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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불교 명상의 경우 ‘ZEN’이란 이름으로 전세계에 널리 퍼졌으며, 이런 현상으로 인해 ‘명상’이라는 개념이 ‘선’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내 상황은 다르다. 국내 불교계에서는 불교 명상 이외의 명상법을 제 3수행법으로 간주하고 양자간의 확실한 구분선을 긋고 있으며, 불교 밖의 명상계에서는 “불교수행은 명상의 한 방편일 뿐”이라며 불교와의 영향 관계를 부정하고 있다.
불교와 이들 명상은 어떤 상관성을 가질까? 여러 가지 공통점이 논의되고 있는 불교의 ‘간화선’, 그리고 마하리쉬 명상요가 등의 ‘힌두 명상’을 대비시켜 봤다. 이 명상들은 어떤 점에서 닮아있고 구분되는지, 깨달음/수행법/‘나’의 문제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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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를 묻는 질문에서 스님들이나 불교 전문가들 대부분이 고개를 젓는다. 부정하는 근거의 핵심은 “명상은 고요함만을 추구할 뿐이며 그 같은 의식의 고요함을 통해서는 깨달음이나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간화선은 모든 의식의 성성적적(惺惺寂寂 의식이 또렷또렷하면서 고요함)을 추구하지만 명상은 적적(고요함)을 닦는 것에 머무른다는 얘기다.
영진 스님(前 조계종 기초선원장)은 “적적만 추구하는 명상은 마치 깜깜한 귀신굴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고요함만 즐기는 형국”이라며 “고요한 경계를 맛보고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명상으로는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기 십상”이라고 주장했다. 언어 이전의 소식을 참구하는 간화선 수행법은 고요한 상태에서 마음상태를 관하는 명상과는 구별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명상이 고요함만을 추구한다는 입장에는 이견이 있다. 한국 요가계 원로 이태영(한국요가연수원장) 박사는 “요가에서 삼매를 추구하다보면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세계 속에 녹아있는 훈습(薰習)이 제거되기 때문에 본래 구족된 지혜를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요가수행은 심작용의 지멸, 즉 삼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며 지혜의 발현을 수반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간화선과 힌두 명상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임승택(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연구 교수는 ‘요가수트라와 초기불교의 삼매관’에서 “요가의 삼매를 ‘어행(語行)과 심행(心行)의 지멸’로 표현한다면 불교의 삼매는 ‘신행(身行)의 지멸’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며 “이는 불교에서의 삼매가 육체까지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것인 것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양자는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 입장도 달리한다. 물론 요가와 불교의 경우 ‘지혜의 발현’과 ‘번뇌의 소멸’을 이끄는 일련의 수행과정을 공통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요가는 우주의식에 합일하는 ‘진아(眞我)의 독존(獨存)’을 구경으로 삼고, 불교는 ‘열반의 실현’을 궁극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깨달음의 방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간화선에서는 비논리적 화두참구를 통한 일순간의 깨침을 강조하는 경향이 크지만, 요가는 대상에 대한 오랜 ‘집중’과 ‘통찰’의 시간을 전제로 삼는 점수(漸修)적인 수행에 가깝다. 그러나 신체 내부 에너지 센터의 각성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쿤달리니 요가의 성취는 ‘돈오(頓悟)’적인 색채가 강하다.
마하리쉬 명상의 경우도 즉각적인 깨달음과 관계가 있다. 인도의 수행자 라마나 마하리쉬의 제자이자 창원에서 마하리쉬 아쉬람(슈리크리슈나다스 아쉬람)을 운영하고 있는 김병채(창원대 교육학과) 교수는 “우리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참나 그 자체이며, 완전한 나를 자각하는 즉각적인 깨달음만이 필요할 뿐 수행은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 같은 직관적 깨달음은 스승과의 대화(삿상)를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간화선의 선문답과 닮아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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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요가는 건강을 위한 체조쯤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 요가는 다양한 수행법을 포괄하고 있다. 관음신앙ㆍ정토 신앙과 유사한 박티요가, 묵조선ㆍ위빠사나 등과 비슷한 라자요가, 염불선과 닮은 만트라 요가, 티벳 좌도 밀교와 유사한 쿤달리니 요가 등 그 종류와 형식은 다양하다.
이 가운데 갸냐요가(지혜의 요가)는 간화선과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 이는 세계와 인간, 그리고 나의 참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명상법으로, 세계의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합리적인 답변을 찾고자 노력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생각을 통해서 진리에 ‘집중’하기 때문에 언어 이전의 소식을 참구하는 간화선과 구분될 수 있다.
육체에 대한 관점에도 차이가 있다. 요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소우주 속에 궁극적인 진리와 합치될 수 있는 지혜가 구족돼 있다고 본다. 그리고 육체 안에서 그 같은 지혜가 발현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예를 들어 음식이나 호흡 등이 기(氣)가 되고 이 기의 작용에 의해 지혜가 드러나는 방식에 주목했고, 실제적인 섭생과 몸의 상태에 따라 지혜로 전화되는 양상이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요가수행에 있어 육체의 요가인 하타요가가 명상이전에 전제되는 이유는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한다.
반면 간화선에서는 육체 내 지혜의 발현 양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다. 마하리쉬 명상에서도 육체의 작용ㆍ제어 등과 관련한 별다른 규정이 없다. 마하리쉬는 오히려 “수행으로 얻은 나는 참나가 아니며, 깨달음을 위한 그 어떤 수행도 불필요하다”고 역설할 뿐이다. 과거에 속아 무지에 가려 그 빛을 발하고 있지 못하는 참본성, 참나는 즉각적으로 깨닫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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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과 힌두명상의 구별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나’의 문제다. 고우 스님(봉화 각화사 선덕)은 “힌두명상은 브라만과 아트만의 합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실체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간화선은 나와 너를 나눠보는 이원적인 사고를 넘어서는 연기론적 세계관을 근본 바탕으로 한다”고 말했다.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영원불변의 ‘아트만’, ‘브라만’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곧 망상이며, 망상을 통해 얻는 깨달음에는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화선은 불성, 여래장, 참나 등의 말을 사용해서 자아를 세우고 그것과 하나되려는 수행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실제로 마하리쉬가 말하는 빛나는 본성인 ‘참나’는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보광명지(普光明智, 널리 온 우주는 감싸고 있는 빛나는 지혜’와 외형적으로는 별다른 구분이 없다. 이는 요가에서 말하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우주적인 의식으로 이뤄져 있고, 그 같은 정신성은 환희를 기본으로 한다’는 싸ㆍ아난드(Sat Cit Anand)와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무아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결국은 개념적인 문제로 환원된다. 임승택 연구교수는 새끼줄의 비유를 들었다.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거듭 확인해 봤더니 새끼줄이었다. 그렇다면 뱀이라는 지식은 파기 가능한 것이다. 임 교수는 “그 파기의 궁극에서 만나는 것을 ‘개념화’하느냐 ‘무아로 상정’하느냐의 차이”라고 말했다.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아트만 등으로 이름하여 유아전통의 맥을 이었고, 불교는 최후의 무엇까지도 철저히 배제하는 무아사상을 이끌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