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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40분이면 올라올 거리를 말이야. 쯔쯔쯧!”
혜정 스님(서울 삼각산 문수사 주지)은 안타깝다는 듯 혀부터 찼다. 20년 전만 해도 달랑 작은 법당 한 칸이 전부였던 문수사를 나한전, 삼성각 등 1천여 평 큰 규모의 도량으로 일궈낸 스님의 말에서 힘이 묻어났다.
“산 오르는 일이 간단해 보이지? 산을 오르는 일도 원력이 필요해. 무슨 일이든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뭐든지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반드시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원력말이야. 원력이 없으면 뭐든 성취할 수 없어요. 원력은 모든 일의 목적이 된다는 말이지.”
스님은, 누구나 원력을 세우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력은 불자들의 필수 사항이다.
“모든 힘을 모아 쌓은 공덕을 원력으로 회향해야 됩니다. 성불도 마찬가지야. 원이 없으면 부처가 될 수 없어. 단박에 깨치기 어려우니까 원력을 세워 수행하는 거지. 무엇보다도 ‘고통 받는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대원력을 곧추 세워야 해. 이것이 중요해요.”
스님은 ‘원이 없는 수행은 있을 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원력 없는 수행은 ‘허구’라고 말했다. 원력은 수행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다.
원을 세우기 위해서는 육바라밀의 실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시, 지계 등의 육바라밀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실천해야 할 생활실천 덕목이지만 인욕바라밀을 특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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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하나 드셨다. “테이프에서 주력이든 명상음악이든 법구경이든 소리를 듣고 있다고 해. 그런데 테이프를 끄면 소리가 안 들리겠지. 그럼 안 들리는 테이프 소리와 들렸던 소리는 둘일까? 둘이 아니야. 이처럼 인욕은 ‘이거다 저거다’를 따지는 상대성을 초월한 경지에 있어요. 때문에 인욕바라밀을 성취하려면, 우선 ‘나’라는 아상을 버려야 해. 인욕을 못하는 이유는 아상 때문이야. 나라는 존재를 앞세워서 그렇지. 나란 존재를 완전히 버렸을 때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내 몸뚱아리까지도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할 때가 참된 인욕입니다.”
스님의 말씀은 ‘중생놀음’에 물든 중생심을 거둬내라는 경책으로 이어졌다. 재물(財) 색욕(色) 식욕(食) 명예(名) 수면(睡) 등의 오욕락(五欲樂)에 물든 존재가 바로 중생이다. 이런 ‘오욕락’이 중생의 실체라면서 스님은 “중생은 오욕락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어. 덧없는 생을 사는 셈이지. 중생노름에서 벗어나야 성불할 수 있는데도 말이야.” 이렇게 말씀하고는 잠시 뜸을 들인 스님은 “단박에 없앨 수 없는 오욕락을 말끔히 거둬내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한 생각’에 달려 있어요. 우주 본체가 마음이고, 무변한 대자유라는 것을 깨달으면 돼. 중국 조사 스님의 법어 중에 ‘심여벽해능용물 인사청련불염진(心如碧海能容物 人似淸漣不染塵)’이란 말이 있어요. ‘마음은 푸른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고, 인품은 맑은 연꽃이 추한 곳에 있어서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는 뜻이야. 이렇게 마음을 가져야 오욕락에 물들지 않는 거지. 그 이치를 알겠어?”
“그렇다면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님께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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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불자들이 가져야 할 공부 자세에 대해 계속 말을 이어가셨다.
“화두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해. ‘달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을 쳐내라’고 말이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달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뜻이야.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한다는 말씀이지. 조사 어록에 또 이런 말이 있어, 사람이 돌을 던지면 개는 돌을 물지만, 사자는 돌을 던진 사람을 문다고 했어. 사람이 본질이거든. 그래서 불자들이 공부를 하려면 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해. 지엽에서 헤매면 근본을 망각하게 돼요.”
스님은 육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특히 경계했다. 공부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이것이고 중생들이 벗어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몸뚱아리도 하나의 옷이야. 우리 몸은 마음의 옷일 뿐이지. 옷이 낡고 때가 묻으면, 빨아 입어야 되고 더 낡으면 옷을 갈아입어야 해. 그런 옷에 왜 집착을 하지? 도를 깨친 역대 조사들은 몸 버리는 것을 옷 갈아입는 것으로 여겼어. 때문에 죽음이란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물론 생로병사가 우리에게 제일 두려운 존재야. 생로병사에는 예외가 없어.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과제인 셈이지. 그런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언제까지 오래오래 살려는 욕심 때문에 죽음을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해. 그러니 사람들은 사는 데에만 열을 올리지.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하는데 죽음을 두렵게만 여기지. 하지만 준비를 해야 해. 누구든 언제 가든지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해. 옛 조사들은 죽음을 칼로 허공 베는 것으로 비유했잖아. 칼로 허공을 벤다고 아픔이 있겠어.”
불자들을 위한 당부의 말은 ‘마음 쓰는(用心)’ 법에 대한 법문으로 이어졌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다’라고 스님은 전제했다.
“만약 오늘이라도 법이 없어지면 짐승같이 변할지 몰라. 사람 마음을 가져야 사람이고,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지면 짐승인 것이야. 짐승은 밥만 먹어도 배부른 줄 알고 족한데, 사람은 잔뜩 먹고 나도 욕심을 부리거든. 인간이면서도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사는 거지.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함부로 쓰면 안 돼요. 그것이 업이 돼. 욕심이 꽉 차서 자기 것인양 살게 되거든. 가져갈 것도 가져오는 것도 없이 업만 가지고 가는데…. 사실 자기 것이 어디 있어? 부인도 자식도 자기 것이 되겠어. 각자 인연에 따라 사는 건데, 같이 가려고 해도 같이 갈 수가 없어요. 혼자 가는 거지. 가져가는 것은 자기가 지은 업밖에 없어. 때문에 이를 인과응보라 했어요. 이것이 우주법칙이야. 우리가 하는 행위에 따라 결과는 좋든 나쁘든 자기에게 돌아가는 거야. 이것을 꼭 믿어야 됩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시간을 생명’처럼 여기라고 당부했다.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어. 다만 인간의 필요로 규정해 애용하고 있을 뿐이야. 편의에 따라 인간이 이리저리 끊어 쓰고 있는 거지.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시간의 중요성을 잊고 사는 것 같아. 주어진 시간은 늘 제한돼 있는 데도 수백년을 살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냉정하게 따지면 백년도 못 살고 죽는데. 그래서 우리에게 시간은 생명이야. 덧없이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생명을 헛되이 죽이는 것과 같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 혜정(慧淨) 스님은?
혜정 스님을 뵙자마자, 실례를 무릅쓰고 ‘장단지를 만져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해발 7백 미터에 자리 잡은 문수사를 20년 넘게 오르내린 스님의 다리 근력이 어떤지를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짐작대로 돌처럼 ‘딱딱’ 했다.
“난 그 흔한 자가용도 없어. 가끔 시내에 볼 일 있어 나와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녀. 좀 멀다 싶으면,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니지.”
그래도 산중에 사시니까 자동차가 필요할 텐데…. 돌아온 스님의 대답은 이랬다. 시주 받은 돈을 올바로 써야 시주자에게 복이 된다고 말했다. 스님은 출가 48년 동안 한결같이 ‘수행자는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계셨다.
스님은 삼각산 문수사를 중창하는 뜻도 설명하셨다. 고려 예종 4년 탄현 대감국사가 세운 호국사찰인 문수사가 ‘나라 사랑’을 일깨워주는 도량이 됐으면 하고, 태고 보우국사가 이곳 문수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듯이 출ㆍ재가자들도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중창 불사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의 문수사 중창 원력은 포교사 양성으로 옮겨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법을 전해주는 일이 한국불교가 살 길이라는 생각에서다. 때문에 스님은 매주 일요일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불교교리강좌를 열고, 법문을 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간다.
또 사이버 포교를 위해 올해 말에는 문수사 홈페이지를 개설한다. 이를 위해 틈틈이 컴퓨터도 배웠다고 하셨다.
혜정 스님은 1931년 충북에서 태어나 봉암사에서 청담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이후, 문경 봉암사, 합천 해인사, 마산 성주사 등에서 수행을 했다. 현재 조계종 국제포교사, 청담문화재단 이사, 도선사 선원 선덕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