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앞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관광객이 빽빽이 들어찼는데도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하염없이 절을 하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서글픔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육신의 힘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간듯하여 배를 웅크린 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올 때는 버스를 타고 왔는데, 갈 때는 기력이 다 떨어져 기다시피 법주사 일주문을 나서서 영업용 택시를 탔다. 간신히 택시 문을 열면서도 속으로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강한 의지와 끈질긴 집념을 불태우며 살았다 해도 원인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그 괴로움과 맞서야하는 정성과 힘의 초점을 어디에다 맞춰야할지 그것부터 막막했다. 이해 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막다른 길목에서 맞부딪힌 느낌이었다. 누구라도 좌절감과 불안과 공포로 마음이 가득 차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변의 조언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올바른 신앙,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충고와 권유대로 열심히 따랐지만 상황은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때의 심정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인간의 두뇌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그냥 주저앉는 기분이었다.
부모님은 택시비를 준비해 대문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다. 병명도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내다가 큰 사찰을 찾아가는 병든 아들을 도울 수 없는 심정은 얼마나 가슴 졸이고 안타까웠으랴?
나는 어릴 때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체격이 컸다. 언제나 제일 뒷자리를 배정 받았고, 나를 힘으로 대적할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나는 꿈을 무관인 육군 장교로 정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키지도 않은 목표를 세워놓고 보니 스스로가 너무도 대견했다. 친구들 앞에서 잘난 체를 하고 장교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며 말을 할 때는 누구도 나의 이론을 따라 올 자가 없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헬스클럽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며 체력관리에 힘썼다. 학업성적은 중위권에 머물렀다.
부모님은 공부보다 체육관에 열심인 나에게 반대는 하지 않으셨고, 때때로 공부에 대해 방향제시를 하며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인정하고 밀어주셨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겨우, 장교가 되려면 체력도 중요하지만 공부 또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주위 친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부모님을 졸라 과외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고3이 되어 해군 사관학교에 시험을 쳤는데 영어점수가 턱없이 낮아 보기 좋게 떨어졌다. 이때부터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좌절감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려하니 죽을 맛이었다. 나는 대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육군 헬기 조종사 시험에서도 낙방하고 나서야 담임선생님과 상의한 후 성적에 맞는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을 진학한 후 학군사관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당장 신청했다.
학업성적, 체력검사, 신원조회를 마치고 8월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고 한없이 기뻐했다. 더구나 장교로서 장래가 보장되고 4년 동안 군(軍)장학금을 준다니 얼마나 좋겠는가? 이렇게 받는 장학금은 졸업 후 군복무를 하면 급료에서 공제되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자력으로 대학을 다녀 가정형편이 어려운 부모님에게 크게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체적으로 내 친구들은 은연중 군 입대를 꺼려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어서 빨리 세월이 흘러 빛나는 장교복을 입고 싶다고 생각했다. 장교가 된 멋진 모습을 상상하면 도취되곤 했다. 친구들은 내 생각과 달랐지만 그렇다고 정면으로 나의 의견을 반박하지 못했다. 당시 내게는 그들이 꿈도 없고, 희망과 목표도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더위 먹은 것 같이 몸이 나른하며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병원에 갔는데 급성 A형 간염이라며 10여 일간의 입원을 권했다.
그동안 건강하다고 자부해 왔던 내가 쓰러지다니… 지켜보는 부모님 앞에서 황당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피곤하여 약국 문을 자주 드나들며 한 학기를 마쳤다.
이듬해 봄.
집에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학교 옆에서 후배들과 자취를 하려고 했다.
첫날.
후배들과 자취방에서 보내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 없었다. '이러다 사람이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후배들을 깨우지 않고 혼자서 응급실에 도착하여 입원을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님께 연락하면 크게 놀라실 것 같아 그냥 참고 날이 밝아서야 연락을 했다.
응급실에 실려 오는 다양한 사람들 중에 내가 끼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뚜렷한 이유 없이 어정쩡하게…
부부싸움을 하다 가스를 폭발시켜 화상을 입은 사람, 부모님 싸움에 진절머리가 난다며 농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한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내뱉는 소리는 모두 공통되게 '살려 주세요!'였다. 의식적으로 죽으려했던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어 살려달라는 허약함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튿날 어머니께서 한 걸음에 달려 오셨다.
그 후 지속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웃으며 장난도 쳤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 날부터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음식물만 먹으면 토했다. 입맛도 없어졌다. 보름 만에 몸무게가 15㎏이 빠져 헬쑥해졌다. 넘길 수 있는 것은 물과 멀건 죽뿐이었다. 어서 이 병을 떨치고 일어나 학교도 가야하고, 체력도 길러 군장교도 되어야 하는데, 나는 거꾸로 가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영양가 있는 음식을 청해 먹으면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