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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서울 봉은사 법왕루에서 ‘수행정진,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를 주제로 열린 조계종 중앙신도회 재가불자 동안거 수행논강 입재식. 법문에 나선 혜국 스님은 “‘닦는다’는 것은 마치 눈먼 장님이 허공을 보기 위해 허공을 만들려고 하는 짓과 같다”며 “돈오는 허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장님이 스스로 눈을 떠 허공을 보는 것”이라고 논강했다.
이에 스님은 “돈오가 곧 선”이라고 전제한 뒤, “재가불자들의 수행은 하루하루 닦아가며 자신을 부처로 만들지 말고 바로 자신이 부처임을 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음은 이날 법문의 요지.
●돈오는 본래 완성된 내 모습을 보는 정견(正見)
돈오라는 말은 세계종교사에서 불교, 그것도 선불교에만 있다. ‘돈오=선’이라 할 수 있다. ‘깨침의 본질’인 돈오는 ‘닦음의 문제’인 점수와 그 성격을 달리한다. 돈오는 본래 완성된 내 모습을 보는 것이다. 닦는 것이 아니다. 원래 부처라는 것을 보면 그만이다.
불교에 사성제(고집멸도)의 교리가 있다. 이는 팔정도를 설명하기 위한 서론이다. 본론은 팔정도다. 그 가운데 핵심은 정견(正見)인데, 그것이 바로 돈오다. 사람마다 모두가 부처다. 눈만 뜨면 모두를 부처님의 도량처럼 볼 수 있다. 문제는 눈을 감고 보질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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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와 ‘닦는다’, 어떻게 다른가?
‘닦는다’는 말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나가는 뜻이다. 부처가 아닌 것을 자꾸 부처로 만들어 나간다는 말이다. 돈오는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믿고, 부처가 아니라는 착각과 망상번뇌를 벗어나게 한다. 즉, 없는 것을 만들어 나가려고 닦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을 착각해서 못 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돈오다. 때문에 ‘보는 것’이기에, ‘닦는다’는 말은 붙을 수 없다. 그래서 돈오인 거다. 이는 분명한 법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옛날 조사들이 하나같이 이 같은 돈오의 이치를 알려주기 위해서 수행자들을 주장자로 때리면 경책했다. 이는 닦는 데에서 비롯되는 착각을 깼다. ‘닦는다’ 것은 없는 것을 자꾸 만들어 나간다는 말이다. 허공을 만들 수 없듯이 그건 불가능한 것이다. 이미 부처가 인데 눈만 뜨면 허공을 보듯이 번뇌 망상의 구름만 확 벗겨버리면 본래불성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떻게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부처 아닌 게 하나도 없다’는 불성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깨달음을 얻게 된다. 착각을 일으키는 망상을 거둬내야 한다. 그럴 때마다 ‘어째서 어째서’ 하고 화두를 들어야 한다. 일심으로 의심해야 한다.
우선, 몸 안에 있는 번뇌 망상이 실제로 있는 착각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번뇌 망상은 경계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스스로 만든 생각에 망상이 있지, 만들지 않은 망상은 몸 안에 없다. 몸 안에 있는 생각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니까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럼,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어떤 때인가. 우리는 생각의 한계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무슨 생각이든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화를 내면 얼굴이 붉어지고, 좋으면 웃는 것처럼 ‘한 생각’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 이는 일으킨 모든 생각들이 몸과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생각이란 업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화두다. 화두는 시공을 초월해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게 한다. 달리 말하면,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 화두다. 이처럼 화두는 번뇌 망상 등의 착각을 깬다. 화두를 통해 번뇌 망상이 여의게 되는 셈이다.
때문에 돈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본래 부처임을 보게 된다. 닦는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단박에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닦을 것이 없다. 결국 ‘돈오=평상심=무심=중도’이라 말할 수 있다.
◆【현장 질의응답】
질문 : 단계를 밟아가며 번뇌 망상을 거둬내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대답 : 번뇌가 곧 화두다. 마음속에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순간 없애려고 하지 마라. 그때 마다 ‘어째서 번뇌 망상이 일어났는지’ 의심하라. 또 다시 번뇌가 올라오면 왜 일어났는지 의심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망상이 화두로 바뀌게 된다.
질문 : 좌선을 하다보면 팔과 다리가 저려서 화두를 드는 것이 힘들다.
대답 : 오히려 팔과 다리만 저린 것은 상근기다. 온몸이 다 저리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선은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누워서도 돌아다니면서 할 수 있다. 다만 누우면 자고 싶고, 걸으면 이것저것 신경 팔기 십상이니 앉아서 참선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자세로 하든지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