보세요”라고 했다. 그 때 내가 “스님, 그 때 스님이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나를 불렀을까, 그게 생활하면서 늘 궁금합니다”라고 하니 “왜 불렀을까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해요. 다 인연이 있었기에….” 하는 짧은 답변을 한 마디 했다.
“예”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기도실로 향했다. 그 후부터 생각도 의문도 다 묻어둔 채 모두 하심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러자 스님이 보고 싶은 마음도 점점 사라지고 구인사에 가도 그 스님을 마주치는 횟수도 차츰차츰 덜해졌다.
그러나 보름달빛은 여전히 고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그 때는 이런저런 마음을 다 치우고 용맹정진 한다.
그 해 스님을 만난 몇 달 후 내가 다니던 사찰에서 내게 신도회 간부직을 맡아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부녀회장 3년을 마치고 다음해엔 재무부장을 하고, 시골이라 재정이 넉넉하지 못한 그 사찰을 위해 경리일을 4년간 무료봉사했다. 그 때 무원 스님은 구인사에서 사회부장을 맡고 계셨다. 주지스님의 배려로 간부임기를 마치면서 부산에 있는 모 호텔에서 열린 2박3일 간부파티에 참석했다. 너무너무 재미있고 감명 깊었다. 간부파티에는 무원스님이 사회를 보고 대덕 스님들과 전국 사찰 신도회장님들이 참석해 계셨다. 내가 감히 그 자리에 낄 수도 없었는데….
모두가 한 마음이 된 그 자리에서 무원 스님과 함께 한 그 시간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다 같이 손뼉치고 노래 부르던 화합된 그 자리가 감명 깊었다.
열차를 타고 돌아오며 난 생각했다. 부처님은 나에게 이렇게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 주셨는데 나는 과연 신도님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영광을 조금이나마 회향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자비의 종소리가 퍼질 때 나도 한 해를 마무리하며 조금이나마 보람된 일을 해야 되지 싶어 남편한테 뜻을 전했더니 돈을 주며 격려했다. 쌀도 사고 두툼한 조끼며 내의 등을 사서 우리 사찰 신도 중 어려운 보살 집에 찾아가서 선물을 전하며 위로를 했더니 너무너무 고마워했다. 받은 것보다 나누는 기쁨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실천수행을 통해 베푸는 기쁨이 어떤 것인가를 맛볼 때 신앙생활 중 그 어느 것보다도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큰 시주도 해보고, 간부 생활도 하고, 절소임도 맡아보고, 불교 교리도 배우고, 스님 법문도 듣는 등 무엇이나 해봤지만 어려운 이웃이나 장애인, 소외받는 노인들을 돕는 것이 나는 내 맘에 제일로 와 닿고 또 제일 보람차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름대로 꿈과 희망을 갖고 올해엔 대학교 사회복지과에 지원했다.
앞으로는 전문적인 지식도 쌓고 사회에 봉사하며 살 수 있도록 꼭 합격해서 내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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