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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선불교의 흐름을 이끈 간화선이 최근에는 재가불자의 선수행 열기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재가불자에게 불교수행법에 대한 관심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대상이 바로 ‘묵조선(默照禪)’이다. 묵조선은 대혜종고와 동시대를 살았던 굉지정각(1091∼1157) 선사에 의해 체계화된 선수행법이다. 연원은 인도의 관법(위빠사나)과 달마와 혜능 선사의 좌선관 및 선수행과 직결돼 있다.
그럼, 선수행법의 양대 산맥을 이룬 간화선과 묵조선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1949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전국의 제방 선원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하고 화개선원(선원장 상광)에서 재가불자에게 선수행법을 17년째 지도하고 있는 지유 스님에게 1월 16일, 대중법문에 앞서 여쭸다. (031)591-7744
▣ 간화에서는 묵조를 ‘삿된 선’(邪禪)이라 하고, 묵조에서는 간화를 ‘깨달음을 기다리는 선’(待悟禪)이라 비판합니다. 간화선과 묵조선은 무엇이 같고 다릅니까?
- 서로의 입장이 다를 뿐이다. 사실 두 개 다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 간화의 입장에서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반박도 맞다. 또 ‘본래부터 깨달은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데(照), 고요히 좌선수행으로 일관하면 된다(묵)’는 묵조의 말도 맞다.
일장일단이 있다. 다만 같은 것은 깨달음의 영역이다. 수행방편이 다를 뿐이다. 간화는 화두일념으로, 묵조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공안이라는 현성공안(現成公案)으로 선을 알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간화든 묵조든 그 자체는 선이 아니다. 때문에 어떤 것이 맞고 틀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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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화선은 ‘화두일념’을 강조합니다. 반면 묵조선에서는 ‘현성공안’을 중시합니다. 그럼, 공안관(公案觀)에서 차이점이 드러나게 되는데, 어떻습니까?
- 옛 선사들은 공안이라고 하지 않았다. 모를 때 정답을 일러줬다. 듣는 사람이 정답에 이르지 못했을 때, 선사가 문제점을 해결하라고 공안을 줬다. 누가 오든 차별하지 않고 자기가 깨친 바 있는 그대로의 공안을 보여 준 것이다. 다만 듣는 사람이 일러주는 사람과 마음이 같지 않아서 의심이 붙었다. 그래서 묻는 사람이 자기 혼자서 가만히 무슨 뜻이 있는가를 깊이 파고든 것이다. 이를 사량분별해서는 안 된다. 끝도 없이 의심하다보면, 생각이 없어진다. 이렇게 하는 것이 화두공부다. 그래서 묵조의 현성공안이든 간화의 화두일념이든 어떤 공안이 낫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 간화든 묵조든 ‘본래성불’이란 측면에서 ‘깨달음의 내용’이 같다는 의미인데, 그럼 수행방편의 차이 때문에 묵조와 간화가 다른 것입니까?
- 지금은 간화다 묵조다 해서 가지가 갈라져 있다. 불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것인데,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간화다 묵조다 따질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심시불(心是佛)을 아는 것이다. 즉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사량분별로 이를 알려고 한다. 이 사량분별은 ‘유지(有知)의 지(知)’다. 그건 깨달음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알고 있을 뿐이다. 깨달음이 사량분별에 가려 있어, 이를 끊게 하는 화두공안이다. 알고 하는 그 마음 하나 가지고 유지의 지를 ‘무지(無知)의 지(知)’로 바꿨을 때, 자기 앞에서 전개되는 우주만물이 진리 아닌 것이 없고, 법문이 아닌 것이 없게 계합된다. 이것이 묵조선의 현성공안이다. 반면 간화는 화두일념이라는 방편으로 본래성불을 이루려는 수행법이다.
때문에 간화로 해야 할지 묵조로 해야 할지 고민의 문제가 나온다. 깨달음을 위한 방편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명답이 있다. 자기 마음이다. 선은 내가 내 자신을 알아차리면 끝이다. 중요한 것은 성불의 원력은 바로 직지인심에 있다. 또 이를 통한 견성성불에 있다. 다른 방법이 필요 없다. 단지 방편에 따라 묵조가 필요하면 묵조를, 간화가 필요하면 간화를 할 뿐이다.
▣ 묵조선에서는 ‘회광반조’를 중시합니다. 묵조선의 수행요체는 무엇입니까?
- 욕심을 부려 싸움을 했다고 하자. 하나는 악으로 하나는 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근본은 똑 같다. 하나는 서두르고, 하나는 거칠 뿐이다. 싸움을 하다가도 ‘이것이 아니다. 또 무엇 때문에 이러는가’를 돌이켜 깨치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아무리 간절하게 간화선을 하더라도 그것의 근본을 돌이켜 보지 못하면, 천년만년이 가도 무명(無明)에 살 뿐이다. 눈이든 귀든 묵묵히 마음을 관조하면서 돌이키면, 모두가 자기라는 것을 깨치게 된다. 근본을 살펴보는 것이 회광반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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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은 항상 깨끗한 색깔만 비추지 않는다. 색깔이 더럽든 그렇지 않든 관계가 없다. 거울은 온갖 물건과 색깔을 비추지만, 그 속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는 마음을 비우는 것과 같다. 마음을 확인하려면, 서있든 앉아 있든 선 아닌 것이 없다. 즉 거울 그 자체는 좋고 나쁜 것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를 비춘다.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처럼, 일할 때는 일하는 그 뿐이고, 걸을 때는 걷을 뿐이다.
▣ 요즘 들어 형식화ㆍ공식화된 공안들이 정작 재가불자들에게는 간절한 의정(의심)을 잘 일으키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특히 좌선 중심의 묵조선을 비판했던 간화선이 오히려 좌선주의에 빠졌다는 말도 흘러나오고 있는데요. 어떻습니까?
- 좌선은 묵조해야 할 모습을 들여다보는 행법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모습은 없다. 일할 때는 바로 일을, 놀 때는 노는 모습을, 울 때는 우는 모습을 들여다 볼 뿐이다. 마치 거울이 그렇다. 거울은 특정 색깔에만 비추지 않고 모든 색깔을 비춘다. 거울 자체의 작용을 알아차려야 한다.
간화라는 것이 결국 의심이다. 의심이 없이 그냥 앉아 있으면,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간화의 입장에서 묵조를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묵조에서는 화두를 들면 골치만 아프지 정작 깨달을 사람이 없다고 비판한다. 때문에 묵조는 좌선을 안정된 공부라고 주장한다. 서로에게 장단점이 있다. 어떤 것이 맞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본인 각자에게 있다. 깨달음은 워낙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깨달음이 실제로 눈앞에 있지만, 이를 믿지 않기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크게 의심해야 크게 깨닫는다는 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 그럼 묵조선이 신심, 분심, 의심 등 3심이 부족한 재가불자에게 현실적인 선수행법으로 다가올 수 있을 텐데요. 재가불자들이 묵조선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 일본 조동종의 묵조선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 했다. 즉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 했다. 1시간 앉아 있으면 1시간 부처님이고, 10시간 앉아 있으면 10시간 부처님이 된다고 했다. 이를 ‘지관타좌(只管打坐)’라 했다. 깨달음이니 뭐니 일체 구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다. 도원 선사는 깨달음의 심정을 ‘실제 보니 있는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말귀를 못 알아서 문제다. 실제 깨닫고 보면, 구하지 말라는 그 말은 딱 맞는 가르침이다. 그러니 재가불자들은 본인이 확실히 알고 골똘히 깊이깊이 알면, 서산대사가 홀연히 닭 우는 소리에 문득 깨치게 된 것처럼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때문에 직접 실참을 해야 한다. 직접 구름을 해치고 푸른빛을 열어봐야 한다. 열어보기 전에 구름 밖에 빛이 푸르고 맑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열어보지 않으면 어둑 캄캄한 구름 밑에서 빛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엇보다도 간화선이든 묵조선이든 깨달음의 내용은 본래성불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스님은 “묵조니 간화니 하는 분별심 버리고 회광반조하라”라고 강조했다. 묵조선이든 간화선이든 ‘본래성불’을 깨닫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선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묵조니 간화니 하며 수행법의 우열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스님은 선수행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그 요체가 있다고 설했다. 선은 내가 내 자신 속의 불성을 알아차리게 하면 그 뿐이라는 설명이다. 즉 선은 본래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이고,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묵조든 간화든 수행법은 마음의 정체를 확인하는 것인 만큼,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이 ‘해도 한 바가 없이’ 물들지 않고 생활하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