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바닷물 농도가 참 좋은데, 예전에 바닷가 사람들은 바닷물에 배추를 절였다고 하잖아요”
12월 1일 가야산 해인사, 2004년을 한달 남겨두고 고요하던 산사가 시끌벅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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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가 겨울 한철 나기위한 채비에 들어간 것. 12월 1일부터 3일까지 해인사에 있는 모든 대중 스님들이 김장 운력에 나섰다.
올해 해인사 김장은 8,000포기.
보통 여염집에서는 상상도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이다. 따라서 해인사 김장에는 남다른 준비가 필요하다. 김장 하루 전날 김장을 하게 되는 장경각 보존원 뒤쪽 주차장에는 칼 40개, 도마 30개, 빨갛고 노란 바구니 50개, 빨간 고무통 30여개, 고무장갑 200 켤레, 소금 50포가 준비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마련됐다. 대형 간 절임통이다. 8,000포기의 배추를 간 절이기 위해서는 일반 고무통으로는 어림도 없다. 아시바와 베니아 합판으로 가로 3m 세로6m 높이 1m의 사각틀 3개를 만들고 물을 채울 수 있도록 큰 비닐 천으로 덧 씌웠다. 꼭 아이들 수영장(?)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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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여 대중 동참, 높고 낮음 없이 울력
아침 8시, 극락전 옆과 율원 뒤쪽에 있는 약 1,000여평의 밭에서 싱싱한 무공해 배추 8,000포기가 3.5톤 트럭 두 대에 나눠 계속 공수돼 왔다.
해인사의 200여명이 넘는 대중스님들이 모두 동참했다.
주지 현응 스님을 비롯해 종무소의 소임자 스님, 강원, 율원, 선원의 스님들이 모두 동참했다. 강주 정묵 스님은 밭에서 배추 수확에 여념이 없고, 율원장 혜능 스님과 선원장 선각 스님도 학인 스님들 틈에 끼여서 칼과 도마를 잡았다. 오늘은 뒷방의 어른 스님들까지도 털모자에 목도리를 하고 모두 나왔다. 이것이 산사의 운력이다.
선원 스님들은 배추를 다듬고 자르는 일을 맡고, 강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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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일까? 운력에 나선 스님들은 다소 상기된 빛이다.
200여명의 전 대중이 마당에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앉을 일이 잘 있을까? 전 대중이 동참하여 겨울철 수행을 위한 먹거리를 장만하는 것에 대한 설레임과 흥분의 기운이 살짝 감돌았다.
8000포기의 김장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운력은 어떤 잡음도 없이 여법히 이뤄졌다.
누구 하나 일 안한다고 불평하는 이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따지는 이도 없다. 밖에서는 일인데 스님들에게는 수행인 것이다.
쉬어야 되면 쉬고, 일손이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그 일을 채워 나갔다.
모든 상을 내려놓고 무엇이든 수행으로 받아들이는 수행자의 참 모습이 이러한 것일까?
도마를 앞에 두고 배추를 자르는 스님들의 모습 속에는 높고 낮음이 없었다.
김장 첫날은 밭에서 배추를 뽑아다가 반을 쪼개서 소금에 절이는 일을 하고, 둘째 날에는 절인 배추를 물에 씻어 물기를 빼 둔다. 셋째 날, 양념에 버무려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는다.
“배추가 알이 꽉 찼네요, 올해는 배추가 참 잘됐습니다.”
율원 뒤쪽 배추밭에서 배추 세 포기씩을 한꺼번에 나르던 강주 정묵 스님의 한마디에 고랑 고랑 앉아있는 배추가 더욱 탐스럽게 보인다.
배추수확에 나선 강원의 학인 스님들 손이 무척 분주하다. 배추를 나르는 솜씨는 일품. 배추가 밭 위를 경쾌하게 날아 다녔다.
◈ "스님 허리가 없어요", 농담 한마디에 '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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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연 그대로 먹어야 제 맛을 아는 겁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밖에서는 모두들 너무 꾸미려고만 하지요. 그러다 보면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배추밭에서 스님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이치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리이야기.
“원래 음식은 한 가지를 잘하면 나머지는 다 잘하게 돼 있어요. 원리가 같기 때문에 대입만 하면 되는 것이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를 할 때 잘 해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는것입니다.” 역시 법문이다. 배추밭에서는 진리의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일까? 수행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스님의 말씀이 더욱 가슴을 파고 든다.
“스님 애쓰십니다.” “원 별말씀을...”
서로를 격려하는 스님들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천진난만하다.
한 켠에는 불을 지피고 감자구이에 나섰다. 불속에 넣은 감자가 10여분 만에 노릇노릇하게 익어서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산사의 김장 운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스님, 허리 펴 가면서 하세요. 100번 건져 올리고 허리 한번 펴기, 하하하”
“스님은 허리가 없어요. 워낙 유연해서”
8000포기의 배추를 소금물에서 건져 올리는 일이다. 계속 허리를 숙이고 일하는 스님에게 넌지시 건넨 충고 한마디와 농담이 따뜻하다.
◈ 마음으로 담근 김치 산사의 귀한 양식
수영장 모양을 한 큰 절임 통은 세칸 중 두칸이 소금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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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장화를 입은 스님들은 배추더미 속에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잠깐의 실수로 배추더미에 넘어지기가 쉽다. 여기저기서 배추더미에 주저 않고 엎어지는 사태가 속출했다. 그렇지만 김장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모든 스님들의 바램은 간절했다.
“옛날부터 절집에는 여름에는 상추 따다가 쌈장에 찍어 먹고, 겨울에는 청국장에 시래기 삶아 먹는다는 말이 있지요. 이때 겨울철 유일한 반찬이 김치입니다.”
김장을 총괄 지휘하는 원주 본학 스님이 산사의 겨울철 김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했다. 김장 김치는 200여명이 넘는 산중 스님들의 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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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림의 대중생활은 공동체 생활이지요. 공동체 생활에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공중규약이 있는 것입니다. 예불, 운력, 정진이 바로 그런것이지요. 그중에서도 김장 담그는 것은 운력에 해당하는 것이니 누구나 참여하는 것입니다.”
선원장 선각 스님은 총림 공동체 생활에서 운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주었다. 예불과 정진 못지 않게 중요한 것. 수행의 연속인 것이다.
이렇게 모든 대중스님들의 마음이 담긴 8,000포기의 김장김치는 20여개의 김칫독에 담겨 땅속에 저장돼 내년 봄이 올 때까지 산중 스님들과 일반 대중들의 귀한 양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