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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지게 가난한 9남매 집 여섯 번째 딸로 태어나, 밥 세끼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아이가 있었다. 너무나 배 고팠던 아이는 “나중에 크면 누구나 배불리 먹여주는 식당주인이 될 꺼야”라는 꿈을 가졌다.
그리고 병을 앓느라 늘 방안에만 누워 계시는 아버지, 가장 대신 9남매를 키우느라 허리 한 번 펼 새 없었던 어머니도 호강시켜 드리겠노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닥치는 대로 일해 모은 돈으로 큰 식당을 차릴 만큼 자수성가했지만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에 개소한 불교계 복지관의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음식을 받기 위해 서있는 수많은 독거노인들을 보고 “아! 엄마 아빠!”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 때부터 김숙현(48) 씨는 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대표 각현 스님) 독거노인들의 ‘딸’이 됐다. 김 씨는 이것을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이라고 생각한다.
“전생에 언젠가 한번은 마주쳐서 내 부모, 형제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모두가 내 엄마 아빠 같아요. 비록 친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지금은 이분들이 바로 제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죠.”
자원봉사자가 된 이후부터 김 씨는 독거 어르신들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친딸 이상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봉양했다. 그런 김 씨를 의지하는 복지관 어르신들이 한 둘이 아니다. 순이 할머니(96)는 “숙현이는 내 딸이나 마찬가지여. 내 죽으면 49재도 지내주기로 약속했당께”라며 김 씨가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김 씨를 만나는 날이면 “아이구, 우리 딸. 잘 있었냐”며 두 손을 꼭 붙잡고 놓지 못한다.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어느 날, 김 씨는 한 할머니에게 “엄마는 뭐가 제일 먹고 싶어?”라고 물어봤다가 큰 결심을 했다. 할머니는 “복지관 음식은 다 맛있지만 아직 소갈비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어. 소갈비가 꼭 먹고 싶어”라고 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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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갈비 한 번 원 없이 먹여드리겠다고 시작한 장사가 오히려 어르신들을 돌보는 시간을 뺏어간다는 판단이 들자 미련 없이 갈비집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지난해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로에 장어구이집을 열었다. 지금도 틈만 나면 여전히 어려운 노인들을 모시고 와 장어를 대접한다. 김 씨가 하는 일은 그 뿐만이 아니다. 한 달에 두 번은 버스를 대절해 인근 온천지로 모시고 가서 함께 목욕하며 등도 밀어 드린다. 게다가 해마다 김장철이면 김치를 담가 마포구 내의 독거 어르신 60가구에 전달한다. 어르신들이 추운 겨울에 변변한 반찬도 없이 맨밥 먹는 걸 보곤 그 때부터 김장을 담가 나눠드리기 시작한 김장보시는 올해로 벌써 10년째다.
“내가 혼자 김치 한 쪽 먹을 것을, 두 개로 나누면 두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다시 나누면 네 사람까지도 먹을 수 있잖아요. 김장 보시도 ‘혼자 먹을 것을 나누면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거였죠. 내가 김치 하나 더 담그면, 어르신이 한 분 더 드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 씨는 자칫 마음이 흔들릴 때면 신림동 용화사 법당을 찾아 부처님 앞에서 “앞으로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어르신들께 김장 김치를 보내 드리겠다”던 처음의 원력을 다시 다잡는다.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김 씨는 종업원들이 모두 퇴근한 새벽 2시에 홀로 김치를 담그곤 했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담아놓은 무와 배추들을 호스 물을 뿌려 씻고, 절였다. 가로등 밑에서 손발이 퉁퉁 불어터질 때까지 김치 속을 양념하고, 200포기가 넘는 배추 잎 한 장 한 장에 속을 채워 넣을 때면, ‘누가 와서 무채라도 썰어줬으면’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라도 이렇게 안하면 긴 겨울에 어르신들이 무엇을 드실까”라는 생각에 마음을 곧추 세웠다. 김치를 모두 버무리고, 커다란 비닐자루에 포장해 넣고 허리를 펴면 어느새 아침 10시가 되곤 했다. 이제는 규모가 점점 늘어나서 3년 전부터는 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 자원봉사자들의 손을 빌리고 있다. 하지만 김 씨는 여전히 배추와 김장재료, 무, 젓갈 등을 직접 구입해 봉사자들과 함께 담근다. 김 씨의 지극한 어르신 공경 덕분일까. 5년 전에는 마포구청에서 ‘가장 봉사활동을 많이 한 사람’으로 선정돼 표창장도 받았다.
최중석 마포재가노인복지센터 시설장은 김 씨에 대해 “지난 10년간 언제나 자원봉사자가 필요할 때마다 선뜻 달려와 주신 분”이라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전화해서 어르신들 안부를 묻곤 한다”고 말한다. 어르신들을 한결같이 모실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 처음 무료급식소를 다니기 시작할 때만 해도 너무 어려서 김 씨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던 세 아이들도, 이제는 장성해서 김 씨의 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다. 특히 은행에 다니는 막내딸은 김 씨의 통장을 관리하며 매달 복지관에 기부할 날짜를 챙겨서 알려주곤 한다.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는 <잡보장경>의 경구를 좋아한다는 김 씨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며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 무엇보다 김 씨가 실천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타불이’의 이치다. “‘내 것’ ‘내 가족’이라는 집착을 버리면 소외되는 사람도 없겠지요. 그렇게 서로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그곳이 바로 법음의 향기가 퍼지는 살 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이제 김 씨에게 남은 꿈이 있다면, 갈 곳 없는 어르신들과 아이들을 위한 종합복지시설을 짓는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서 1층을 내드리고, 2층에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3층에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함께 가족처럼 지내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아이들은 학교 다녀와서 어르신들과 이야기도 하고, 어르신들은 손주 같은 아이들 재롱을 보며 여생을 외롭지 않게 지내시는 거죠. 멋지지 않나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희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