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늦가을, 팔공산은 온통 붉은 빛이다. 새빨갛게 물든 단풍과 그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팔공산은 고요하기만 하다.
그 모든 것을 품어 안는 동화사 비로암에는 세수 92세, 법랍 70세의 노스님이 살고 있다.
범룡 스님. 스님들에게 계를 내리는 조계종 전계대화상(1999년)과 조계종 특별선원인 봉암사 조실(94~96년) 등을 역임했다. 스님은 만허 한암 동산 효봉 경봉 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의 가풍을 이었으며 평생 수행 외길을 걸어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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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나날이 풍족해져도 괴로움이 없어지지 않는 걸까요? 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데도 뜻대로 안 될까요?” 상생이 아니라 상쟁을 하며 자기 얼굴 살필 여유조차 없는 우리네의 삶이 떠올라 뵙자마자 질문을 드렸다.
“괴로움을 없애려고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생각을 바꿔야 해요. ‘고즉시락(苦卽是樂)’이라, 생각에 따라 고도 되고 낙도 되는 것이야. 고락의 종자가 어디 따로 있어? 고도 낙도 똑같은 것, 평등한 것인데 사람들은 제 맘대로 고락을 만들고는 혼자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거지.” 모든 세상만사가 마음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란 뜻일 게다. 그 마음의 실체를 어떻게 찾을지 여쭈었다.
“마음이란 본래 ‘생주이멸(生住離滅)’ 즉 끝없이 변하는 것이야. 마음도 몸도 그러하고, 세상도 그러한 것이야.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한번 봐. 초하루에는 요만하다가 보름에는 이만큼 커지지? 그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그 모습에 집착할 때 마음은 고가 되기도 하고 낙이 되기도 하는 거야. 집착하는 마음이 ‘고락’이지 고락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그걸 깨닫지 못하면 꿈도 생시처럼 보이는 거야. 깨닫고 보면 모두 한바탕 꿈인데, 꿈이란 걸 알면 고락이 모두 평등한 법인데 말이야.”
어떻게 해야 그런 사실을 깨달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스님은 대답 대신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요새도 <화엄경>을 자주 읽어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오늘 읽으면 내일은 뭘 읽었는지 기억이 안나. ……어떤 때는 읽고 싶다는 마음까지 없어져버려. 그러다가 또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다시 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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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스님이 기자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방편을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력의 감퇴는 ‘4고(四苦)’ 중 하나인 늙음의 증거일 텐데, 스님은 숨기거나 억지로 지어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대로 받아들이고 유유자적한 삶, 여실지견(如實之見)한 선사의 풍모가 느껴진다.
스님은 종교인들의 엉뚱한 생각 때문에 사회가 소란스러워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따끔한 한마디를 했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서? 무슨 수로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겠으며 하나님은 그걸 받아서 뭐에 쓴데? 바칠 재주도 없고 받아갈 재주도 없어. 사람들은 제 욕심 때문에 허황된 말들을 지어내고 다툼을 만들고 있어.”
범룡 스님께 다시 공부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을 구했다. “요즘 사람들의 생활은 나아졌지만 공부하기는 더 어려운 것 같아. 보는 것, 듣는 것이 엄청 많은데 정작 자기 것이 없어. 옛 사람처럼 간절함이 없어. 옛말에 ‘신유십분(信有十分)이면 의유십분(疑有十分)이고, 의유십분(疑有十分)이면 오유십분(悟有十分)’이라 했어. 믿음이 컸기에 의심도 컸고, 의심이 컸기에 깨달은 것도 많았다는 말이지. 옛사람들이 그랬다면 요새 사람들은 그에 반도 못 미치지. 믿음이 없으니 의심도 없어. 의심이 없기에 분발하려는 마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을 길도 없어지는 거야. 큰 신심이 큰 의심을 부르고, 그 의심의 열매가 무르익으면 ‘탁’ 터질 때가 있지. 그게 바로 한 소식을 하는 순간이야.”
스님은 특히 계속해 신심이 투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심이 없으면 의심도 소용없고 화두도 죽은 화두가 되기 때문이다. 스님은 “간절한 의심덩어리를 기어이 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화두를 들고 있어야지. 그런 것을 믿지 않고 화두 하나만 일러달라고 하면 ‘마삼근(麻三斤)’이라고 말만 생각할 뿐이지 참선을 하는 게 아니다”고 덧붙였다.
화두에 대해 하나씩 일러주며 수행을 시키는 풍조에 대해서도 스님은 경계를 했다. “화두에 정답이 어디 있겠어. 화두를 받아 오로지 몰입해서 그 하나만 생각해야지.”
“평생 경전을 보았지만 경전들은 모두 계정혜(戒定慧) 이것 하나만을 가르칠 뿐이야. 계는 내 입과 몸, 마음이 짓는 악업을 방지하는 것이요, 정은 흔들리는 마음을 한곳에 붙들어 매는 것이며, 혜는 그럴 때 깨달은 지혜를 말하는 거야. 계와 정과 혜가 동시에 갖추어질 때 견성성불도 이루어지는 거야. 인간으로 태어나기 힘들고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려우니 인간 몸 받았을 때 바르게 깨닫도록 부지런히 정진을 해야 해요.”
특히 스님은 계행을 청정히 함이 공부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부처님을 열반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 삼아 공부하라고 당부를 했지. 자장 스님도 ‘차라리 계를 지키며 하루를 살지 파계를 하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말한 데는 까닭이 있는 거야. 그게 다 행동이 청정한 이후에야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야.”
화제가 자연스럽게 평생 스승이었던 한암 스님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경전이면 경전, 참선이면 참선 무엇이든 다 능통한 어른이었지. 그런 재주를 두루 갖추기란 참 어려운 일이야. 내 은사인 만허 스님이, 한암 스님만큼만 중노릇 하라고 해 오대산 상원사로 가 공부를 배웠어. 주변 사람들은 그런 한암 스님을 패가망신한 얘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이상한 스님이라고 말하기도 했어. 스님은 그런 말은 들은 척도 안 했어. 오직 자기 갈 길만 가신 어른이야.”
범룡 스님이 평생 지닌 화두도 한암 스님이 주신 것이다. 스님은 참선할 때 열 가지 병이 있다는 사실을 한암 스님에게서 배우며, 십종병이 모두 ‘무(無)’ 자 화두에 대한 병이기 때문에 ‘무’자를 참구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요새 참선을 하시는지 질문을 했더니 스님은 “참선을 할 때는 참선을 하고 망상을 할 때는 망상을 할 뿐이다”며 “망상이든 화두든 본래면목으로 들어가는 방편일 뿐 다른 게 아니다”고 말했다.
“한암 스님 문하에서 나하고 탄허 스님, 그리고 몇 스님들은 <화엄경>을 함께 공부했어. 여섯이 <화엄경> 한권으로 공부를 하려니 지금 생각해보면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도 공부를 한다는 즐거움이 넘쳤지. 옛날에는 어느 스님이 선지식이다 하면 걸망 지고 천리를 멀다 않고 다녔는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많이 없어졌지. 꾀만 늘고 뭘 좀 안다고 으시대지만 다 알음알이를 붙잡고 있는 거야.”
범룡 스님은 물질만을 중시하는 사회의 풍조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하셨다. “옛날 신도들은 못 살아도 간절한 마음이 있었어. 기도를 해도 지극했지. 요새 불자들은 너무 편안함 것만 찾아. 절 올라가는 길이라도 닦아놓고 건물이라도 그럴싸하게 지어야 찾아오는 것 같아. 그러니까 절 대중들도 자꾸 큰 건물을 짓고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옛날하고는 정말 틀려졌어.”
“무엇이든 흔하면 천해지는 법이야. 배가 부르면 간절한 생각도 다 없어지는 거지. 참선을 안 해도 도통한 것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느는 데는 이유가 있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풍족히 먹고 살 수 있으니 제대로 공부하는 수행자가 드물어.”
불자들에게 여러 곳을 다니며 견문을 넓힐 것도 당부했다. “밖에 자주 다녀봐야 자기 나라, 자기 부모 소중한 줄도 알고 그래. 일본사람 속담에 귀한 자식은 여행을 시키라는 말이 있어요. 어린 학생들은 공부를 마친 후 세상을 둘러보아야 견문이 넓어지고 할 이야기도 생기는 법이야. 그런 사람이 불자가 돼야 큰일도 하는 거지.” 정리=강유신, 사진=고영배 기자
범룡 스님은?
1914년 평북 맹산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35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 38년 만허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유점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다. 스님은 그후 오대산 상원사로 가서 한암 스님 문하에서 <화엄경> 등 경전과 참선을 공부하다가 41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상원사 수덕사 범어사 해인사 등 전국 제방선원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으며 <화엄경> <능엄경> 등에도 능해 선ㆍ교ㆍ율을 모두 갖춘 몇 안 되는 선지식으로 알려져 왔다.
묘향산 보현사, 통도사 극락암, 해인사 백련암 등 공부하기 좋다는 선방이란 선방은 어디든 천리를 멀다 않고 발품을 팔고 다녔다.
범룡 스님은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등 너무 많이 다녀서 이제는 어디를 다녔는지 기억조차도 하기 힘들다”며 “걸어 다니면서 탁발하는 일이 행선(行禪) 수행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스님은 1980년 동화사 주지, 94년 봉암사 조실을 역임했으며, 77년부터 지금까지 동화사 비로암에 주석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