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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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특별상 '슬픈눈물과 기쁜눈물'(下)

조급한 마음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청해 먹으면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야만 했다. 병명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양방, 한방 모두 원인을 찾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정신병동에 입원실이 마련됐다.

몸은 점점 야위어 갔다. 학교는 운전하는 이웃 아주머니들이 교대로 데려다 주어서 1주일에 한 번 정도 출석할 수 있었다. 초조해진 부모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다. 다 큰 자식이 힘을 못 쓰고 방 한가운데 길게 누워있는 꼴이라니. “병명이라도 있어야 약을 써보기라도 할 텐데…”라며 어쩔 줄 몰라 하셨다.

IMF와 함께 맞은 이 아픔은 가정을 송두리째 어둡게 했다.
부모님은 불심(佛心)이 깊으셨다. 아버지는 아침에 회사로 출근 할 때마다 내게 오셔서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묵묵히 쳐다보곤 하셨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부처님 말씀을 실생활에 응용하고 계시던 터였다. 눈빛으로 어떤 ‘믿음’을 내게 보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과자 한 봉지 어린 손에 들려주고 서둘러 초하루 법회에 다녀오시곤 했는데, 그 후 무슨 재일(齋日)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열심히 다니셨다. 아버지 또한 이때 불교에 심취하여 스승님을 모시고 경전공부를 끊임없이 하고 계셨고, 조석으로 <금강경>을 독송하고 계실 때였다. 답답한 마음이 된 어머니는 기력이 떨어져 눈을 감고 쓰러진 내 손과 다리를 주무르며 <금강경>을 무심히 읽고 계신 아버지를 향해 퉁명스런 말씀을 건넸다.

“여보! 다 큰 자식이 쓰러졌는데 그 경전만 읽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유?”

그 말씀에 충격이 크셨는지 아버지의 <금강경> 독송은 그 날로 끝을 맺으셨다.
나는 심하게 아픈 곳도 없이 점점 마르고 야위어 갔지만 정신만은 초롱초롱 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나를 일으켜 세웠으나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돌출구가 보이지 않는 우환이 이어지자 무속인과 절을 찾아 헤매게 되었고, 나는 나대로 인근 사찰인 법주사에까지 가서 막연히 부처님께 매달려보는 도리 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매일 어디 가서 들었는지, 아들에게 좋다는 것은 다 했다. 산에 가서 빈다거나, 세 가지 나물을 해서 대문 밖에 나가 접시까지 깨버린다거나, 1백여 집을 다니며 쌀을 3홉씩 구걸하여 떡을 하여 부처님께 올린다거나, 부적을 사다가 집안 구석구석 붙인다거나, 용하다는 스님·법사·보살·무속인 등을 찾아 인근은 물론 청주, 서울 등지까지 백방으로 뛰셨다. 재(齋)라는 것을 수없이 지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영가(靈駕)를 어머니께서 받아들이는 굿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조금은 몸뚱이를 추스를 수 있었다.

졸업을 하는 둥 마는 둥 4년을 마치고 학사훈련을 받으러 입소하게 되었다. 훈련 12주중 4주 기초훈련을 마칠 때쯤 왼쪽 무릎에 통증을 느껴 퇴소 당했다. 이때 몸무게는 49㎏이었다.
노심초사 걱정하시던 부모님은 내가 허약한 체구를 이끌고 입소한지 한 달 만에 집 대문에 들어서는 것을 보시고 많이 놀라셨다. 나는 집에서 매일 자전거를 타며 체력을 올리기 위한 운동을 했다. 6개월 후 다음 기(期)에 다시 입소, 이번에도 4주 만에 총을 들고 훈련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퇴소하게 되자 내 병은 지휘 장교는 물론 학교장까지 알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학창시절 온통 장교의 꿈만을 키워왔던 나는 쉽게 포기 할 수 없었다. 다시 6개월 후 학사장교가 아닌 사관학교를 지원해 용케 합격을 하였다. 학사장교 훈련보다 배나 힘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죽고 싶었다. 다시 무릎이 시려와 연병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때, 문득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퇴를 신청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산 속 절로 떠나 세월의 기약 없는 기도에 돌입하고 아버지 혼자서 나를 안타깝게 맞아 주셨다. 곧장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지만 무릎이 왜 시린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2년이란 허송세월이 흘러갔다. 집에는 이미 사병 입대 통지서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적(兵籍)카드에 나의 이력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사병 훈련소에 입소하자마자 소대선임, 중대선임, 학생장등의 일을 맡아 하게 됐다. 이런 공로로 이병(二兵)으로서 훈련소장(少將) 표창장까지 받았다. 이때 집에서는 그동안 학비로 지원 받은 군장학금을 목돈으로 갚기 위해 집을 은행에 저당 잡힌 상태였다. 또한 병명 없는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끌어댄 부채도 컸다.
입대 전 나 혼자 무속인을 따라가 기도를 해본 가락이 있어서 자대(自隊)에 배치되자마자 군종병(軍宗兵)을 자원했다. 일요일마다 목탁을 치며 사병을 이끌고 사단 법사님을 힘껏 도왔다.

처음으로 맞은 부처님 오신 날.
사단으로 파견된 나는 군법당(軍法堂)에 가서 향과 촛불을 켜고 3천 배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건장하고 인물 좋은 어떤 분이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눈과 입 속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작은 구름 같은 물체를 끄집어 내셨다. 그때의 청량감과 시원함은 꿈을 깨고서도 생생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그 날 지장보살 불상을 모시고 재를 올렸다고 하셨다.

나는 건강한 모습으로 만기 제대를 무사히 마쳤다.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절에서 기도(祈禱)중이신데 올해가 어느덧 5년째다. 아버지께서는 직장을 다니시며 집에 미륵부처님을 모셔놓고 정진(精進)중이시다.

법주사 마당에 큰 자태로 우뚝 서 계신 미륵부처님을 우러러 보며, 내 자신의 끝없는 욕심에 끌려 길을 길 인줄 모르고 다녔던 교만했던 지난날을 뒤돌아본다. 황금과 명예를 향해 끝없이 돌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따르며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고, 끝없이 자기를 반성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이제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지금 내 상황에 기쁨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게 됐다. 병은 내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계기를 주었다. 이것이 신앙의 문턱으로 진입하는 동기가 되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앞으로는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도록 하는 일대 전환점이 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

또한 불보살(佛菩薩)님들이 지난날 어린 나를 해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로 거듭날 수 있도록 자비스런 일침을 가하셨음을 고마워하며 오늘은 미륵부처님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나무미륵존여래불.(끝)
김성식(대전시 중구 부사동) |
2005-01-19 오전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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