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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서 서울 후암동까지 달리는 108번 버스 안. 정거장을 안내하는 기사의 상냥한 음성이 마이크를 타고 차 안에 울려 퍼진다. 유격대 조교를 연상시키는 검은 제복에 검정 선글라스를 걸친 독특한 복장을 한 기사 강봉권 씨(38). 그는 친절한 안내와 유머러스한 멘트 때문에 버스DJ로 통한다. 그의 방송은 승객들을 즐겁게 하는 힘이 있다.
“요즘 우리 회사에 장갑 한쪽씩 분실물로 접수되고 있는데 한쪽만으로는 쓸 데가 없습니다. 기왕에 놓고 내리실 거라면 양쪽 다 놓고 내리시든가 양쪽 다 잘 챙겨서 하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음을 염두에 두시고….” 강 씨의 재치 넘치는 말에 승객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지고, 108번뇌는 눈 녹 듯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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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 안내와 승객 안전을 챙기는 말은 기본이고 환승 지하철역 정보, 기상안내, 뉴스 속보 등의 다양한 정보가 그치질 않는다. 주말에는 정거장 주변 예식장 안내까지도 곁들여진다.
그가 차내 방송을 시작한 지 올해로 11년이 됐다. 초보 시절 차 안에서 벌어지는 잦은 안전사고를 목격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왔다. 처음 방송을 시작했던 1994년만 해도 승객이나 동료 기사로부터 “쓸데없는 짓 말고 운전이나 잘 하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객의 안전을 위해 하는 일이니 누가 뭐라 하든 관계없다”며 방송을 접지 않았다.
“승객들을 한 번도 ‘손님’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가 내 부모님이고 형제라 생각합니다. 그럼 친절하지 않을 수 없지요. 방송은 내 가족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진심이 통했을까. 지금은 동료 기사나 승객들도 그를 이해하고 환영한다.
강 씨는 자신이 제공하는 정보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매주 한 차례씩 인터넷 등을 통해 혹시 바뀐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인터넷 검색이나 뉴스를 시청하며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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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내 방송에서 강 씨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인사 나누기. 짧은 시간이나마 버스를 함께 타는 소중한 인연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눔으로써 차 안의 분위기를 밝게 하고, 화기애애하게 만들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차에 오르는 승객에게는 물론 하차하는 이들에게도 인사를 잊지 않는 강 씨는 승객에게도 “제발 인사를 나누자”고 말한다. 때로는 “인사를 받지 않는 승객께는 뒷문을 열어드리지 않겠다”며 ‘반협박’도 불사한다. 1996년에는 이 ‘협박’을 진짜 협박으로 받아들인 한 승객이 112에 신고해서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이처럼 강 씨가 인사를 중시하는 것은 독실한 불자였던 부모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모친은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며 하심(下心)을 강조했고, 부친은 “인사해서 굶어죽는 사람 없다”며 “늘 바르게 인사하라”고 가르쳤다.
아내 정영선 씨(35)도 인생의 고비 때마다 정신적인 지주가 돼줬다. 서울 화계사 신도인 정 씨는 남편 강 씨가 격무에 시달려 힘들어하거나 일에 회의를 느낄 때마다 절에 나가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게 도왔다. 강봉권 씨는 “승객들에게 정신적인 여유와 즐거움을 나눠주는 것도 보시행의 실천이라고 믿으며, 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강 씨의 차내 방송이 정보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7년 전 동료 자녀가 백혈병에 걸렸을 때 헌혈증을 모으는 데 방송이 한 몫 했다. 강 씨는 차내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알리고 헌혈증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버스를 타던 학생들이 적극 호응해 300여 장의 헌혈증을 모아 치료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도움에 힘입어 동료 자녀의 백혈병은 깨끗이 나았다.
“동료 자녀를 돕기 위해 시작하고 보니, 개개인의 수중에 있는 헌혈증들을 모으면 백혈병이나 소아암 환자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후로 헌혈증을 계속 모으게 됐죠.”
그렇게 모은 헌혈증은 지난해만도 300여 장에 달한다. 모은 헌혈증은 방송국에 전달해서 필요한 곳에 쓰이도록 한다. 지갑에 두툼하게 들어 있는 헌혈증을 꺼내 보인 그는 “그저 모아서 전달하는 것뿐이다”며 ‘선행’이라는 말에는 손사래를 친다.
강 씨는 투철한 서비스정신을 인정받아 2002년부터 교통연수원에서 버스운전자를 대상으로 ‘현장체험사례’라는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민의 발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승객을 가족처럼 대하며 올바른 기사 상을 정립하자고 호소한다.
“기사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는 기사 자신의 자각과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 큽니다. 기사 스스로 바른 모습을 보여주면 기사에 대한 인식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그의 꿈은 개인택시를 갖는 것. “개인택시는 모든 운전자의 꿈입니다. 개인택시를 내 시간을 낼 수 있으니 적극적인 봉사도 가능하고, 고객을 가까이서 더욱 친절하게 모실 수도 있지요. 동료들과 힘을 모아 일본의 MK택시를 능가하는 서비스를 이끌어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