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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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유심조’ 알면 견성의 한발 내디딘 것"
다시 듣는 종성 스님 법문

팔만사천 법문 일체중생 근기따라 두루적용
들어서 믿고 배워서 이룰지니 ‘불심이 곧 공덕’
“옛 어른 가르침에 나를 비춰보고
오늘의 나를 옛 어른 가르침에 비춰보라”

종성 스님.
불자님들은 ‘불교는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깊히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선법문을 듣는 것은 즐기면서 ‘선법문은 어려워서 들어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봉천동에 임제선원이라는 조그만 토굴을 마련하고 사는데 거기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중에 대학교수 부부가 자주 찾아 오는데 그들에게는 아들이 한명있습 니다. 그 어린 녀석이 어버이를 따라 절에 와서는 스님의 법문도 듣고 어른들 따라 참선을 하기도 하고 그런단 말이지요. 그래서 어른들이 그 어린녀석에게 물어봅니다.

“너 스님 말씀을 알아듣냐?” 그런데 그 어린녀석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는 건 알고 모르는건 모르는데요.” 참 명답이지요. 어린 아이의 속이 이렇듯 야무집니다.

불교는 어려움 속에 쉽고 쉬운 가운데 어려운 겁니다. 제대로 알고 나면 어려움도 없 고 쉬운 것도 없는 것이 불교이고 선인데 그 어렵다는 생각에 발이 묶여 한발도 앞 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불쌍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 녀석의 대답이면 불교가 어렵다 선법문이 어렵다 하는 불자님들의 푸념을 다 사그 러뜨릴 수 있는 것이라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것이 오히려 정칙입니다. 듣는 사 람마다 다 알면 모두 다 해탈성불 했을 것입니다. 어렵고 모르는 가운데 그걸 알려 고 애쓰다 보면 어느날 툭 터지는 것이 부처님과 역대조사들이 가르치신 참도 리입니다.
중국 5가7종의 법안종(法眼宗) 제3조인 영명연수(永明延壽)스님의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1백권의 <종경록>을 저술하신 스님은 문자와 종지에 통달했는데 그 스님의 <유심결> 한 구절을 들어 보십시오.

문이불신(聞而不信)이라도 상결불종지인(尙結佛種之因)이요
학이불성(學而不成)이라도 유개인천지복(猶蓋人天之福)이라
불실성불지정인(不失成佛之正因)이고 수호불망자(守護不忘者)는
황문이신학이성(況聞而信學而成)하여 기공덕(基功德)을
기능도량(豈能度量)이리오.

듣고 믿지 않아도 부처의 종자를 맺을 인연을 갖는 것이고 배워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 복이 인천을 덮을만 하니 부처의 바른 인연을 잃지 않고 수호하는 자는 오히려 들 어서 믿고 배워서 이룰지니 그 공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불교가 어렵다 선법문이 어렵다 하는 말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


알 건 모르건 듣는 것만으로도 성불의 씨앗이니 말입니다. 연수스님은 이 <유심결 >에서 ‘선법문이 잠시 귀에만 스쳐도 그 공덕이 무량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도 이 제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거나 책을 보실때면 이 말을 잘 기억하시고 어렵다는 함정에 스스로 발목을 잡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에서 전해 오는 우리 속담에도 “선방 문 고리만 잡아도 지옥 안간다”는 말이 있으니 다 이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영명연수 선사에 대해 잠깐 더 말씀 드릴까요. 그 스님은 출가전에 높은 벼슬을 했 던 사람입니다. 자사를 지냈는데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쯤 되는 벼슬이었습니다.

종성 스님.


중국 에서의 도지사란 큰 겁니다. 그 넓은 땅의 지도자니까요. 아무튼 그는 자사였는데 한 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굶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국고 (國庫)를 헐어 기민을 구휼해야 할텐데 자사라도 중앙의 허락이 없이는 국고를 헐 수 가 없었습니다. 절차를 밟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당장 굶주린 백성들은 그 절 차를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선참후계(先斬後啓)라. 먼저 국고를 헐어 굶 은 백성을 먹이고 난뒤 중앙에 그 절박한 상황을 보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자사는 법을 어긴 것이 사실이므로 참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형을 집행하는데 형리가 보니 그 자사가 죽음의 문턱에서 너무나 태연자약하고 얼굴빛이 좋거든요. 형리는 ‘이런 대 인을 죽이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죄다’라고 다시 상소해 자사를석방시켰습니 다. 자사는 그 길로 절에 들어가 불법에 귀의 했던 것입니다. 속세의 그 험난한 흉년 에 목숨을 걸고 기민을 구휼하려던 그 그릇이 바로 큰 스님의 그릇 이었음을 알 수 있 는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얘기를 다시 돌려, 불교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양면을 잘 보면 하나로 통하고 그 하나마저 버리면 그 자리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한 말씀만 들어도 그 앞에서 모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 의 법은 만대의 중생에게 고르게 적용되는 절대진리 그 자체인데 세월이 가고 시절인 연이 변할 수록 그 가르침을 즉각에 깨닫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법구생폐(法久生弊)라. 법이 오래가면 폐단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법이 변하여 폐단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법은 법으로 여여한데 시절인연이 변화하 여 폐단을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스님들이 화두를 내리는 겁니다. 노파심절(老婆心切)로 만들어 내리는 화 두에 의지해 일체의 번뇌와 사량의 분별을 끊어버린 진면목의 세계에 이르라는 것 입니다. 화두가 어려운 것은 바로 그 화두에 매진하여 최상의 이치에 이르라는 것입 니다. 불교공부가 그렇다고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어렵다 쉽다를 놓고 따지는 것이 화두가 아닙니다. 화두란 그 속에 일체법계의 길을 다 갖추고 있으며 팔만세행을 비 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활대에 비유되는 것은 그 가르침이 일체중생의 근기를 따라 두루 적 용되기 때문이고 조사의 가르침을 활줄에 비유하는 것은 팽팽하고 곧은 면을 강 조하 기 위함입니다.

화두를 깨치는 것은 팽팽한 활줄의 긴장을 툭 끊어 버리는 찰나적인 법열의 온전 한 체득입니다. <벽암록> <무문관> <임제록> <염송>과 같은 책들은 하나같이 조사 들의 화두를 적어두고 있습니다. 그 화두 속에 가득한 진리의 본체를 알아내는 일이 선수행의 목표입니다. 옛 어른의 가르침에 나를 비춰 보고 오늘의 나를 옛 어른의 가르침에 비춰보라(고교조심(古敎照心) 심조고교(心照古敎)>고 했습니다.

‘경(經)’ 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어록(語錄)’은 조사님들의 말씀입니다.

그 옛 어른의 가르침에 오늘의 나를 비춰 보면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화두란 의심입니다. 화두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고 나를 의심하는 것이고 부처와 조사를 의심하는 것이고 법계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큰 의심이 큰 진리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든다는 것은 의심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이 풀어지 면 팔만 세행이 다 내것이 되는 것입니다.

재미난 화두 하나 얘기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얘기지만 그 의심 을 풀기란 쉽지 않습니다.

일러,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노파가 젊은 스님 한 명을 모셔다 암자를 지어 주고 의식수발을 들며 공 부 에 매진토록했습니다. 20년을 하루같이 스님을 공양하여 공부하게 한뒤 노파는 어느 날 밥상을 딸에게 가져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딸에게 은밀히 뭔가를 시켰습니 다. 딸 은 밥상을 가져다 스님 앞에 놓고 어미가 시킨대로 스님에게 답싹 안겨들었 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스님, 이런때 기분이 어떠십니까?”
“삼동(三冬)에 더운 기운이 있을리 없고 고목이 찬 바위에 의지함이다.”

딸은 어미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노파는 노발대발하며 암자에 불 을 지르고 스님을 쫓아 버렸습니다. “내가 여태껏 큰 마구니를 키웠구나”라는 탄 식과 함께 말입니다.

참 이상한 노릇이 아닙니까. 노파는 왜 그랬을까요. 의심이 나지 않습니까. 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화두란 조사들이 파 놓은 허방다리(함정)입니다. 그 다리를 건너야 참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까딱하면 깊고깊은 허방다리에 쑥 빠지고 맙니다. 잘 건너야 합니다. 반 드시 의심하는 만큼의 깨달음이 있어 마침내는 꽃이 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현생 에 그 꽃을 못 피우면 내생에 피울 수도 있으니 조급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노력하 고 정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발심자경문>도 ‘종사나 법사의 법문이 어렵고 거칠더라도 그것을 허물잡지 말 고 잘들으면 얻을 것이 많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렵다느니 쉽다느니 화두라느니 경전이라느니 이런 것을 다 말해도 불교는 오직 마 음 심자(心字) 한 자를 아는데 그 구경의 목표가 있습니다. 명심견성(明心見性)입니다.

마음을 밝혀 본래 진면목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구경목표라면 화 두의 최종 목표이고 경전의 최종 목표일 것입니다. 마음을 아는 것이 법계를 아는 것이니 그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종성 스님.
명심견성에 이르는 세가지 목표가 또 있으니 그 구체적인 목적을 이루면 구경의 목표에 도달한다 할 것입니다. 전미개오(轉迷開悟) 이고득락(離苦得樂) 지악수선(止惡 修善) 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미개오란 미혹함을 벗어던지고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내는 것입니다.

미혹은 집 착에 휩싸여 사량분별하며 악업을 지을 뿐입니다. 그 미혹을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용기와 정진이 없이는 마음을 밝힐 길이 없습니다.

이고득락이란 모든 중생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고통을 벗어 던지고 즐거움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크면 클 수록 마음 닦아 해탈성불하려는 원력도 크게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고통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지악수선은 전개미오하고 이고득락하기 위해 반드시 행해야할 도리입니다.
선업을 닦지 않고 고통을 벗어날 수 없고 미혹을 깨달음으로 전환시킬 수 없습니다. 악업 짓는 일을 그치고 선업 짓는 일에 매진하는데서 마음 밝히는 대도가 열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고 마음으로 멸합니다. <화엄경>의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의미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명심 견성의 한발은 내디딘 것입니다.

한발을 내디딘 사람이 백발 천발 만발을 가는 것입니다. 법계의 모든 것을 관하여 보면 일체가 마음으로 지어졌다고 했으니 마음을 밝혀 알면 법계의 온전한 성품도리를 다 알 수 있을 겁니다.

<반야심경>의‘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도다 마음으로 이뤄진 법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과 공이 다 마음에 있는 것이니 색 이 공이고 공이 색일 수 밖에요. 우리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3계를 자주 얘기합 니다.

탐진치 오욕락의 욕계나 물질의 세계인 색계나 물질은 아니되 정신의 세계인 무색 계 나 다 마음의 작용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지경에서 보면 몸(물질)이 있어서 정신이 있는 것이고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없어지는 것이라고 보기 쉽습니 다. 그 래서 정신의 세계를 부정합니다. 그곳에 가 봤느냐고 대꾸하거든요.

집착의 물질계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물론이 나오고 공산주의가 나온 것 아닙니까.

서양에도 유심론이 있지만 그 유심론은 불교의 일체유심조 도리와 차원이 다릅니다.

마음은 하나입니다. 하나인 마음 속에 일체가 있고 그 가운데 물질이 있고 이 몸도 있는 것이어서 공기와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어 그 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정신 이없고 오직 물질만 있다면 공기와 물과 음식이 서로 합쳐져서 영양이 될 수 없 을 것 이 아닙니까.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것이고 그 지은바의 인연이란 무척 귀한 것입 니다. 그 마음의 도리와 귀한 인연을 잘 지켜가는 것이 불자로서 바른 길, 바른 수행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명심개오란 거기서 시작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약력

·1930년 전북 부안 生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원광대학서 불교학 이수
·1968년 백양사 서옹스님 문하에 출가후 수선참구
·임제선풍 현양에 주력하며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辨>등 논저 발간
2004-12-22 오전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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