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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나를 완전히 지배해온 것은 아니다. 나는 집과 차와 예금통장과 직장과 가족과 친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엇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나는 무엇이 목말라 그렇게 하염없이 뛰어왔을까?
평생 나를 움직여온 것은 나의 ‘마음’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마음을 알 수 없다. 나는 나도 모르는 어떤 것에 의해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 믿음 하는데, 나는 믿음만큼 말은 쉽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에 어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턱 믿어지지 않으니 나는 영악한 존재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어서 공부를 했고,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것은 먹고 사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를 아는 데는 쓸모가 없었다. 나는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기웃거렸다. 다들 훌륭하지만, 문제는 내가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산란한 마음은 안정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평생 마음의 안정을 추구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진 것’과 ‘아는 것’으로는 얻어지지 않고, 결국 ‘믿는 것’을 통해서만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물질이 넘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온갖 지식이 가득 차 있는 내 머리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종교인들이 부러웠다. 어쩌면 그렇게 믿어질 수가 있는가? 그러나 알고 보니, 그 많은 종교인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믿고 있는 사람은 만 명 중에 하나, 둘 있을까 말까 했다. 예컨대, 어느 양심적인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기독교의 진정한 ‘믿음’은 불교의 ‘깨달음’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믿음이란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러나 신비롭게도, 이렇게 의심 많고, 머리가 복잡하고, 행동은 산만하고, 가진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내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믿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람이다!”고 믿어지는 사람, 나는 아직 미완성이지만 그리고 그 분도 미완성이지만, 적어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그 둘의 지향점이 내가 그토록 헤매며 찾아온 ‘안심’에 가서 딱 꽂히는 사람, 그런 분을 발견하니, 나는 믿음이 가서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은 참선을 하는 스님이었다. 나에게 종교는 중요치 않았다. 요즘은 종교조차도 너무나 타락해있기 때문이다. 오직 진실된 말과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기준이지, 무슨 고고한 타이틀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 분을 통해 참선은 철학과 과학과 예술, 심지어 종교마저도 넘어서는 인간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만사를 제치고 서울 가회동 육조사 선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날이 변화되어 가고 있다. 그 자세한 과정은 인터넷 불교신문인 ‘붓다뉴스’에 칼럼을 통해 연재하고 있다. (http://www.buddhanews.com:7878/community/khg) 인생은 만남으로 결정된다. 열린 마음을 주고받는 기적은 스승과 도반과 도량이 갖춰진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육조사에서 이 셋과 만남을 통해 ‘안심’을 얻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다음 주에는 내가 진행 중인 ‘진리의 실험’의 자세한 내용을 소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