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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룡 스님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간간히 서산 마애삼존불의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올해 고희를 맞은 천진불 의룡 스님을 경기도 안성의 죽산 미륵당 토굴에서 만났다.
“난 워낙 건강이 좋은 사람이여” 의룡 스님은 마침 전날 황석공(黃石公)의 고사가 얽힌 중국 ‘장가계’와 교각 스님이 수행했던 ‘구화산’을 둘러보고 왔노라고 했다.
마을 한가운데 서있는 미륵당은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거대한(5.6m) 미륵보살(경기도 지정문화재 제37호) 위로 누각을 엊은 곳이다. 논산 관촉사의 미륵불 보다 크기는 다소 작지만 아기자기한 장식이나 기교는 그에 못지않다. 이 미륵당과 이마를 맞대고 있는 초라한 누옥이 스님의 토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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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자심란야(慈心蘭若ㆍ마음을 자애롭게 하는 곳)’라고 이름 지은 토굴 출입문에는 ‘入此門來 莫存知解(이문을 들어오는 이는 알음알이를 모두 놓고 올 것)’라는 경고문(?)이 큼지막하게 써 붙여져 있다. 선을 드는데 불필요한 근심거리나 알음알이를 들이지 말라는 선가의 경구다.
요즘 근황을 여쭈었다. “선(禪)도 하고, 경(經)도 보고, 그냥 놀고 지내지 뭐, 허허허. 간혹 이곳저곳 다니면서 법문도 하고. 헌데 뭐, 불교는 말로 되는 게 아니니깐…. 그게 다 소용없는 짓인데… 허허허. 이젠 책도 내지 않아. 선현들이 다 잘 해 놨는데 내가 써 봤자 표절 밖에 안 되지. 그래서 이제는 뭐 그런 것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싶어.” 당대의 강백으로 이름 높았던 스님은 이제 일상의 모든 것에서 집착을 놓고 여여한 모습이었다.
의룡 스님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지난해 봄이다. 상좌들의 만류가 대단했지만 기어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동경해 왔던 미륵당의 인연이 스님을 이곳으로 이끈 까닭이다. 스님에게 미륵당은 각별한 곳이다. “사실 이곳 안성은 내 속가 고향이여. 내 외가가 안성인데 왜정 때 이 앞으로 충주까지 다니는 철도가 있었어. 그 시절 할머니랑 기차를 타고 지날 적마다 창문 밖으로 높이 솟은 ‘미륵당’을 봤지. 그 때 이미 멋 훗날 이곳에 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여, 결국엔 소원을 이뤘지 허허허.”
스님의 출가 인연은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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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가 수양버들 한가운데 난 구멍을 지나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한번 꿈틀거리며 오를 때 마다 오색구름이 생겨. 마침 뒤에서 긴 머리를 산발한 도인이 나타나 ‘너 용 처음 보지?’ 하더니 ‘저렇게 용이 구름을 만들며 하늘을 오르는 걸 ‘도운승천(圖雲乘天)’이라고 한다’고 가르쳐 줬지. 그러고는 잠에서 깬 거야. 그길로 용주사로 달려갔지.”
스님은 이미 만들어진 구름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구름을 의지해 하늘을 오른다는 ‘도운승천’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린나이였지만 무언가를 이루려는 인물은 시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깨닫고 출가를 결심한 것이다.
“그 꿈을 꾸고 내가 용주사에 간 거야. 부모님한테 말도 않고 그냥 무작정 가출한거지. 나중에 2년이 지나서 겨우 집에다 알렸어. 내 법명이 ‘의룡(義龍)’인 것도 그런 까닭이야. 은사스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출가의 뜻을 말씀드리니 내 법명에 ‘용’자를 넣어 주셨지. 용꿈 덕분인지 내가 뭐, 대단한 신통묘용은 없어도 평생을 강사로 부처님 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았어요.”
강백으로 일생을 보낸 의룡 스님은 최근까지 직지사 강주소임을 지냈다. 현장 교직자로 오랜 세월을 보낸 스님은 종단의 승가교육제도개혁과 관련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의외로 스님은 요즘 강원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하게 드러냈다.
“요즘처럼 강원 하기 쉬운 때가 어디있어? 공부하려는 사람이 없어 허허허, 그전처럼 죽기 살기로 공부하려는 사람이 있어야 가르치기가 어려운데, 요즘 누가 공부하려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저 허허허 하고 계속 웃는 듯 했지만 이내 날카롭고 뼈있는 말씀을 계속 이어나갔다.
“조계종은 선종이잖아. 불립문자 견성성불인데 뭐 하러 공부해. 경은 배워서 뭐해. 깨달으면 다 해결되는데, 뭐 하러 경을 봐. 이젠 왜 공부 안하느냐고 강사들이 뭐라고 할 수도 없어. 이전에야 강사라고 하면 예우가 대단했지만, 이젠 강사 말을 누가 듣나? 내가 걱정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아. 경(經) 안 봐도, 때 되면 다 깨닫는다고 가르친 일부 선대 스님들의 인과응보니 어쩔 수 없지.” 스님은 모든 것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는 윤회를 누구도 비껴나갈 수 없음을 받아들일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면 인과나 윤회로부터 오는 고통을 벗어나는 지혜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되물었다.
“가혹해 보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부처님 법대로야. 내가 원인을 지어 놓은 대로 지금의 내게 고통이 오는 것이니, 전생에 받아야 할 빚을 이생에서 주고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사회적으로 도둑질이나 나쁜짓 하는 사람, 내 주변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비난만 하지 말고 전생에 내가 닦은 악업의 연장이 이라 생각하면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 않겠어?
거기서 나아가 현생에 스스로 악업을 삼가려는 마음을 가지는 방편이 된다면 더 좋겠지. 좋은 원인은 안 지어 놓고 좋은 결과 받으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게 어디 있어. 결국 몸과 입과 뜻(身口意)을 바르게 하는 게 최고의 방편이여.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해야 해. 이게 해결되면 삶의 고통도 다 해결 되는 거니까.”
그러면서 스님은 인도 최초로 통일 왕국을 이룩한 ‘마우리아(Maurya) 왕’의 전생담을 들려 줬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탁발하러 가시는 길에 소꿉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가 부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참으로 높고 귀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려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모래로 지은 밥을 엎드려 정성스럽게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어. 부처님께서 이것을 받으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아난에게 “이 모래를 가지고 가서 내 방의 허물어진 곳에 바르도록 하여라” 하시고 말씀하시길, “아이가 환희심으로 모래를 보시하였으니, 그 공덕으로 다음에는 국왕이 되어 삼보(三寶)를 받들고 여래를 위하여 팔만사천의 보탑(寶塔)을 세울 것이다”라고 수기를 주셨어.” 스님은 이렇게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선업 쌓기를 권했다.
스님은 미륵당으로 거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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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드물게 여래선을 닦는다. 간화선 중심의 종단풍토에서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살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스님은 누구보다 여래선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내가 보기엔 최상승선은 여래선이여. 여래선는 호흡으로 법륜을 돌리는 거야. 법륜을 여법하게 돌리면 망상심 없이 그냥 삼매에 들어.”
스님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시범을 보였다.
“앉은 자세나 손모양은 일반 참선과 똑같아. 심호흡이 제일 중요해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호흡을 등 뒤로 정수리까지 올렸다가 앞으로 다시 내리는 거야. 여래선에선 화두는 안 해, ‘이 뭣고’는 망상이여. 선은 생각이 없게 하는 건데, 화두를 붙들고 있으면 그 자체가 망상이지. 대신 호흡하는 그 정신은 계속 따라 다녀야 해. 이렇게 계란 모양으로 법륜 돌리듯이 ‘호퇴강(呼退降ㆍ6후), 흡상승(吸上昇ㆍ6후)’을 반복해. 올릴 때는 빠르게, 내릴 때는 천천히 몸안의 불기운을 내리고, 물기운을 올리는 법륜을 반복해서 돌리면 삼매에 금방 들지.”
오래전부터 삼매를 강조해 왔던 스님은 서울 불광동에 ‘삼매정수선원’을 창건해 재가 불자들의 수행을 지도해 오기도 했다. “스님들이 법문하기 전에 입정에 들라 하잖아. 이 입정이 삼매여, 삼매에 들어야 법문을 들어도 제대로여. 부처님이 중생들을 제도할 때 이 삼매의 힘으로 제도를 한거지. 요즘은 이 삼매의 힘이 없기 때문에 법문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말씀을 마친 스님은 기자와 함께 미륵당을 참배했다. 부처님 열반 후 5십6억7천만 년 뒤, 말법 세상을 구제하러 온다는 죽산의 미륵보살은 모든 재물을 끌어와 복을 이룬다는 ‘권오수인’을 취하고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가난한 백성들이 미륵의 영험을 빌었을까? 불황과 실업으로 침체된 경기 때문인지, 수많은 국민들의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2005년 새해,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미륵당을 나섰다.
■ 의룡(義龍)스님은 193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4살이던 50년에 일해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어려서 출가했지만 절집의 생활과 예법, 경전 공부까지 남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익혀 어른 스님의 총애를 받았다. 탄허, 관응 스님에게 경을 배우고 35세 되던 해에 한영-명봉 스님의 강맥을 이어 받았다. 일생을 제방 강원의 강사로 살아온 스님은 2002년 직지사 강주를 끝으로 강단에서 물러났다.
2칸 남짓한 ‘자심란야’ 안에는 스님이 즐겨보는 경전과 불서들이 사방을 빼꼭히 채우고 있다. 스님은 비가 새는 지붕을 수리한 것 말고는 지금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모든 것을 손수 해결했다. 작은 텃밭에 심은 깨는 지난해 소출이 별로였다. 그러나 올해는 더 잘될 것이라고 했다. 흙벽 위로 말린 호박과 손수 만든 메주가 널려있었다. 60년전 처음 출가했을 때나, 지금이나 스님은 여전히 스스로 농사짓고 밥하고 빨래하며 공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