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불교에만 있는 것 아니에요?” “기독교의 묵상기도도 명상이라고 하나요?”
최근 인터넷 검색사이트 지식정보 찾기 코너에 올라온 질문들이다. ‘명상’이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 가부좌와 꼭 감은 눈만으로도 ‘명상’을 논하곤 하지만 종교계에서는 “종교의 핵심은 명상에 녹아있다”며 그 방법과 과정을 상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정태혁 동국대 명예교수가 최근 다시 펴낸 <명상의 세계>(정신세계사)를 통해 종교별 명상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유교의 명상법
“수산이라는 산에는 나무가 아름답게 우거져 있었다. 그런데 마을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와서 나무를 마구 베어갔다…중략…그래서 벌거숭이산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 산에 처음부터 나무나 숲이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그 산의 본래 모습이랴. 사람도 이와 같으니, 사람에게는 본래 인과 의가 있어 이것이 본성이 되었는데, 기질에 얽매어 자꾸 베고 뜯으니 그대로 보존될 수 있겠는가.” (맹자, <先子章>)
유교에서는 본래 산의 모습을 되찾는 노력, 즉 본래 성품을 되찾는 과정을 ‘명상’이라고 보고 있다. 흔히 유교에서는 자기 자신을 이겨내라고 하여 ‘극기(克己)’를 강조하는데, 이겨야 할 대상은 욕심과 자기중심적인 사고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본성’이란 어떤 것일까. 퇴계 선생은 “거울 앞에서 사물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비춰지듯이, 마음의 본성역시 이와 같아 사물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게 된다. 마음이 항상 맑고 비어있으면 때가 묻을 수가 없고,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고요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노력이 곧 명상으로, 정태혁 교수는 “그저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을 넘어서 지극히 착한 마음을 갖는 것도 유교의 명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도교의 명상법
장자의 심제법(心齊法)에는 마음을 고르게 하는 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실려 있다. “만약 뜻을 한결같이 가지려면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않고 氣로 들으며, 듣는 것이 귀에서 그치며, 마음이 신령에서 그쳐야 한다. 기라는 것은 텅 빈 것이나 사물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오직 기를 텅 비우는 것이 道이니, 비우는 것이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니라.”
장자는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으로 도교 명상을 시작하고 있다. 마음을 한결같이 통일한 후에는 마음으로 숨을 듣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로 들을 것’까지 권하는 것이 도교의 명상이다.
즉,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 ‘마음’과 ‘숨’은 구별할 수 없는 하나가 되고, 숨은 마음의 듣는 대상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어 대립이 끊어진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 역시 최상이 될 수 없다. 감각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명상이 깊어지면 완전한 무감각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 세계가 곧 기로 듣는 세계이자 자연 그대로의 상태, 즉 道이다. 정태혁 교수는 “텅빈 상태, 道 그대로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이 한결같이 고르게 된다”며 “이것은 도교가 지향하는 명상법의 하나”라고 말한다.
▽ 기독교의 명상법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이자 궁극적 신앙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명상 역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집중과 관련이 깊다. 즉,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하나님의 은총 아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상에도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이 주는 무엇을 받기 위해 기도한다. 주님이 주는 영원한 사랑, 관용과 용서의 마음 등이 그 예다. 두 번째로는 호흡에 대하여 의식을 집중하도록 한다. 대상자는 날숨에 불안을 떨치고 들숨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들이마실 것을 간절히 기도한다.
이로써 마음이 편안해지면 마음 속 의식을 하나님께 집중한다. 잡념이 생긴다면 그 잡념까지 하나님께 맡긴다. 이렇게 얻은 집중력으로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명상으로 접어든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피조물을 통해 자신의 뜻을 계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어 오감을 모두 동원하여 성서에 대한 명상에 집중한다. 또한 꿈에 나타나는 무의식의 세계도 명상해 본다. 꿈 역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기독교 명상에서 말하는 궁극의 단계는 역시 ‘신과의 합일’이다. 정태혁 교수는 “나라는 인간이 무로 돌아가서 비로소 신의 경륜으로 이루어야 가장 높은 단계의 참된 명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이슬람교 명상법
이라크의 나크샤반디는 그의 저서에서 수피즘의 명상을 다음과 같이 간략한 시로 기록하고 이에 따를 것을 권고했다.
“앉는다, 눈을 감는다. 지극히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네가 죽고 고인(故人)을 추모하는 조문객과 심판에 직면하여 홀로 떠나는 너의 모습을 그린다/ 너의 모든 감각에 집중한다/ 마음속의 일시적인 충동과 잡념들을 내쫓는다/ 그리고 너의 감지력을 신을 향해 돌린다”
타고르에 필적하는 시인으로 알려진 신비가인 무하마드 이크발 역시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네 가지 단계를 가르치고 있다. 첫 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요, 둘 째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탐구요, 셋 째는 자기 영혼의 깊을 곳을 들여다 보면서 얻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요, 넷 째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실화, 곧 깨달음이다. ‘현실화’는 명상을 통해 신과 합일하는 경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한다.