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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송담 스님이 이날 법석에서 “숭산 스님이 외국인 제자들에게 개는 양고기를 먹고, 사람은 개고기를 먹는다고 가르쳤다”는 부분. 즉각 반론이 제기됐다. 수좌모임인 선림회(공동대표 설정, 정찬, 신용)는 ‘송담 스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백담사 선원장 신용 스님은 “당시 상황은 법거량이 아니었다.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송담 스님은 숭산 스님이 해온 해외포교의 원력을 역설적으로 찬탄했을 뿐, 양고기든 개고기든 단지 방편법문이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럼 법거량이란 무엇일까? 이번 논란을 계기로 왜 법거량을 하는지, 한국불교계의 선문답 현실은 어떤지를 진단해본다.
▥ 법거량(法擧量), 왜 하는가
인가(認可)를 중시하는 선종, 특히 화두참구로 깨달음을 얻는 간화선 수행전통에서 법거량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수행자의 화두타파 유무, 깨달음의 증득 여부 등을 판단할 기준이 법거량에 있기 때문이다.
법거량은 일반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뤄진다. 제자는 자신의 깨달음의 경계를 드러내고, 스승은 제자의 공부됨됨이를 점검한다. 또 이미 깨달음을 얻은 선사들은 깨친 법을 서로 확인하기도 한다. 그래서 법거량을 일반적으로 ‘선문답’이라고 한다.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경계를 드러내고 확인하기에 그렇다.
법거량의 방식은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된다. 한 치의 양보도, 알음알이도 끼어들 틈 없이 치열하다. ‘할’(喝깨우쳐주기 위해 ‘억!’하고 큰 소리를 지름)과 ‘방’(죽비나 손으로 일격을 가해 깨우침을 주는 행위)까지 날린다. 실제로 지난 1998년 백양사에서 열린 무차선법회 때는 법거량에 나선 한 스님이 재가불자에게 선문답 도중 뺨을 맞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법거량의 이 같은 ‘파격성’은 ‘응병여약(응病與藥)’의 원리에 있다. 즉 말, 행동, 소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자가 앓고 있는 병(의심)에 맞춰 약(점검)을 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직지인심의 기연을 제자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 법거량의 핵심이다.
▥ 법거량 이해가 어려운 이유는?
법거량은 언어를 초월한 깨달음의 상징을 다루기 때문이다. 즉 해석 그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유자재한 선의 세계를 문자 또는 말로써 풀어내지 못한다는 의미다.
또 법거량이 갖는 특수성에 대한 몰이해도 한 이유다. 이는 깨달은 사람만이 법거량의 참뜻을 알 수 있는 특성을 간과하기에 그렇다. 여기에 법거량의 행간 의미를 놓고, 논리적인 뜻풀이에 관심을 두려는 점도 같은 요인으로 작용한다.
봉화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은 이와 관련, “법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법거량을 논리적인 사고 틀에서 알음알이로 이해하면서 오해 또는 곡해를 일으키고 있다”며 “짐작과 분별로써 법거량을 해석하려는 태도를 극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법주사 총지선원장 함주 스님도 “법거량은 일종의 법담이다. 세상사 가치 판단을 가늠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있는 그대로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알음알이를 가지고 보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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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재가불자 간화선 수행모임인 선도회 박영재 지도법사는 “법거량은 일종의 ‘응용공안’”이라고 말한다. 즉 법거량은 역대 조사들이 주고받은 공안, 선어록 등의 내용인 만큼, 그것들을 화두 참구하듯 공부하는 것이다.
박 법사는 특히 질문의 주체에 따라 법거량의 유형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먼저 대기설법을 연원으로 한 법거량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 한계와 문제점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박 법사는 공부의 깊이를 헤아려 본다는 측면에서 법거량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문한다. 수행이 깊지 못한 사람들이 ‘왜 마음공부에 미숙했는지’에 대한 반성조차 화두참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 수행자는 늘 스스로 여법한 자리에서 법을 올바르게 드러내고 경계나 말에 쫓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시험ㆍ점검해야 한다고 박 법사는 말한다.
이를 위해 박 법사는 우선 수행자들은 스승을 부단히 대면하면서 정기적인 입실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래야만 실질적인 실참이 이뤄지고, 궁극적으로는 선교쌍수(禪敎雙修)가 된다는 것이다. 또 법문이나 경전, 선어록 등을 통해 불법에 대한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고우 스님도 마찬가지다. 법거량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아 가야 한다고 당부한다.
▥ 최근 화제가 된 법거량은?
2000년, 장성 백양사에서 열린 ‘제2회 무차선 법회’에서 서옹 스님(前 고불총림 방장)과 한 비구 수좌가 벌인 ‘아~악!’ 법거량을 최근 예로 들 수 있다. 이날 서옹 스님은 6천여 사부대중에게 법거량의 진수를 아낌없이 보여줬다.
한 비구 수좌가 “위산 선사가 법어를 하지 않았다면, 스님께서는 어떻게 사자의 기상을 보이실 것입니까?”라며 가르침을 청하자, 서옹 스님은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친 뒤 “아~악!”하며 일갈(喝)하며, “그 따위 소리 하지마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비구 수좌가 “오직 깨친 안목으로라야만 무차법회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서옹 스님은 “그 망상 피우지 말라”하자, 비구 수좌는 “알겠습니다”하고 물러났다.
또 한 비구니 스님이 등단해 “거꾸로 흐르는 바닷물을 다 삼켰으면 스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청하자, 스님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보느냐”고 반문했고, 비구니 스님이 다시 “스님은 대도적이십니다. 도적 중의 도적이시니 이 작은 도적도 알아봐 달라”고 하자 서옹 스님은 “네가 목소리는 크지만 아직 멀었다. 그것으로도 안 된다”고 답했다.
▥ 한국불교계, 법거량 전통이 살아 있는가?
대다수의 선사들은 이미 사리진 지 오래라고 입을 모은다. 아니 사실상 끊겼다고 말한다. 물론 백양사 고불총림이 1998년, 2000년, 그리고 부산 해운정사가 2002년에 조사선(祖師禪) 수행 풍토의 선양과 승속의 구별 없이 깨달음을 점검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무차선법회를 봉행했지만, 여전히 법거량 전통의 복원을 말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진정한 고수는 드물고 앵무새만 늘고 있다’는 지적까지 하고 있다. 간화선이 ‘의리선’(義理禪:뜻만 헤아리는 선 또는 이치로 따지는 선)에 빠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참 없는 법거량의 위험성까지 대두되고 있다.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대원 스님은 “오늘날 한국불교계는 문자선, 의리선, 구두선 등으로 ‘말길’로만 선어록을 외는 죽은 법거량을 하고 있다”며 “법거량 전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말 이전의 소식을 보고 들어 마음자리에 곧장 계합할 수 있는 선문답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진단했다.
대원 스님은 특히 조실 스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수좌들은 물론 재가불자들의 눈을 뜨게 해 줄 명안종사를 길러내야, 비로소 법거량 전통이 복원될 수 있다는 것이 대원 스님의 설명이다.
▥ 법거량은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법거량은 수행자에게 화두참구의 필수 조건인 3심(의심, 신심, 발심)을 일으킨다. 스승이 제자에게 발심의 기회, 신심 증대, 의심 해소 등의 기폭제를 준다. 이를 통해 공부의 진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법거량의 이 같은 가르침은 중국 임제 선사가 스승 황벽 선사에게 맞은 ‘30방’에서도 엿볼 수 있다. 3년을 넘게 공부를 했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자, 임제 선사는 황벽 선사에게 “어떠한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세 번 찾아가 세 번 묻는다. 하지만 족족 30방만을 맞는다.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은 임제 선사는 고한의 대우 선사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한다. 그러자 임제 선사는 “황벽이 그렇게 자비스러운 법을 편다”는 대우 선사의 말을 듣고, “황벽의 불법도 몇 푼어치 안되는구나!”하고 확철대오를 한다.
황벽 선사의 30방 법거량은 제자에게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줬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알 듯 말 듯한 법거량이 주는 강렬한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봉화 각화사 선덕 고우 스님은 “법거량은 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가를 문답을 통해 시험하는 것”이라며 “법의 궁금증을 일으켜 공부하려는 의지를 북돋아줘 조사선 수행점검법의 핵심이 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