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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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일하고 쉬는 일상 '禪'
육조혜능 스님이 토대를 일군 조사선은 형식적인 출가와 좌선 수행을 넘어 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수도하는 생활불교, 거사불교의 길을 열어주었다. 선사와 거사들이 하나가 되어 발전시켜온 조사선에서는 인간의 삶이 바로 수행이며 백성의 가택이 곧 선방이 되었다. 중생과 부처, 세간과 출세간을 둘로 보지 않음으로써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자질구레한 일상사에서 생활속 수행을 통한 해탈을 거듭 강조했다. 노동과 수행이 둘이 아닌 재가 수행의 길을 활짝 열어 놓았던 조사선의 근본 정신을 돌아봄으로써 생활 속의 선수행이 어떠해야 할 지를 알아본다. 아울러 현재 선 수행의 전통이 남아있는 한국과 일본의 생활선 현장을 살펴봄으로써 바람직한 발전방향을 모색해 본다.

●생활 속에서 본래심으로 살아야

“세간에서 불도를 닦아도 어느 것 하나 그 수행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 항상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알아 반성하면 그대로 도와 딱 들어맞는 것이다.“(단경교석)

조사선의 기본 정신은 자각된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으로 일상생활을 일체의 경계에 매몰되거나 걸림없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생활종교라고 할 수 있다. 성본 스님(동국대 교수)은 “선이란 평상심으로 일상생활을 자유롭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그 전부를 말한다”며 “선은 ‘평상심이 바로 도(平常心是道)’인 생활이며, 이 깨달음의 평상심으로 부처의 경지를 전개하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상심으로 도의 생활을 전개하기 위한 조사선의 기본적인 수행체계는 좌선과 선문답, 그리고 울력으로 이뤄진다. 혜능 스님이 제창한 일상생활을 이끄는 ‘올곧은 마음(直心)과 자성’은 후일 마조 스님의 ‘평상심’으로 정립됐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는‘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구체화된다.

●평상심이 도(道)

평상심은 범부의 중생심을 말하지는 않는다. 선정에 집착하지 않고 구체적인 대상 경계에서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다. 마조 선사는 <마조록>에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이렇게 설명한다.

“도를 이루는데 수행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오염이 되는가? 생사의 마음을 일으키고, 조작하여 취향(趣向)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오염이 된다. 만약 곧바로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도 없고, 취사(取捨)도 없고, 단상(斷常)도 없으며, 범성(凡聖) 등의 차별심, 분별심도 없는 그 마음이다. … 다만 지금의 행주좌와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사물을 접하는 것이 바로 도인 것이다.”

‘평상심이 도’가 되는 생활선은 이러한 오염없는 청정한 본래의 평상심으로 일상생활을 지혜롭고 무애자재하게 전개하는 자각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대혜 스님 “간화선은 재가자에게 적합”

선종의 중·후기에 성립된 간화선 역시 생활선으로서 주창된 것이지, 상근기의 소수 전문가들을 위한 수행법이 아니다. 간화선의 주창자인 대혜 스님의 <서장>에는 이러한 점이 뚜렷이 밝혀져 있다. 62편의 편지글 가운데 무려 60편의 글이 재가불자를 상대로 화두 참구를 권하고 있다. 그 내용에서도 만사를 제쳐놓고 조용한 곳에서 화두를 들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서 화두를 놓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생활을 떠난 적정처에서 묵묵히 앉아 오직 좌선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이들을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월호 스님은 “화두 참선법이야말로 모든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개발된 가장 발달한 수행방법”이라며 “일단 적정처에서 좌선하기를 권한 것은 오히려 생활하는 가운데서도 수행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다.

●노동은 참선의 연장

조사선은 노동과 일상생활상의 모든 잡무를 통해서 본래심을 전개하는 동중(動中)의 공부라 할 수 있다. 인도불교에서는 출가 승려들의 노동은 계율상에는 금지되어 있지만, 당대의 조사선에서는 <선원청규>를 제정하고 선원을 율원에서 독립시켜 작무와 생산노동에 전 대중이 모두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한 보청(普請)의 법을 제정하면서 일반화된, 선원의 수행생활이다.

동산법문을 펼친 4조홍인 스님이 처음 4조도신 스님의 문하에서 수행할 때 낮에는 노동에 힘쓰고 밤에는 좌선에 힘썼다고 한결같이 전하고 있는 기록으로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육조단경>에는 홍인의 문하에서 노행자(盧行者) 혜능이 디딜방아를 찧는 노동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과 수행의 통일은 백장회해 선사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하는 한마디로 파악할 수 있다.

●‘보고 듣는’ 이것이 무엇인가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성우(38) 씨는 직장생활 속에서도 ‘이뭣고’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김 씨는 출·퇴근 시간을 비롯하여 아침에 눈을 떠 세수할 때부터 직장에서 근무하며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서 일보고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모든 일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見聞覺知)’ 이것이 무엇인고(이뭣고)란 화두를 들고 있다. 바로 지금, 안이비설신의 육식(六識)을 통해 보고 듣고 말하고 아는 자성 즉, 무위진인을 확인하는 공부다. 고인들은 언제나 ‘바로 지금’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당체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음의 시절은 당장 눈앞에 작용하는 그곳에서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기에 재가자는 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육신을 움직이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해야 한다.

●수행 보다는 ‘휴행(休行)’을

선은 ‘망상과 분별심을 쉬는(休)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근대 중국의 고승인 허운 대사는 ‘쉼이 곧 깨달음(歇卽菩提)’이라고까지 단언했다. 그는 “달마 조사와 육조 스님의 가르침 중에 ‘모든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씀만한 것이 없다”고까지 첨언했다. 또한 임제 선사는 <임제록>에서 “여러분! 바로 그대들의 목전에서 작용하는 자네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모든 망념을 쉬고 또 쉬어(休歇) 무사히 지내는 것이 제일이다. 이미 일어난 망념은 계속되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망념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선사들은 선 공부를 제대로 하면 휴식과 일이 둘이 아니게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수행’ 보다는 ‘휴행(休行)’이 중요하며 제대로 쉴 줄 아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매순간 선 자리에서 주인돼라

조사선의 기본적인 정신은 평상심(본래심)을 일상 생활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삶자체가 선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임제 스님은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육신이 아니라 그 사대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그것(무위진인)’이다”며 ”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고 선 자리가 모두 진실되게 하라(隨處作主 立處皆眞)”고 당부한다.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은 “우리에게 가장 큰 병은 경계를 따라가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며 “생멸변화와 늘 함께 하면서도 생멸변화 없이 항상 그대로 지금 ‘나’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있는 무위진인을 확인하라”고 말한다.

●집착과 분별심 버려야 행복

3조승찬 스님은 <신심명> 첫 구절에서 “도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시비분별을 싫어할 뿐이다(至道無難 唯嫌揀擇)” 고 강조했다. 황벽 선사는 <전심법요>에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불법을 모조리 배울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함이 없고 집착이 없음을 배워야 한다.“고도 했다. 조사선의 수행은 중생을 부처로 바꾸는 본질의 변화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바탕을 바로 보지 못하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수행이라 한다.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사량(생각하여 헤아림) 분별에 있으며, 분별하는 까닭은 자기 자신을 비뚤어지게 보는 데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원명선원 회주 대효 스님은 ”일념으로 사는 참선이 불교다“며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 선 공부의 처음과 끝“이라고 강조한다.

●‘본래성불’ 믿고 생활 속에서 확인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 덕상(德相)이 있건마는 분별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화엄경)

조사선은 ‘본래 깨달음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本有覺性)는 이 믿음에서 출발해, 이것을 확인(見性成佛)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원의 청규를 기록한 <환주청규>에는 “일을 할 때나 좌선을 할 때나 동정(動靜)의 두 모습이 여여하게 같아야 하며 근원적인 본래심인 당체는 일체의 경계를 지양(초연)하도록 해야 한다”는 글이 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도 일하고 대화하고 있는 본래면목(자성, 주인공, 무위진인)을 확신해야 하며, 늘 자기의 ‘육신과 의식’이 아닌 허공이 말하고 듣고 일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김재경 | jgkim@buddhapia.com |
2004-10-12 오후 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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