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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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특별상 <기도에 관한 몇가지 소고>上


99년 28살의 늦은 나이로 대학입학시험을 치루면서 두 가지 서원을 세웠었다. 하나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3000배를 하는 것이었다.

원하던 대학에선 합격통지서가 오지 않았다. 다만 채플이 필수과목이던, 입구의 커다란 십자가가 내 어깨를 짓누르던 기독교 대학에 입학금을 접수해 놓았을 뿐이었다.

절 하러 대구로 떠나면서 다짐했다. 다니겠노라고. 열심히 배워 거듭나겠노라고.

3000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을 열어주던 어머니가 먼저 건넨 건 인사말이 아니었다. “네가 원하던 대학에서 전화 왔어. 등록금 가지고 9시까지 입학사무처로 들어오래.”

작년 여름, 해인사 수련회에 참가하러 가면서 베갯머리에서 기도를 올렸었다.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를 해인사로 보내달라고. 그가 만약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라면 기꺼이 그의 리어카를 끌어 줄 터이니 그를 내게 보내달라고.

행동의 제약이 많았던 일정에도 불구하고 사경 후에 찾은 해우소 앞에서 나는 놀랍게도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여자와 함께. 작년, 나는 내가 일하던 유치원의 ‘재위탁평가’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탈락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경력 10년차인 베테랑 교사로서의 자존심은 차치하고서라도 부처님 하시는 일이 여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무렵 다라니 독경을 하였는데 마음이 모아지질 않았다. 기도의 첫 번째 자세는 하심(下心)이요, 마음을 비우는 것인데 당시 그러하질 못하였다. 여러 가지 욕심이 마음 곳곳을 뛰어 다녔다.

불교사회복지재단에서 우리를 놓았을 무렵 재단에서 집 가까운 불교유치원으로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제안해 왔을 때 나는 흐느끼며 재단을 떠나왔다. 원장님이 떠나신 자릴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그 구질구질하던 동네의 아이들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데 나는 3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올해 초 골수 기독교 신자인 새 원장님이 부임해 오셨을 때 하루의 일과를 브리핑하며 신임 원장님을 도우려는 결심은 원장님과 의견충돌을 겪으면서 대립하기 시작했다. 만자 반지에 옴자 목걸이를 하고 단주를 손목에 차고 원장실에 들어갈 때면 원장님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해 하셨다.

주임요청을 거절하고 영아반을 배정받았을 때 영아반 주임까지 거론하는 원장님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유아반 전문’인데 영아반으로 내려가는 것이 강등처럼 느껴져 싫었다.

교사들의 중재로 사직서는 반려되고 나는 영아반 교사가 되었다. 불만족스러웠지만, 돌이켜보면 홀가분하고 가벼운 시간이 찾아왔다. 모든 세력과 기득권을 내놓고 일에서 멀어지고 마음도 비우니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원장님께 과잉 충성하느라 아이들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고 혹시 밤새 불이라도 날까 3층까지 시설점검을 다니며 코드를 뽑던 열정도 없어졌다.

그러나 꼼꼼하고 독실한 현 원장님은 그 어느 원장보다도 유치원을 청렴하게 운영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불교가 하지 못한 일을 기독교가 한다면 그 또한 법이지 아니한가? 내가 걸어온 길이 부끄럽지 않았으매 당신 또한 그러하리라.

영아반은 교실 당 교사가 2인인 덕분에 휴가를 편하게 쓸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 전부터 하고 싶었던 기도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비라 기도였다. ‘아비라’는 나의 숙생에 풀어야 할 업(業)이라. 몇 해 전 여름,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갔던 암자에선 광목으로 법복을 해 입고 땀 흘리며 법신진언을 외우는 수승한 신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진풍경이었지만 그날 이후 내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되었다.

의사는 인대가 끊어진 다리 때문에 ‘절을 해선 안 된다’는 판정을 내렸지만 아비라 기도를 젊을 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무리한 휴가를 내어서 가야산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는 뜻밖의 고수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하루 전날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적광전, 관음전에 모두 사람이 차서 정념당에 짐을 풀었다. 정념당에선 주로 대구, 부산의 나이 지긋하신 여신도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고심원에서 성철대종사와 같은 큰 스님을 생전에 뵙지 못하고 입적에 드신 후에나 찾아뵙는 것이 못내 서러워 어린애처럼 앙앙거리며 울었는데 밖에서 그 광경을 보고 측은하셨는지 조계사 불교대학출신이라던 보살님이 한마디 하셨다.

“ ‘북 진제, 남 송담’이라고 공부하고 싶으면 큰 스님들 찾아다니며 공부해 봐.”

어느 신도에게 물었다.
“아기를 낳겠느냐? 아니면 아비라 기도를 하겠느냐?”
여신도는 대답했다.
“차라리 아기를 낳겠습니다.”

아비라 기도는 아기를 낳을 때의 고통만큼이나 힘들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겁이 덜컥 났지만 법복 하나에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온 초심자를 모두 반겨주셨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하였는가? 인터넷으로 뽑은 아비라 기도 안내문을 들고 씩씩하게 산길을 올라갔지만 뜻밖의 난제에 부딪혔다. 선배에게 물어물어 구입한 법복은 일단 복장 불량으로 찍혀서 해우소 갈 때를 제외하곤 사용할 수가 없었다. 저고리가 달린 광목 법복만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 중 설마 나 하나쯤이야 하던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여비를 털어 구입하자니 서울 갈 차비가 딸려서 막막해 하고 있을 무렵 보살님 한분이 한 번도 입지 않은 자신의 여벌옷을 빌려 주시어 기도 내내 그 옷에 의지하여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계속)
서경자(서울시 은평구 불광1동) |
2005-01-28 오전 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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