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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숭산 스님의 입적으로 해외포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도 30여년 전 일본에 명월사를 열고 재일동포 포교에 앞장서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계가 이만저만 각성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전부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보십시오. 만일 내가 신발 장사를 한다고 했을 때, 다른 업자들이 어떻게 제품을 만들고 어떻게 시장개척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불교계는 다른 종교의 포교현황에 대해 너무 무관심합니다.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각원사는 현재 해외포교원으로 일본 도쿄의 명월사와 시모노세키의 광명사, 미국 필라델피아의 관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천년 고찰에 앉아만 있는다고 포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하루 빨리 해외포교에 나서야 할 시점입니다.”
-올 한해는 재가자들 사이에 수행, 그중에서도 간화선 열풍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재가자들의 수행열기도 그 어느 때 보다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수행에만 치중한 나머지 교학(敎學)은 관심 밖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대학 안나오고 기자를 할 수 있나요? 박사학위를 받지 않고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나요? 교통법규를 안배우고 운전을 할 수 있나요? 교(敎)란 그런 것입니다. 저는 불교에 입문하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참선 운운하면 우선 기본이 되는 교리 공부부터 하라는 말로써 질책합니다. 모든 사상과 철학적 비전은 학문과 교육을 통해서 정립될 수 있듯이, 교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가운데서 선정(禪定)과 기도, 주력 등을 수행하여 불법 전도에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저에게 선과 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와 선, 선과 교라는 비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둘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참선을 하건 염불을 하건 기도를 하건 주력을 하건 모든 것은 교라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기존의 인식과 학문적인 체계를 일체 벗어 던지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참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선을 불교 수행자들이 취해야 할 열매나 꽃으로 여기면서도 교는 소홀히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수행자들 가운데서도 선과 교를 다르게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단순히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는 기회 있을 때 마다 강조합니다. 교리 공부도 없이 무조건 가부좌 틀고 면벽한다고 해서, 목탁이나 요령 들고 염불한다고 해서 8만4천의 부처님 말씀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서산 스님이 <선가귀감>에서 경계하신 것은 교(敎)가 아니라 알음알이라는 사실을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교를 바탕으로 한 후 수행에 매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화두를 들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화두라는 말은 일반인들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뜬구름 잡듯이 생각만 하는 것이 화두나 수행이 아닙니다. 요즘 일부 수행자들은 ‘화두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밥 먹을 때나 잘 때나 무조건 화두만 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운전을 하면서 ‘무(無)’자 화두를 들어야 하나요? 밥 먹을 때도 ‘이뭣고’해야 합니까? 운전을 할 때는 운전에 집중하고 밥 먹을 때는 밥 먹는데 일념을 하고, 일 할 때는 일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밥 먹는 것으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선입니다. 이때는 밥이 화두입니다. 밥 먹을 때는 밥맛을 충분히 자기가 혀로 맛볼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참선이나 염불을 하다보면 깨달음의 길이 요원하게 느껴져 답답하기도 한데요.
“어릴 적 아버님께서는 집 근처 손수 가꾸셨던 수수밭으로 저를 데리고 가실 때 마다 ‘매일 아침 거르지 않고 수숫대를 뛰어넘는다면 수숫대가 제아무리 높이 자라도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는 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타고난 재능이나 성격보다는 근면과 끈기, 성실함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었지요. 그 가르침 덕분에 저는 출가한 이후 매일 아침 부처님께 올리는 기도와 예불을 거른 적이 없습니다. 공부도 수행도 단시간에 그 효과를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원을 바르게 세우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는 가르침을 자주 접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물질문명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버리고 비우라’는 가르침은 자칫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기가 쉽습니다.
“땀은 100원어치 밖에 안 흘렸는데도 1000원을 바라는 것이 욕심입니다. 돈을 세는 단위인 원이나 일본의 엔을 보십시오. 둘 다 둥글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돈은 돌고 도는 것인데, 주고받음이 깨끗하지 못할 때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도 주고받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합니다. 주고받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노력한 만큼 이익을 얻는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일입니다. 부모를 모시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경제 여건이 안된다면 그건 곤란하죠. 일례로 도쿄 명월사 근처에는 파 한쪽에도 가격표를 붙여 놨습니다. 그만큼 거래를 공정하고 떳떳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1974년 김영조 거사가 보시한 땅에 지은 명월사를 곧바로 조계종 총무원에 등록했다. “귀국 후 명월사를 팔아 국내에 사찰을 지으시라”는 김 거사에게 스님은 “명월사가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 재일동포들의 안식처로 남기고 싶다”고 답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김 거사는 높이 15m, 무게 60t에 달하는 청동대불을 다시 보시했다.
-계율은 오늘날 불자들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실제 오계를 받고도 실천을 하지 못할까 두려워 계를 받지 않는다는 재가자들도 있습니다.
“계는 하나의 규칙입니다. 하지만 학생이 교칙만 잘 지킨다고 우등생이 되는 건 아니지요. 교칙을 잘 지키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율원은 전통계율에 대해 연구하고 시대에 맞는 계율을 제정해 불자들에게 제시해야 합니다. 살생을 하지 말라, 육식을 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이 계율을 ‘자비하라’는 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자비라는 큰 가르침을 간직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다면 계에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계율은 부처님 당시의 계율정신에 맞게 재정립해야 합니다.”
실제 각원사의 ‘사훈(寺訓)’ 중의 하나가 ‘자비’일 정도로 스님은 대중들에게 ‘자비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을 강조하신다.
-스님은 40여년 동안 배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학문을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당부의 말씀을 주신다면?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참선을 하지 않고 경학이나 학교니 하여 글공부를 한다는 것은 도리어 번뇌 망상에 빠지게 된다고 힐난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젊은 스님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은 고사하고 강원에서 신문이나 잡지, 소설 등을 읽거나 영어, 일본어 같은 외국어공부를 하다가 어른 스님의 눈에 띄면 호되게 야단을 맞았지요. 그러나 저는 공부에 원을 세웠습니다. 언제나 “좋은 스승을 만나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세속 공부를 많이 하면 환속한다’는 인식 때문에 제 별명이 ‘환속 후보 1호’일 정도였어요.(웃음) 절에서는 승복을 입어야 하고, 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어야 해 등하교길에 신도 집에서 교복과 승복을 갈아입고 다녀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과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은 더해만 갔습니다. 모름지기 공부도 수행도 간절한 원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명월사와 각원사 창건이라는 대작불사를 이끌어 온 법인 스님. “지금까지의 불사는 포교의 틀을 닦기 위한 것”이라는 스님은 “이제부터는 그 내용에 해당되는 불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각원사는 불교대학과 어린이집 개원에 이어 앞으로 천안 지역불자들의 교육장이 될 불교회관과 연수원을 건립하고 양로원 같은 복지시설을 운영할 계획이다. “교육과 복지를 위한 도량을 만들면 포교는 저절로 된다”는 스님의 가르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를 배웅하러 나온 스님은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봉안한 청동대불을 가리키며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남북이 공존공영(共存共榮)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적화통일이나 흡수통일 같은 일방적인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면 자연히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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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法印) 스님은 고희를 넘긴 세수에도 손수 아침밥을 지어 드십니다. 국내에 계시면 시자들의 시봉을 받으며 편히 지내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행과 해외포교를 위해 한시도 몸을 편히 두지 않으시는 참된 수행자라고 생각합니다.”
각원사 사무장을 맡고 있는 박기환 씨에게 법인 스님에 대해 묻자 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상좌인 각원사 총무 대원 스님은 “은사 스님은 시대 불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라고 말한다.
16살에 출가해 50여년 동안 교학과 포교에 매진해 온 법인 스님은 아침 예불과 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엄격하다. 각원사를 창건할 때는 현장에 임시 막사를 지어 생활하며 허름한 적삼과 밀짚모자 차림으로 인부들과 함께 공사를 하기도 했다.
각원사 처소인 경해원(鏡海院)에 ‘자안애어(慈顔愛語)’라는 문구를 걸어두고 제자들이나 신도들을 대할 때 마다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라는 가르침을 전하는 법인 스님. 스님은 1931년 충무에서 태어나 46년 해인사로 출가했다. 58년 해인대학 문학부 종교학과를 거쳐 동국대 사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했다. 67년 동국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87년 일본 대동문화대학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75년 대한불교 조계종 각원사의 재일(在日) 포교원인 명월사를 창건했고 77년 태조산 각원사를 창건했다. 85년 평화통일문화협의회 평화통일문화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 <불교입문>(89)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연구>(89) <개미집과 하루살이>(96) <신고는 원광이 되어>(200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