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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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대로가 부처, 때 묻으면 중생”
지상백고좌-월운 스님(서울 보문사 주지)
강의하는 월운 스님.
최근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불자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부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있고, 법당과 길거리에도 있고, 마음속에도 존재합니다. 결코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불자들은 딴데서 찾을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더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게 뭔 말인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어떤 그 속에는 큰 의미가 들어 있을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평상시에 하는 예불문이나 반야심경의 뜻만 알아도 바른 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 안에는 불교의 심오한 철학과 사상이 담겨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그저 경구를 입으로만 중얼거리는데 만족하지요.

그러면 예불문을 풀어봅시다.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가르쳐주는 구절입니다. 삼계도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이끌어주시는 스승이란 말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는 중생들이 윤회하면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사생자부는 중생이 태어나는 네가지 방식인 난생 습생 태생 화생으로 난 중생의 자애로운 아버지를 뜻합니다.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을 살펴보면 시간과 공간, 땅과 물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은 존재한다는 말이거든요. 이 세상에 부처가 아닌게 없다는 말은 바로 이 말입니다. 이같은 원리를 알면 계율이나 수행을 말하기 이전에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신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스님이 염주를 들고 있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염되지 않으면 부처님입니다. 우주 자연은 그대로가 부처입니다. 그러나 때가 묻으면 중생이 되는거지요. 우리가 중생인 이유는 불성에 무명이라는 때가 묻었기 때문입니다. 불성이 육체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형성된 우리 육신은 감각을 느끼는 오관을 갖고 있는데, 이를 통제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보기 좋은 것만 보려고 하고, 좋은 향을 맡으려고 하고, 또 맛있는 것만 먹으려고 찾아 다닙니다.

이것은 내가 한 말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에 모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뜻은 모르고 열심히 독송하거든요. 한자로 된 경전이다보니 지나치듯 읽어버리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하는 스님이나 학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한자경전을 알아보겠습니까. 불교를 믿고 싶어서 절에 처음 찾아온 초심자에게 게송으로 된 법문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한달에 한번 법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참선하라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지금 한국불교의 현실이에요.

시대가 참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정신개발의 정도를 표현하는 단위는 1900년대 초반부터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IQ(지능지수)를 사용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EQ(감성지수)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또 SQ(영성지수)와 NQ(인간관계지수)가 새로운 척도로 등장했습니다. 이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과 40년만에 우리 사회는 경제적인 부를 축적해 물질이 풍요로워졌지만, 범죄형태는 갈수록 악독해지고 기본적인 윤리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질이 풍족해지는 일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공황이라는 예기치 않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마치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돛단배 같습니다. 빠른 경제성장에 정신적인 성장이 발맞추지 못하고 뒤쳐져 있는 탓입니다.

좋은 것만 느끼다가 어려움에 부딪치면 꺾이고 마는 것이 세상사입니다. 요즘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정이 무너지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도 좌절을 맛보고, 인내심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오관이 원하는대로 살아가려는 현대인들의 잘못된 습성 때문입니다. 이런 때 불교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무소유는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입니다.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는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넘쳐나는 요즘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이 바로 이 무소유 정신입니다. 청빈한 삶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옛 선인들의 지혜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요즘 정치권의 모습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따지고서는 해결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양극에 있어서는 화합과 상생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지요. 부처님은 중도로써 이미 그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가르침이지요.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아는 것만으로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실천이 뒤따라야 해요. 큰스님 찾아다니면서 듣는 법문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듣는 이가 실천하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는 거예요.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법회때 가족 중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남편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다들 “남편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 탓할 것 없어요. 그런 마음이 생길 때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세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면 남편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데,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에 싸우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처럼 남편도 믿으세요. 부처님에게 지심으로 절을 하듯 남편에게도 절을 해 보세요. 자신이 달라지면 자신의 주변이 변합니다. 내 가정이 화목해지고 이웃이 화합하게 됩니다. 행복으로 가는 방향을 알면서도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죠.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집니다. 가정이 행복하지 않으면 사회도 건강할 수 없어요. 가정은 사회를 지탱하는 주춧돌이기 때문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일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입니다. 가족간에 서로를 위해주고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면 화평한 가정을 가꿀 수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는 마음을 나눔으로써 얻을 수 있는 셈이지요. 마음을 조금만 나누면 평화가 거기에 있는데, 사람들은 그 길을 찾지 않습니다.

육바라밀의 첫 번째 덕목은 보시입니다. 재물을 보시하는 것이 다는 아니예요. 오히려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악업은 참회로도 다 갚지 못합니다. 참회로 갚아질 것 같으면 아침에 죄 짓고 저녁에 참회하면 된다는 말인데, 불교는 결코 그런 비상식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 생을 거치면서 쌓여온 악업은 보시로써 갚아야 해요. 나쁜 일을 했으면 마땅히 좋은 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는 복을 많이 지으세요. 우리는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입으로 짓는 죄, 몸으로 짓는 죄, 뜻으로 알게 모르게 짓는 죄를 갚는 방법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복 짓는 불교 하자는 것도 육바라밀을 실천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육바라밀은 불교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이미 부처님은 다 일러주셨는데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발심과 하심이 필요합니다. 큰 원력을 내지 않고 나를 낮추지 않으면 육바라밀 가운데 한 가지도 행할 수 없어요. 은산철벽의 의단으로 발심하고 하심으로 정진해 나가길 바랍니다.

정리=박봉영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월운 스님은

불자들에게 불교를 제대로 전하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월운 스님. 스님은 불교가 사람들에게 어렵게 인식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스님들의 잘못된 교육에 있다고 지적한다. “스님들이 책이 모자라 공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공부를 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은사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는 엄격한 스승이다.

월운 스님은 자기계발을 위해 인터넷으로 세상을 만난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스님의 신세대식 공부 방법이다. 스님이 세상의 냉혹함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병원을 운영했던 경험에서 비롯됐다.

1980년 서울 망우동에 불교종합 반야병원을 개원했던 월운 스님은 다른 종교를 가진 의료진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불자들의 무관심에 적지않은 상처를 받았다. 게다가 개신교에서 설립한 병원의 공격적 마케팅과 반야병원 의료진에 대한 회유가 계속돼, 스님은 86년 반야병원의 문을 닫아야 했다.

스님은 요즘 불교를 접하기 어려운 이들을 찾아다니는 일에 열심이다. 형편이 어려운 불우가정과 무의탁 노인, 군부대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간다. 불교가 사람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서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1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월운 스님은 1965년 합천 해인사에서 화봉 스님을 은사로 정식 출가했다. 1953년 영천 은해사에서 응준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가수계한지 12년만의 일이었다. 1978년 서울에 자리를 정한 뒤 월운정사, 보문사를 창건했으며, 태고종 중앙종회의원, 중앙호법원 부원장, 제도개혁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박봉영 기자 | bypark@buddhapia.com
2004-12-17 오후 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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