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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나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게 없습니다. 4~50여년전 해인사 강주시절이나, 주지소임 볼 때나, 동국대에 있을 때나, 늘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삼장교해(三藏敎海)와 선배들이 남겨 놓으신 한국불교 일천칠백년자료들이 늘 나의 의미 있는 작업장이었습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해주고 갈 일이 너무나 많아서 시간이 아까워요.
나는 한가한 청복(淸福)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연구원에 출근하여 외눈박이로 정진하는 우리 연구원들의 작업 살펴보는 등 원고를 정리하고, 저녁이면 경국사로 돌아와 여러 시간 작업합니다. 사전작업은 공중(公衆)에게 언약한 내 평생의 원력이니, 부지런히 하여 대중에게 회향하여야 하고, 일천년의 보물창고, 한국역사속에 겹겹이 쌓여있는 불교사의 지층들을 풀어놓을 일 등에 마음이 바쁩니다. 연구원에서는 한 열시간, 경국사로 돌아와서는 일곱에서 여덟 시간 정도 작업합니다.
▲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특별한 건강비결이 있으시다면?
- 건강은 비결이 따로 없습니다. 요즘 웰빙이니 하는데 의미 있는 일에 열중하고 도덕적 중심을 지키면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단지 지구환경이 크게 오염되고, 욕심과 자본으로 얼룩진 먹을거리가 개인의 노력과 관계없이 공중의 건강을 해치고 있지요.
그러나 진흙 밭에서 자기만 좋은 것 골라먹는다고 건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몸보다 내 주변을, 나의 마음보다 주변의 마음을 챙기는 것이 궁극적으로 건강의 비결이 아닐까요. 아직은 크게 불편한 곳이 없어요. 그래도 신심의 균형을 위해 이틀에 한 시간 정도 대학로 주변 산책하고, 출퇴근 때는 일부러 버스타고 다닙니다. 버스타면 손잡이에 스트레칭도 되고 걷는 시간이 많아 좋아요. 세상사는 모습도 보고.
▲ 경제가 그 어느 때 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든 경제난을 이겨내기 위한 지혜를 부처님께 구한다면 어떤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 가난과 고통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50~60년 대를 생각하면 그래도 오늘이 너무 풍요롭지요. 문제는 절대빈곤층 등 생사의 안전망을 벗어난 곳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져서 큰 문제입니다. 안전띠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누고 보살펴야 합니다. 나라의 정치나 정책도 전향적으로 이곳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한편 근면하고 정직한 국민의 의식과 행동도 매우 중요합니다. 복되게 산다는 것에는 반드시 인과가 있어요.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것들이 쌓여 부패하고 있거나, 게으르면서 늘 남의 탓하는 것이나 모두 불안과 가난의 인과응보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아함경>에서 사회의 안전망을 지키는 재가자(在家者)의 3대0강령으로 보시(布施)와 지계(持戒) 그리고 생천(生天)을 강조하셨지요. 서로 나누고, 근면하여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 복된 세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 최근 행복론이나 화를 다스리는 법, 무소유에 관한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책을 통해서나 일상 생활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쉽게 찾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또한 인내심이 부족해 서로 의견이 조금만 달라도 화를 내고 다투는 경우가 많은데요. 순간적인 화나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화가 나지 않는 세상, 불행이 없는 행복한 세상, 소유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상, 모두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불법의 가르침을 엄격히 들여다보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법이 근본입니다. 영원히 화내지 않고, 행복하고, 소유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은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탐욕(소유)과 진심(불화)과 치심(우매함)의 삼독이 세간의 평상심이기 때문이지요. 삼독 그 밖의 세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뜨거운 불 속을 잘 견디어 지나가는 길을 가르쳤지요!
계, 정, 혜 삼학(三學)은 불 속을 지나가는 견고한 갑옷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버릴 것과 지킬 것을 지혜롭게 선택하고, 공력을 키우기 위해 삼매의 힘을 기르는 등 남다른 시간을 투자해 수행해야 합니다. 불교는 수행의 기술을 전승하는 것을 본분으로 하기에, 분별이나 지식으로 들어가는 학문과 다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수승한 가르침이며 또한 귀중한 전통입니다.
모두들 유행에 빠지지 말고 선지식을 찾아 금강석같이 수행하세요!
▲재가자들의 수행열기가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맹목적인 ‘선 수행’ 추앙도 부작용을 낳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짚어 주십시오.
- 좋은 일입니다. 앞서 지적했지만 선수행을 맹목적인 것으로 보지만, 우리 천년의 수행전통을 잘 배워 계승하려 하기보다 이런저런 곳에 쉬운 방편을 찾기도 하네요. 남방 위빠사나의 수행열기도 만만치 않지만 지도편차가 심하여 걱정입니다.
법을 배워 이어간다는 것은 매우 엄격한 일입니다. 부처님 법에는 반드시 선지식과 그 선지식에 의해 전승되고 검증된 고전들이 있습니다. 1000년에 걸친 삼장의 주석과 대장경의 유통에는 이러한 공증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공인되지 않은 수행서들이 대중지도를 혼란스럽게 하고, 수련되고 성숙한 법문과 지도 등 수행풍토진작에 주의를 귀울여야할 일이 많습니다. 그나마 교단 내외에서 공적인 장을 열어 대중토론도 하고 서로 연마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저희 연구원에서도 이런 데에 책임을 느껴 고전수행논서들을 선정하여 역주작업에 들어간지 몇 년이 됩니다. 우선, 위빠사나 수행논서 중 고전에 속하는 '빠띠삼비다막가역주', 선수행의 대중규범서 '선원청규역주', 한국간화선의 가장 오래된 법문 '진각국사어록역주' 등을 꾸준히 작업해서 출간하는 뜻도 여기에 있습니다.
힘이 들어도 생사(生死)를 거는 자세로 탁마하고 몰두해야 수행이라 할 수 있지요.
▲ 높은 수행열기에 비해 불자들의‘책 안 읽는 풍토’는 여전하다는 우려가 높습니다. 이러다보니 불서 판매율이 점점 줄어들어 불교 출판사들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좋은 불서들이 많이 안나오고 있는 실정이어서 안타까운데요. 이런때일수록 불자들이 꼭 읽어봐야 할 경전이나 불서를 권해 주십시오. 또 흔히 경전은 어렵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경전을 읽거나 공부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요.
- 경전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 어렵다는 경계가 문제지요. 김을 굽거나 김치 담그는 일이 시어머니는 그냥 놀면서 하는 일인데, 밖에 일하는 며느리는 하기 어렵고 하기 싫은 일입니다. 줄 맞춰 벽돌 쌓는 일이 옆집 김씨에게는 즐겁고 쉬운 일인데, 글만 쓰는 선비에겐 신기하고 어려운 일이 듯이 불자가 본분이다 하여 전공을 하려 하면 어렵지 않아요.
그저 세간에서 보통사람들이 즐기는 일 다하고 나서 하려니 어려운 것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그간 자기도 모르게 즐겁고 쉬웠던 관습들을 여지없이 포기해야 합니다.
한가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욕망하는 99가지 일들을 버리세요. 그러면 쉬워집니다.
▲만하 스님과 성월 스님, 경염 스님, 자운 스님까지 이어져 온 범어사 율맥을 계승하고 계신 큰스님께서는 지난해 8월 해인사에서 전통 율맥을 전하는 전계식도 여셨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계율’을 ‘구습(舊習)’으로 치부하거나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출ㆍ재가를 막론하고 현대인들에게 계율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 계와 율은 선정과 지혜를 출생시키는 불모(佛母)입니다. 수행을 앞서 말했지만 계율이 근본이지요. 관습이라든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과 행위들은 모두 숙업(宿業)과 나쁜 습관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우선 계는 개인적으로는 지범지계(止犯持戒)입니다. 악습이나 무지한 행업을 그치고, 새로운 습관과 행동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공업(共業)에 기초해 규범을 수행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계율입니다. 개인과 개인, 인간과 자연, 스승과 제자, 수행자와 단월의 관계 등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번뇌들을 통찰하고 제어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공동의 규범입니다.
한국불교는 통일신라시대 대승불교의 폭격이나 다름없는 불은(佛恩)을 입었습니다. 원효스님의 저술만 해도 <화엄종요> <법화종요> <무량수경종요> <이장의> 특히 대승규범서인 <범망경지범요기> 등 대승근본경전이 모두 주석되었습니다. 우리민족은 일천년이나 이전에 빛나는 수행교과서를 수지한 셈이지요. 보물이 있으나 갈고 닦지 않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식인들도 서양도덕책 베끼기에 바쁘고, 승가도 제소리하기에 바빠 태산같은 지혜가 닫혀 있어요. 가르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애써 배우고 연구하지 않을 뿐입니다.
▲ 최근 인터넷의 발달과 핸드폰의 일반화, KTX 등 속도와 변화를 추구하는 흐름이 거셉니다. 이러한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면 ‘낙오자’소리 듣기 십상입니다. 속도만능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런지요?
- 요즘 느림의 철학으로 대안을 삼기도 하는데, 의식의 흐름은 세간의 어떤 속도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일념(一念)이 만년(萬年)이요 만년이 일념이라 하였으며,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 하였습니다. 불자라면 자신감과 의연함을 갖고 현상을 바라보세요, 아무리 빨라도 ‘풀잎에 이슬’입니다. 마음으로 중심을 잡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면 되겠지요.
▲ 스님께서는 지난 50여년 간 ‘학승(學僧)’으로서 학문 정진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배움의 길을 가는 후학들을 위해 당부의 말씀을 주십시오.
-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는 것은 공중(公衆)에게 사사로운 나를 버리고 공공의 정신과 요익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한 큰 사건입니다. 즉 공중에게 의무를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자존(自存)과 의무(義務)를 지키기 위한 남다른 노력정진이 필요합니다. 잡기나 잡사를 거두절미하고 삼장(三藏)과 삼학(三學)에 전념하여 푸른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이보다 더한 인생(人生) ? 복전(福田)이 어디 있습니까. 이 인연을 베푸신 부처님과 역대 선지식의 은혜를 갚아야죠.
▲ 새해가 되어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나이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 나이는 세월의 다른 이름일 뿐 우리의 실상과 관계없습니다. 본분사(本分事)에서 바라보면 나이는 드는 것도 느는 것도 아니지요. 바람이 지나가는 긴 길의 시작과 끝을 한번에 바라볼 수 있듯이, 마음에는 동서(東西)나 고금(古今)이 없습니다.
천진(天眞)에는 오직 안(內)과 밖(外)의 경계가 모두 사라지고, 광활하여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광명(光明)의 법계(法界)만이 현현할 뿐입니다.
지관 스님은
1932년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1947년 자은 스님을 은사로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득도 했다. 1955년에는 해인사 강원 입교과를 졸업했으며, 1970년부터 1972년까지 해인사 주지를 엮임했다. 이후 72년부터 74년까지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77년 동국대 정각원장, 80년 동국대 불교대학장, 1984년 동국대 교육대학원장을 거쳐 86년에는 동국대 제 11대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동국대 명예교수 겸 동국대 이사, 조계종 원로의원, (사)가산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스님의 저서로는 <가산불교대사림 총 15권> <사집사기> <능엄경약해> <한국불교소의경전연구> <요경서설>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