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선언. <육조단경(六祖壇經, 이하 단경)>의 핵심인 ‘불성의 자각사상’을 담은 한 구절이다. 이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육조 혜능 선사의 강렬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또 달마 대사로부터 육조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흐르는 ‘자성귀의(自性歸依)’ 사상의 집약이다.
<단경>의 실천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일체선악에 따른 ‘죄의 성품(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본래 자성이 청정함을 통찰하는 ‘무상참회(無相懺悔)’법을 일러주고 있다. 그야말로 마음의 정체를 샅샅이 밝혀주고 앞으로의 공부 길까지 소상히 제시하고 있어, ‘마음공부의 로드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수행의 길잡이가 되는 <단경>이 최근 출ㆍ재가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다. 서울 불교전문강당 산하 경전연구위원회가 고우 스님(봉화 각화사 선덕)을 강사로 초빙, 오는 3월 11일부터 6개월간 매월 둘째 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서울 옥수동 대승암에서 <돈황본 육조단경> 강좌를 연다(011-497-8018).
또 서울대 교수불자모임 불이회 우희종 교수(02-880-1262)가 매월 둘째 주 일요일 서울 관악구 고시촌 정혜사에서 <육조단경 강설>을 열고 있다.
‘깨달음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는 <단경>이 선수행자에게 각광받는 이유와 그 핵심수행법이 무엇인지 고우 스님, 성본 스님(한국선문화연구원장), 우희종 서울대 교수, 김윤수 부장판사(파주시법원) 등을 1월 29. 31일 만나 들었다.
▥“<단경>은 중도ㆍ연기사상의 선체험 안내서”
-<돈황본 육조단경> 강의하는 각화사 고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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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ㆍ연기는 ‘양변을 여의라’는 뜻이다. 즉 ‘나다 너다’라는 이원적 사고를 벗어나라는 말이다. <단경>은 이처럼 주객을 초월한 자리를 ‘불성을 본다’고 표현한다. 또 ‘본래 성품을 본다’고 한다. 혜능 선사가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양변을 여읜 자리가 바로 불성임을 보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중도ㆍ연기가 <단경>의 핵심이다. 갈등, 대립, 투쟁의 극단적 삶을 평화적이고 자유로운 삶으로 바꿔놓은 지혜인 것이다. 양변을 여읜 중도ㆍ연기적 삶은 현재 지구상의 종교, 인종, 민족,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한 갈등을 치유하는 선적인 처방전이 된다. 내 민족, 네 민족, 내 국가, 네 국가 등으로 갈라보는 시각을 함께 더불어 산다는 중도적 관점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단경의 핵심은 돈오견성(頓悟見性)”
-<돈황본 육조단경>을 역주한 한국선문화연구원장 성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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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지금, 여기, 자기’를 늘 들여다본다는 ‘일행삼매(一行三昧)’다. 그래서 <단경>이 풀어내는 방식은 철저히 실천적이다. 대승불교의 반야와 불성사상이 ‘생활선(生活禪)’의 형태로 녹인 점, 불성사상의 구체적인 실천사상으로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으며, 무주(無住)로 근본을 삼은 것이 그 실례다.
여기서 무념은 부처로서의 실천행으로 모든 생각을 하지 않고 의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생각이라도 어느 한 경계나 사물에 대해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무상은 상을 떠난 것으로 자기 색신 속의 자성 삼신불에 귀의하게 해 청정한 마음이 바로 자성불임을 확신하면서 바로 지금 즉신성불할 것으로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무주는 사람의 본래 성품이 한 생각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결국, <단경>은 대승불교의 모든 사상을 선의 실천으로 정립한 선불교의 성전이라 할 수 있다. 반야와 불성사상을 통합, 선수행으로 전개하도록 새로운 선불교의 실천체계를 확립했다. 또 조사선이라는 생활종교를 중국의 대지에 정착시킬 수 있는 사상적인 토대를 확실하게 마련, 선불교의 금자탑을 세운 경전이다. 이런 측면에서 <단경>은 선수행의 지침서가 된다. 선수행의 틀과 그 실천체계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돌아보라”
-서울 정혜사에서 1년여 간 <육조단경> 강설 중인 서울대 우희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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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단경>은 ‘깨달음이란 이렇고 저렇고’하는 설명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되돌아 볼 것인가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마음 공부하는 이들에게 그 공부의 방향성을 명확히 짚어주고 있다. 짧고 간결한 <단경>은 마치 할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자상하게 말해주는 방식으로 개념화된 불교로부터 진정한 부처님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일러준다. 이렇게 <단경>은 불성에 대한 직접적인 방향제시를 통해 형식화된 선을 타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특히 마음공부가 왜 중요한지부터 어떻게 마음을 보라는 것까지 마음공부의 ‘틀’을 잡아주기 때문에 선수행 뿐만아니라 다른 모든 수행법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다만 너무 상세해 공부하는 이들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단경>에서는 ‘돈오무수(頓悟無修)’가 근본이다. ‘활연히 깨친 것에 닦음이 붙을 자리가 없다’는 의미다. 단경에서의 수행(修行)이란 닦음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심행(心行)을 닦으라는 말로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는 말 외에 다름 아니다(迷人口念 智者心行). 오직 자신의 마음을 보라는 <단경>의 사상은 유마의 좌선의를 되살려 ‘앉은뱅이’ 선으로부터 일상의 삶 속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활선(活禪)’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에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의 수행 지침서가 된다.
▥“자기 부처를 바로 본다는 선언”
<참불교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한-육조단경 읽기> 펴낸 파주시법원 김윤수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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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단경>은 마음공부의 탄탄한 교과서가 된다. 선수행을 하는데, 기초적인 불법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마음은 원래부터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처럼, <단경>은 불성에는 남북이 없고, 불성의 성질은 청정공적하다는 개념으로 선수행의 기틀을 제시해준다.
그럼,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는 더럽고 깨끗하다는 양변 대립적 청정한 마음의 실체성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마음은 연기적 존재이고, 공성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불성은 중생심의 본질적인 자성청정심을 말하며, 연기법으로서 서로 의지해 일어나는 세계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생 속에 부처의 작용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단경>에서는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으니 자불(自佛)이야말로 진불(眞佛)’이라고 말하면서, 부처를 천국에서 인간으로, 피안에서 차안으로 끌어내렸으며, 모든 이들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였다. 아울러 중생이 부처이고 번뇌가 보리며, 즉심즉불의 본래불을 깨달아 자기 부처를 바로 보아야 한다는 평등선언을 한 것이다.
특히 <단경>은 재가자에게 ‘깨달음의 가능성’을 열어줬다. 즉 혜능 선사가 15년간 유발행자로 지내오면서 ‘거사도 깨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일상사 그대로가 선’이란 <단경>의 메시지가 재가자가 일상생활 속에서도 선수행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