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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 스님(봉화 각화사 선덕)은 주관과 객관을 나눠 보는 ‘이원적 사고’부터 마음에서 세탁해내라고 말했다. 그래서 선(禪)은 부정의 연속이고, 이런 과정에서 본래 자기 존재가 부처임(本來成佛)을 깨닫게 된다고 강조했다. ‘죽어야 비로소 살 수 있다’는 이치. 그 원리를 밝힌 것이 바로 <선요>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10월 26일, 불교TV 대구지사 무상사에서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선요> 특강. 고우 스님은 출가 수행자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에게 <선요>는 선수행의 필독서라고 강조했다.
<선요>는 선가에서 내려오는 선에 대한 지침서로, 중국 송나라 혜능의 23대 고봉현묘(高峰玄妙, 1238~1295)가 쓴 선어록. 현재 <서장(書狀)>, <도서(都序)>, <절요(節要)>과 함께 우리나라 강원의 사집과목 중 하나인데 재가불자들에게 본격적으로 강의되는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특강은 12월 21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진행된다. (053)754-6633
그럼, 고우 스님이 출가자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선요>를 재가자들에게 논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요>는 고봉 스님의 속가 제자 홍교조가 어록을 정리했기 때문에 <선요>야말로 재가불자의 선수행 방향과 방법을 가장 설득력 있게 알려주는 지침서다.
<선요>의 가르침을 압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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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을 뒤흔든다. 청중에게 고함을 지른다. 쓸데없이 법문을 들을 것도 없으니 가라고 말한다.’ 고우 스님은 <선요>의 구절을 인용하며, ‘철저한 부정’에 <선요>의 핵심이 있다고 말했다. 보고 듣는 이 순간조차도 부정해야 본래불성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로 통일된 그 자리를 발견하면, 죽은 송장처럼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 끝끝내 부정을 해야 한다. 주관과 객관을 나눠 보려는 이원적 사고를 깨는 것과 진리의 ‘달’을 가리키는 방편의 ‘손가락’도 단호히 쳐내야 한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결국 ‘일체를 세우지 않는다(無住)’의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부처와 중생, 해탈과 구속, 지혜와 번뇌도 세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대로다. 심지어 깨달음조차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 자리를 선을 통해 생활화하고, 본래 부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선의 사회화다.
●놓고 또 놓아라
본래의 내 마음을 배신하지 말라는 의미다. 귀와 입으로 비교해서 내 귀와 입에 상처를 줘 스스로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문제다. 원래 자기존재가 부처이고, 우리가 부처고,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다. 선은 그 마음자리를 알려주는 길이다. 그런데 선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선은 간단하다. 복잡하게 된 것은 주관과 객관을 벌려놓는 사고 때문이다. 발가벗은 그 상태로 선을 단순화시켜 놔야 한다. 벗어야 할 옷을 자꾸 입으려고 하는가. 왜 짐을 짊어지려고 하는가. <선요>에서는 없는 짐까지 짊어지려는 것을 없애라고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
●만 길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려라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긴 상태’. 분별과 경계에 길들어진 생각이 순간 ‘꽉’ 막히는 찰나다.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가 운문 스님의 ‘마른 똥 막대기’ 공안이 경계에 노예가 된 생각에 시비를 거는 순간이다. 그것이 생각의 ‘부딪침’이다. 그 부딪침을 한 번 두 번 수십 번 받는 순간, 분별심을 거둬내야 한다. 그래야 깨칠 수 있다. <선요>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1초짜리 화두참구’를 1분, 하루, 한달, 평생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고 있다. 마치 조각조각을 누빈 옷을 한 장의 옷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선요>는 수행과정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선수행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주ㆍ객관의 이원적 사고를 녹이고, 말과 생각의 길을 끊긴 부딪침의 순간을 늘리는 변화과정을 ‘서있는 것이 익어가고 익었던 것이 스러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속에서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아라
선과 일은 둘이 아니다. 생활 그 자체가 선이다. 때문에 선은 일상에서 말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기가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선요>에서 말하는 ‘활발발’의 상태다. 이러한 원리는 특히 재가불자들이 배우고 익혀야 한다. 재가불자들이 선을 수행으로 생활화하고, 포교로 사회화할 수 있기에 그렇다. 이 같이 수행해 선을 ‘자기화’하면, 자주적이고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삶이 역동적으로 변한다. 사는 보람도 뒤따른다. 때문에 <선요>에서는 ‘선이 생활’이라고 하고 있다. 또 ‘선은 체험’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인터뷰】“<선요>는 이원적 사고를 깨는 법문집입니다.”
“‘나’다 ‘너’다, 우리는 이원적 사고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연기법 원리로 보편화돼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 자체가 착각인데도 말입니다. <선요>는 그런 착각을 깨부수지요.”
때문에 고우 스님(사진)은 <선요>가 ‘선수행의 교과서’라고 말했다. 수행과정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선을 ‘생활화’하는데 길라잡이가 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재가불자들에게 강원 사집의 하나인 <선요>를 강의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선요>는 이론서가 아닙니다. 철저히 체험의 이야기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선요>의 처음과 시작은 먹고 사는 일상생활에서의 수행 안내로 구성돼 있습니다. 화두참구법, 3분심(신심, 의정, 용맹심), 화두 참구과정에서 만나는 각종 병 등을 상세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스님은 다른 조사어록들과 달리 <선요>가 재가불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수행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꼭 공부하기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