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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따르면 부설은 신라 28대 진덕여왕 1년(647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성은 진(陣), 이름은 광세(光世)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일곱살 때 법문에 통달하여 법명을 부설(浮雪), 자를 천상(天祥)이라 했다. 영조, 영희 스님과 지리산에서 참선수행한 후 변산으로 건너와 묘적암을 짓고 정진했다. 도반들과 문수도량 오대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김제 구무원(仇無怨)의 집에 머문다.
1400 년 전, 부설 스님과 영희, 영조 스님이 넓은 호남평야에 취해 걷던 때는 봄이었다. 그것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허허벌판에서 만난 구무원(仇無怨)의 집은 부처님 집만큼이나 반가운 존재였다. 하늘이 인연을 맺어주고자 했는지, 몇 날을 계속해서 내리는 봄비에 발걸음을 멈춰야했다. 재가불자였던 구무원은 수시로 스님들에게 법문을 청했고, 딸 묘화도 틈틈이 귀동냥을 했다. 이렇듯 불교소설 <부설전>은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롭게 전개된다. 스님과 젊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파격적인 소재, 더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줄거리가 더욱 솔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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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부재치소(道不在緇素) 도부재화야(道不在華野) 제불방편(諸佛方便) 지재이생(志在利生)
(도라는 것은 승려의 검은 옷과 속인의 하얀 옷에 있지 아니하며, 도라는 것은 번화로운 거리와 초야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의 뜻은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는 데에 있도다.)
이처럼 <부설전>의 주무대는 구무원의 집이 있던 김제 호남평야다. 시대를 뛰어넘어 부설 거사를 찾을 수 있는 흔적은 400년 전 쓰여진 <부설전>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화이다. <부설전>에는 구무원의 집이 ‘두능연지(杜陵蓮池)’로 나와 있다. 오늘의 김제 성덕 묘라리 마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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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울 마을’은 야트막하게 솟은 언덕배기에 50여 가구가 아담하게 자리한 전형적인 평야지 마을이다.
“여기가 부설 거사가 살았던 부서울 마을이야. 묘화 부인이 부설원을 세워서 좋은 일 많이 했는데 그 부설원이 부서울로 변한거지.”
촌로 최판호(84) 옹이 ‘부서울 마을’의 유래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부설 거사와 묘화 부인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며 ‘성현이 살았던 동네’임을 강조한다.
동네 어귀에 ‘구가동’이라는 언덕배기가 있다. 지명이 말해주듯 묘화 부인의 집안인 구씨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려준다. 최씨 노인도 ‘부설원’ 위치를 오늘의 ‘구가동’ 언덕으로 보고 있다. 세월이 흘러 민가는 없고 나무 몇 그루와 오래된 묘가 몇 기 남아 무상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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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울 마을’에서 망해사는 15리 거리이다. 망해사(望海寺)는 말 그대로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수행터’이다. 아마도 부설 거사의 공부가 익어서 보림하던 도량이 아닌가 싶다. 부설 거사가 정진하던 초막은 세월이 흘러 지각변동으로 바다에 잠겼다.
1999년 10월 10일, 지역의 불자들이 부설 거사 초막자리가 있던 갯벌에 향나무를 묻고 ‘매향비’를 세웠다. ‘더불어 좋은 세상’을 발원하던 부설 거사의 뜻이 향이 되어 천하에 퍼지는 듯 하다.
어느날, 부설 거사는 아이들과 살림을 묘화 부인에게 맡기고 병을 빙자해 두문불출하며 용맹정진에 들어간다. 그때 오대산으로 떠난 영희·영조 스님이 부설 거사를 찾아온다. 못다나눈 법담을 나누다 ‘물병 깨트리기’로 그동안의 공부를 시험하고 속가에서 공부한 부설 거사의 공부가 수승함을 확인한다. 그 후 부설 거사는 법을 설하고 좌탈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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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설 거사가 입적하자 묘화 부인은 아들 등운과 딸 월명을 출가시키고, 전 재산을 내놓아 ‘부설원’을 세운다. 묘화 각시는 이곳에서 부설 거사의 뜻을 받들어 평생 보살행을 실천하다 110세가 되어 편안히 앉아 입적한다.
<부설전>의 무대는 다시 월명암으로 옮겨간다. 출가한 등운과 월명은 부설 거사가 창건한 묘적암에 등운암, 월명암 토굴을 지어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진 끝에 대성득도한다.
부설 거사가 스님 시절에는 이름이 묘적암이었던 월명암은 내변산 국립공원 내에 자리해 있다. 거리가 가장 가깝다는 남여치 매표소에서도 족히 50여 분은 걸어 올라야한다. 천하절경을 자랑하는 월명암은 변산 8경중 제4경 월명무애(月明霧靄)와 제5경 서해낙조(西海落照)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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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소실된 월명암은 최근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요사채를 완성하고 대웅전과 관음전이 내년 봄 낙성식만 남겨두고 있다. 법당 뒤편엔 부설 거사 일가족이 성인이 된 것을 기리는 ‘사성선원(四聖禪院)’이 자리해 있다. 오른편에 묘적암이 있으나 등운암은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삶이 그대로 수행임을 보인 부설 거사. 그 행적지를 따라가다 보면, 묘화 부인과 가정을 이룬 것은 소승적 파계가 아닌 만물을 포용하는 중생제도의 대승적 실천이었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성불에 출·재가가 구별되지 않음을 온가족과 함께 보여준 가르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