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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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서 본 명상, 명상에서 본 선
'선-명상 무엇이 다른가' 2

△선에서 본 명상
인경 스님(명상상담연구원장)


‘선(禪)’이란 용어는 ‘고요하게 생각하다’는 의미를 가진 번역어인데, ‘선수행(禪修行)’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선을 닦는 실천행위라고 정의할 수가 있다. 선이란 용어는 불교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관점과 의미를 가진다. 선은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논의가 진행됐다.
선과 명상은 많은 유사점에도 차이점을 갖는다. 우곡선원의 외국인 정진 모습.
첫째는 초기불교의 관점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선을 대부분 마음의 평정상태를 가리킨다. 마음의 평정은 세속적인 갈망이 사라진 상태,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 감각적인 기쁨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정이 이루어진 상태, 일체의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온전하게 청정해진 상태로 다시 네 단계로 분류된다. 여기에 의하면 선이란 일상의 번뇌로부터 정화된 마음상태를 가리킨다.

둘째는 대승불교의 관점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의 존재를 믿고 인정하면서 선수행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대승경전에 의하면 불성이란 바로 깨달음을 의미하며, 널리 빛으로 가득 찬 근본적인 지혜로서 묘사되고 있다. 이때 선이란 근본적인 지혜를 말하면 이 지혜는 점차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내게 닥쳐오는 순간의 황홀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인 경험은 그냥 찾아오는 보상이 아니라, 마음의 고요함과 내면을 통찰을 꾸준하게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결과로서 본다.

셋째는 중국의 선종의 입장이다. 중국 선종의 경우도 대승경전에 이론적인 근거를 두고 있지만, 더욱 철저하게 일상적인 체험을 중시한다. 선이란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매우 평범한 일상의 일체성이다. 차를 마시는 순간이 선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의 달빛이 냇물을 꿰뚫는 순간이 선이며,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서 좋아하는 순간을 떠나서 별도로 선을 찾을 수가 없다. 억지로 무엇인가를 닦으려 하면 오히려 어긋난다.
그렇다면 명상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여기저기서 명상을 말한다. 필자는 선과 명상을 Jh?na의 번역으로서 동의어로 본다. 다만 명상이란 용어가 혼란스럽게 느끼는 이유는, 명상이란 용어가 가지는 폭넓은 외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런 혼란은 전통적인 불교적 개념에 익숙한 불교도일수록 더욱 심각하게 느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여기서 현재 우리 문화 속에서 불교와 다른 명상 수행법들을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하여 논의해 보자.

첫째는 심리치료나 상담 과정에서 사용되는 명상의 의미이다. 이때의 명상은 심리적인 장애나 혼란 상태를 자각하고 마음의 평정을 성취하는데 그 목표가 맞추어져 있기에, 번뇌로부터의 해탈을 의미하는 불교에서 사용되는 선의 개념과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그림명상이나 춤명상이라 할 때, 이것은 정확하게 전문적인 화가나 무용수의 예술적인 활동과는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그림이나 춤이란 도구를 통해서 마음의 혼란된 상태를 평정과 지혜로 바꾸는 측면을 강조하는 까닭에 이때의 명상은 정확하게 선의 의미와 어긋나지 않는다.

둘째는 명상의 의미를 신이나 우주의 원리에 계합하는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요가나 마하리쉬 계통의 경우에는 해당되는데, 이들 역시 명상이라고 부른다면 어쩔 수가 없다. 기독교나 가톨릭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수피들의 수행법도 모두 명상이란 용어로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볼 때, 명상이란 용어가 가지는 외연은 대단히 넓고, 우리는 확실하게 다종교 현상 속에서 살고 있음을 느낀다. 필자는 진정한 명상은 불교의 수행법인 선(禪, Zen)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역시 이것은 불교도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음을 안다.

셋째는 종교적인 체험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문제나 건강상의 목표를 가진 수행법도 명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점은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생겨난 명상의 방식인데, 주로 기업체나 의료계통에서 사업상의 이유로 혹은 환자의 치료 때문에 사용된다. 이 영역은 명상의 응용분야로서 미래사회에 더욱 확산될 분위기인데, 주의하여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점을 불교가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와 함께 선의 대중성 확보 문제는 오히려 기존 명상계가 선에서 배워간다는 점이다. 때문에 선에서는 선전통을 확실히 세워야 한다. 불교가 아닌 영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양성 확보차원에서 명상을 이해해야 한다.


△명상에서 바라보는 간화선
박석 교수(상명대 중문과ㆍ미래사회와 종교성연구원 원장)


최근 일반인들의 명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명상이 유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는 상업적인 의도에서 나온 얄팍한 명상도 많이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화란 상업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매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명상조차도 상업화의 덫에 걸리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상이 건전한 대중문화의 한 부문으로 성장하려면 깊이와 내용을 좀 더 보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전의 다양한 전통적인 명상법으로부터 자양분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간화선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간화선은 학문적 관점에서 볼 때 당시까지 발달한 인도의 불교사상의 정점 위에 중국 토착의 사유체계인 도가사상의 장점을 융합시켜 만들어낸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강력한 명상법이다. 간화선은 지엽적인 수행의 과정을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으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자각을 일으킬 수 명상법으로서 매우 단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심오한 맛이 있다. 그래서 중국 불교의 주된 수련법으로 등장할 수 있었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동아시아의 불교의 대표적인 명상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간화선은 약간의 한계점이 있다. 우선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일반 명상은 대체로 호흡이나 신체의 어느 한 지점, 혹은 외부의 형상이나 주문 등에 집중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비교적 쉽고 구체적이다. 그러나 간화선에서는 화두에 집중을 해야 한다. 그것도 단순한 집중이 아니라 의심덩어리를 가지면서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막연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는 화두선 자체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공안들이 문화적 차이로 인해 현대인들에게 별로 어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나 “뜰 앞의 잣나무이다” 등의 화두는 옛날 선사들에게는 간절한 의심을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요즈음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인 의심덩어리로 다가서기가 어렵다. 좀 더 현대인에게 맞는 화두, 그리고 특정한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으면서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강력한 의심을 자아내는 화두를 개발하면 대중적인 명상법의 하나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두선의 또 하나의 단점은 단도직입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잔잔한 즐거움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요가 명상을 포함한 일반적인 명상은 대부분 수행의 초기단계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밝아지는 단계를 설정하고 있으며 그 뒤로 점진적인 수행에 의해서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화두선은 화두를 타파하기 전까지 오리무중 속을 헤매는 막막함 속에서 정진을 해야 한다. 물론 화두선도 그 속에 아기자기한 수행의 재미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좀 무거운 것은 사실이다. 처음부터 너무 무거운 화두보다는 생활 중에서 자그마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가벼운 화두를 잡게 해서 수행의 기쁨을 느끼면서 점진적으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하는 식으로 하면 일반 대중들에게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04-11-13 오후 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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