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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는 일찍이 재가 시절에 선수행을 독실히 해서 견성인가를 얻으시고, 그후 출가하시어 평생을 선수행자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스님을 선으로 이끈 계기와 공부과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나는 재가 시절 25세에 우주와 인생의 근본인 마음에 대하여 깊이 의심하던 중 홀연히 그 의심을 타파하고 호남의 선지식이신 부안 서래선림의 해안(海眼질)선사께 입실하여 인허(認許)를 받고 여러 해 안거를 했습니다. 출가해서는 그저 이를 보임(保任)하여 서옹선사로부터 다시 인허를 받았습니다. 내가 선으로 들어서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자면,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직전의 격동기였는데, 당시 청년 학생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풍미하던 때였어요. 나 역시 그때 사상적으로 방황하던 시기였습니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기독교 서적도 공부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탐독했습니다. 그런데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유신(唯神), 유물(唯物)사상은 근본적으로 불합리한 모순성을 크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전지전능한 신이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였다면, 그러한 피조물들 역시 완전해야 할텐데 이 세상은 항상 불완전하고, 인간은 원죄의 그늘 속에서 죄악을 범하고 죽어서는 지옥에 가야만 하는 신의 섭리를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것을 결코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죠. 유물론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모두 물질로써 이루어졌고, 물질이 고도로 발전하면 사람의 정신현상까지도 나온다고 해요. 마치 위에서 위액이 나오고 담에서 담즙이 분비되는 현상과 같다는 설명이었지요. 그런데 과학적인 인과법칙상 물질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기적인 물질이지 유기적인 정신현상이 나올 수가 없으므로 이론상 크게 모순되는 것 아닙니까.
─결국 불교에서 삶의 길을 찾았다는 말씀인데요.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유심(唯心)사상이야말로 불합리한 사상을 지양한 절대적 진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체가 마음이 지은 바이니 그 마음만 바로 알고 깨달으면 우주와 내가 하나의 마음으로서 본래로 영원한 광명과 영원한 생명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실상을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찾아보고자 대학시절 선학(禪學)서적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 읽은 책들이 <선가귀감(禪家龜鑑)> <수심결(修心訣)> 그리고 일본에서 나온 선학서적들이었어요.
참으로 초목와석(草木瓦石)이 마음으로써 방광설법(放光說法)을 하고 있으며, 초롱초롱하고 고요하며, 본래 신령스럽고 밝은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마음의 본성은 성성적적(惺惺寂寂) 소소영영(昭昭靈靈)한데 왜 나는 그렇지 아니 한가? 하고 크게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심을 가지고 칠일칠야 식음을 전폐하고 참구하던 중 상기가 되어 대열병을 앓기도 했어요. 다시 의심덩어리를 단전에 내려가지고 한번 조식(調息)하던 찰나 칠통(漆桶) 같던 의심이 타파되었으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희열과 광명이 내 몸과 마음과 우주에 충만하고 있음을 실제로 체득했습니다. 일본의 선승 야마다 레이닝(山前靈林)이 쓴 <선학독본>에 ‘참선 중에 상기가 될 때는 가만히 기운을 내려서 단전에 화두를 들고 조식(調息)으로 지관타좌(只菅打坐)를 하라’는 가르침대로 한 것이었지요.
─근래에 많은 사람들이 선에 대해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의 관심은 언론의 주요 이슈로도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미국, 구라파에서 더 활발한 것 같습니다. 선원과 명상센터가 미국에만도 천 개가 넘고 수행하는 사람은 천오백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물질적으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결코 물질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내’가 있어야지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철저히 계약의 관계로 맺어진 사회입니다. 지금 앉아있는 자리를 언제 비워줘야 할지 모릅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해도 항상 불안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다르지 않게 변해가고 있어요. 선에서는 ‘수처작주(隨處作主)’, 그러니까 처해진 자리에서 주인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인인 ‘나’를 찾는 것이 선이고요. ‘내’가 있으면, 이 자리면 어떻고 저 자리면 어떻습니까, 이미 내가 주인인데.
외국에서 선불교에 관심이 많은데, 정작 선불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어요. 외국 사람들이 가부좌하고 있다고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것을 자랑스럽게만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들한테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말로 알아 차려야 합니다. 그동안 종단의 시비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화두 들면 그런 것 싹 없어집니다. 화두일념이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요. 외국 사람들이 선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무언가 배워보려고 하는데, 우리들이 서로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선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는데, 스님께서는 책을 많이 보시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선은 누가 뭐래도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입니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이 전거(典據)를 대라고 하는데, 선의 근원인 삼처전심(三處傳心)은 <선문경>에 나옵니다. 또 <선문경>을 위경이라고 하는데, 왕안석은 부처님 말씀에 부합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화두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삼라만상이 어째서 마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학적 철학적 바탕이 있어야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왜 근본이 마음인가라는 원리를 안 뒤에 참선하라고 했습니다. <초발심자경문>에서도 차례를 건너뛰면 안된다고 했어요. 성철스님께서 백일법문을 하셨는데, 모두 교학을 말씀하셨어요. 화엄, 천태, 화두 드는 법, 과학 얘기를 하셨어요. 수좌들로 하여금 선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백일법문을 하신 겁니다. 여기 임제선원에서도 그런 식으로 공부시킵니다. 기초교리도 가르치고, 어록도 가르칩니다. 책이 왜 이리 많냐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4만권쯤 될텐데요. 선학서적으로 치면 대학의 도서관보다 많을 겁니다. 웬만한 선학서적은 모두 있습니다. 정치 과학 등 일반서적도 많습니다. 포교를 하기 위해서는 세상사람들 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나름대로 일가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교보문고에서 매년 책을 많이 산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데, 작년에는 상금을 주고, 올해는 몽블랑 만년필을 보내왔더군요. 이제 책은 그만 사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선수행을 하고 싶어도 사찰 문을 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선은 어려운 것입니까.
▲어렵던지 쉽던지, 나는 애초부터 선 본위로 하려고 이곳을 임제선원이라 이름붙였어요. 일반 보살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요. 그러면 기초교리 가르치고, 화두 대신 선어록을 철저하게 가르칩니다. 그 다음 화두 드는 법을 가르치는데, 화두 드는 법만 잘 알면 어디 가서도 선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선은 자기 주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화두 또한 자기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알긴 쉬워도 실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선원이라고 간판 붙여놓고 신도들이 오지 않으니까 기도, 염불, 교리 등으로 포교한다고 하는데, 어려우나 쉬우나 선은 해야 합니다. 옛 조사 말씀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
송경천만편(誦經千萬編)
불여일식경(不如一食頃)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
삼천 가지 계를 지키고, 천만편의 경전을 독송해도, 밥 한술 먹는 사이에 마음의 실상을 염하는 것만 같지 않다는 뜻이지요. 자기 주체를 세우는 가르침을 뺀 불교는 온전한 것이 아니지요.
─근래 여러 곳에 선원이 생기고, 수행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재가수행자에게는 지도해주는 스승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수행자는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선가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부터 이어져온 불문율입니다. 몽산선사께서는 반드시 견성하고 문자에도 밝은, 종설(宗說)에 겸통한 대종장(大宗匠)을 찾아 단련하여 법기(法器)를 이룰 것이요,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행해(行解)가 상응해야 함을 조사스님들이 역설하신 것입니다. 근래 우리나라의 가장 큰 선지식은 성철선사, 서옹선사, 향곡선사입니다. 세 분 모두 공교롭게도 임자생으로 성철선사와 향곡선사께서 살아계신다면 올해 세수 여든아홉입니다. 서옹선사는 일찍이 어록의 왕이라고 하는 <임제록>을 연의하시고 착어를 붙여 내신 스님입니다. 지금도 선문제일서인 <벽암록제창> 법문을 하시고, 수행자들을 제접하고 계십니다. 성철선사는 내외전에 두루 해박했습니다. <선문정로(禪門正路)> <한국불교의 법맥> <본지풍광(本地風光)>을 펴내셨는데, 참선자의 필독서입니다. 성철선사께서는 돌아가시면서 후학들에게 “걱정할 것 없다. 내가 해놓은 것을 보고 공부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명안종사가 계시지 않는다면 남기신 저술을 보면 됩니다. 옛 가르침에도 “심조고교 고교심조(心照古敎 古敎心照, 마음을 옛 어른들의 가르침에 비춰 본다)라고 했어요.
─선에서 추구하는 긍극적 인간상을 스님께서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하시는데, 어떤 것인가요.
▲내 말이 아니고 <임제록>에 나옵니다. 높고 낮음의 어느 위치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말로 풀이해 참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불법은 인위적인 꾸밈이 필요하지 않다. 꾸밈이 없는 일상의 자유로움과 있는 그대로의 삶이 본래의 불법이니, 변소에 가고, 옷을 입고, 일을 하며,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쉬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고 웃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꾸밈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안다. 옛사람도 ‘밖을 향하여 공부를 짓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밖에서 끌어온 것은 언젠가는 흩어지고 떠나버릴 것이니, 오직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진실의 눈이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고 이르지 않았는가.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어느 곳에서든 주체가 된다면 서는 곳마다 모두 참될 것(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어떠한 경계에서도 잘못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수처작주 입처개진, 주체적인 인간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위의 높낮이, 하는 일의 귀천을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처지에서 빛을 내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손에 때 묻히지 않는 일만 할 수 없잖습니까. 사람의 빛남은 일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나의 일로 받아들여서 하느냐는 겁니다.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이런 가르침은 더욱 소중합니다.
대담=정성운 차장
(swjung@buddhapia.com)
*약력
·1930년 전북 부안 生
·전주고등학교를 나와
원광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
·68년 백양사에서
서옹선사를 은사로
득도
·현재 서울봉천동
임제선원을 개당,
주석
·‘돈오돈수와 돈오점
수의 辨’ 등 논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