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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10일.
미국 프로비덴스 컴벌랜드 다이아몬드 언덕에는 화사한 햇살이 불광(佛光)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13만평의 대지 가운데 우뚝선 평화의 탑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2년만에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탑의 준공식을 하는 날이기도 했지만 재미 홍법원 프로비데스 선센타 개원 20주년 기념법회도 있었다. 거기다 숭산행원스님의 제자로는 처음으로 3명의 선사가 태어나는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행원스님은 미국땅에 포교의 당간을 세운날로부터 2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홍콩에서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영국에서 폴란드에서 독일에서 그야말로 종행무진 달려야 했던 전법의 나날들이 쏜살처럼 물처럼 흘러 가 어느새 여기까지 왔구나’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그동안 스님의 전법 당간지주가 선 나라는 30여 곳이나 됐고 선원은 1백25개소가 문을 열었다. 각국의 제자들의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짓일만큼 의미가 없었다. 그저 누가 물으면 “수만명이 되겠지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0시가 되자 평화의 탑 준공식이 바로 시작됐다. 각국의 제자들과 한국의 스님들이 참석했고 캄보디아의 고사난다등 불교지도자들도 대거 동참해 대규모 야외법석을 장엄했다.
다시 웅장스런 법석은 엄숙한 전법의 법석으로 옮겨졌다. 푸른 잔디밭에 마련된 전법식장에는 1천여 사부대중이 정좌하고 앉아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행원스님의 이방인제자 3명의 선사가 탄생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이들과 함께 삭발제자가 된 사람은 25명이나 되지만 오늘 전법식을 받는 3명의 제자는 선사란 법계를 잇는 의식을 맞고 있는 것이다.
“너는 어떤 찌꺼기냐”
“나는 머리도 있고 발도 있다”
이렇게 시작된 문답에서 행원스님의 간을 도려내고 심장을 들춰낸 3명의 제자는 10년이 넘게 닦아 온 자신들의 마음자리를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면 금바람이 불어서 나무의 본체가 드러난다. 내가 처음 세탁소에서 일하는 스승님을 만났을때 금바람이 불었다….”
법을 이어받은 성해보문(性海普門) 법사의 법문을 듣는 1천여 사부대중들은 사뭇 진지했다. 무등수봉법사와 법음성향법사도 전법의 기쁨을 간략히 법어로 피력했다.
다이아몬드 언덕에 가을색이 아름다운 이날 프로비던스 선센타에 모인 대중들은 행원스님의 전법 노정에 더욱 큰 인연들이 깃들어 온세계가 불광으로 장엄되길 기원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85년부터 4년 주기로 세계일화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세계의 불자들이 수덕사 도량을 가득 채우고 세계일화의 법향을 드리우는 이 법회는 만공스님의 세계일화 정신을 실현시키기 위한 자리다.
스님이 가는 곳은 어디든 법석이 마련 됐다. 제자들이 전법의 마당을 넓히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지구촌의 생명들이 모두 경건한 합장을 하는 한 스님의 법석은 먼지가 쌓일 틈이 없는 것이다.
전법을 받고 기뻐하는 3명의 선사들을 보며 행원스님은 문득 85년도 가을에 중국 북경 시내의 고찰 법원사에서 만났던 전인(傳印)스님 생각이 났다.
그 고색창연한 절에서 행원스님은 전인스님에게 물었었다.
“스님, 이 절에는 많은 부처님들이 계신데 어느 부처님이 진불(眞佛) 입니까.”“부처가 없는 곳도 급히 지나가고(無佛處 急須走過) 부처가 있는 곳에도 머물지 마십시요(有佛處不可停留).”
정작 부처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새로 태어난 제자들도 이미 부처의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고 전법의 현장으로 달려갈 것을 행원스님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늘어나는 제자들. 늘어나는 선원과 신도들. 그것은 행원스님이 또다시 전법의 길로 나서야 하는 이유였다. 아직 스님이 가서 부처님법을 전해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곳은 이 지구상에 너무나 많다. 그 중에서도 반드시 가야할 곳, 반드시 가서 법석을 펴야할 곳이 있다.
그곳은 다름아닌 한반도의 북쪽 땅이다.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공산국가를 다 가봤으나 오직 한 곳 가지 못한 북녁하늘 아래에 행원스님은 주장자를 높이 세우고 싶은 것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눈빛이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부처님의 소식을 전했는데 그리운 고향땅 생각만해도 가슴 아픈 고향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찬란한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는 이 현실이 행원스님에게는 무엇보다 큰 고통이다.
바로 그 고통이 있기 때문에 행원스님은 전법의 주장자를 놓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