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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박사’로 불리는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학습기억현상 연구단 신희섭(53) 단장. 보안이 철저한 KIST 연구실의 복잡한 실험장치에 둘러쌓여 있던 신 단장은 과학자의 냉철한 모습을 떠올릴 사이도 없이 편안한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곧바로 마음의 과학적 정의를 묻는 질문에 그는 ‘뇌는 곧 마음’이라고 너무도 간단하게 말한다. 지난 91년 미국에서 귀국한 뒤 막연했던 불교 공부에서 선(禪)의 세계로 빠져들었다는 그의 말에서, 이미 단도직입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선객(禪客)의 말투가 느껴진다.
“마음은 유전자와 뇌의 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이 오감으로 느낄 때 뇌 내부의 현상도 함께 변합니다. 저는 뇌에 변화가 생기면 사람의 외모마저도 변할 거라고 생각해요.” 뇌 작용의 핵심을 설명하는 표정에는 진지함이 가득하다. 생명과학과 선(禪)의 접맥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그에게는 모든 연구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인 셈이다.
최근 일반인들의 뇌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면서 신 단장의 연구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유전자가 뇌세포에 영향을 미쳐 인간의 정서 및 행동을 유발하기까지의 과정을 밝히고 있는 그는 요즘이온통로가 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몰두하고 있다. 현실에 응용하자면 학습기억능력 향상이라든가 정서불안 해소에 관한 연구에 중심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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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단장이 얼마나 ‘뇌와 마음’의 상관관계를 파헤치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 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그의 정열은 항상 ‘최초’의 연구성과라는 타이틀을 얻을 정도로 뇌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일구어냈다. 2003년 3월 ‘PLC베타4’유전자가 생체시계의 시간정보를 신경에 전달함으로써 생체리듬을 생기게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검증한 일과 2002년 2월 공포감을 조성하는 단백질 유전자의 최초 규명, 2001년 12월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발표된 간질과 운동마비증상에 관련된 유전자를 세계에서 첫 발견한 것 등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이런 걸출한 연구결과는 평소 참선을 통한 마음 비우기와 집중(止), 관찰(觀)의 힘에서 비롯됐다. 텅빈 마음에서 뜻밖의 창조적인 지혜가 저절로 샘솟았고, 고요하면서도 깨어있는 마음을 통해서는 관찰의 힘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
참선과 뇌 연구를 종횡으로 교차분석해 가고 있는 그의 외길 인생은, 인연의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왔다. 그는 어릴 적부터 생명에 관심이 많아 서울대 의대를 거쳐 지난 78년 미국 코넬의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 의대를 선택할 때,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과 연구한다는 두 가지 그림을 그렸다. 의대를 졸업할 무렵 환자치료는 적성에 안 맞다는 걸 발견하고 연구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의대시절, 신경해부학을 좋아한 그는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뇌의 발생에 대한 연구에 빠져들면서 평생의 화두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지난 91년 한국으로 돌아와 2001년 여름 KIST로 옮겨오기 전까지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어려움도 겪었다. “막 귀국했을 땐 억원대가 들어야 하는 연구에 고작 천만원대 연구비가 나오고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별다른 성과는 없어 힘들었죠. 그렇지만 ‘왜 이 길에 들어왔나’라는 고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자신의 연구에 매달릴수록 매력을 느끼고, 이 무한한 마음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록 불교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때 자주 다닌 절이 불국사와 오어사, 보경사 등이다.
“불교는 마음을 다루고 있는데 마음이 곧 뇌입니다. 유식학(唯識學)에서 외부의 자극 없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감각에 포함시켰다는 것이 독특했어요. 눈을 감으면 외부 자극 없이도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떠오르는 현상 같은 것이죠. 뇌의 작용 말입니다.”
뇌를 연구하다 보면 불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신 단장은 참선을 자신의 뇌 계발에까지 접목시키고 있었다. “신경과학이란 것이 불교 특히, 선과 굉장히 통한다고 느낍니다. 저 스스로는 좌선으로 뇌를 계발하려고 해요. 물론 궁극적인 목적은 대상에 끄달림이 없는 완전한 해탈을 꿈꾸지요.”
신경과학자에게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그는 입적한 성철스님(조계종 종정 역임)의 열성 팬이다. 성철스님의 <선문정로> <백일법문> <육조단경> <신심명> 등을 숙독하면서 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좌선과 108배를 하고 있다. 때로 출장을 갈 때면 ‘마음에 와닿는 곳’을 찾기 위해 일부러 차를 타고 나가서라도 절을 찾는다. 선원(禪院)도 찾아보고, 분위기가 맞는 다실(茶室)에서 그윽한 향을 맡으며 차를 즐기기도 한다. 최근 작가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을 읽고 거기 나오는 경허스님의 삶에 흥미를 느꼈다는 그는 무애(無碍)의 경지에 다다르고 싶다고도 했다.
뇌 연구를 통해 깊은 선의 세계까지 탐구하는 그이지만, 뇌과학의 응용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의 친근한 접근을 주문한다. “뇌과학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받아서 들어오는 지식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공부를 하려는데 집에 분란이 있으면 잘 안되잖아요. 뇌가 학습능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정서에 영향을 주는 곳이 문제가 생기면 학습능력을 발휘하는 신경회로에 영향을 줍니다. 모든 게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참선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뇌를 좀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장기적인 연구과제라고 밝혔다. 그리고 불교 교리를 신경과학적인 부분과 연결시켜 보통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겠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오는 10월 동국대 불교대학원 초청강연회와 관련 저술 활동이 본격적인 시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